슬그머니

by 관지

주님

오늘은 섬을 나와 시골집에 왔습니다.

아마 한동안은 시골집과 본가를 오가며 식구들과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제사를 지내는 집도 아니고

또 굳이 가족모임을 강조하는 분위기도 아니니 명절에 안 와도 아무 상관이 없지만

그래도 오겠다니 좋을 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시골집에 오니 마당에 흐드러진 꽃무릇이 반가왔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아니 그래서 더욱 기쁘고 좋았습니다.

마치 누군가 슬그머니 내미는 뜻밖의 선물처럼.


어떤 기대도, 수고도, 애씀도 없이

그저 거기 있음으로 누리는 기쁨.


주님

저도 이런 기쁨을 식구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어떤 책임이나 의무나 체면도 없이

그저 함께 있음으로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는 시간.


러려면 너무 잘해주려고 애쓰지 말아야겠다

미리 다짐을 해 봅니다만

그동안의 습이 있으니 잘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모쪼록 잘해주려는 마음 없이도 잘 지낼 수 있도록, 그저 가볍고 편안하게

아끼는 마음만 슬그머니 내놓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주님

저에게 잘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괜찮은, 가족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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