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탕의 즐거움

by 관지

아침 일어나 하늘을 보니 맑다.

떠날 준비를 챙기고 팽목항에 갔다.

요즘은 제주도에 가는 산타모니카호가 생긴 후로 주차가 쉽지 않으니

일찍 가야 한다.


9시 배를 탔고 잘 가는가 했는데 3분의 2쯤 가다가 되돌아왔다.

안개 때문에.

내가 사는 섬은 먼바다에 속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종종 있다.


처음에야 낙심도 하고

온 길이 아까워 속이 상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런가 보다 하고 웃는다.


계획이 틀어져도 방해로 여기기보다는

보호장치로 받아들이면 편하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면 그걸로 된 거다.


그리하여 다시 돌아오다가 보니 오늘이 장날이라 장에 갔다.

오이모종과 뒷마당에 심을 레드향 묘목을 하나 샀고 어르신들 드릴 먹거리도 좀 챙겼다.


그럼 내일은 갈 수 있으려나

그건 또 내일이 되어 보아야 안다.

그래도 괜찮다.

날씨가 언젠가는 길을 열어줄 테니.


나는 내 마음대로 되어도 좋지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을 때의 내가 좋다.

왠지 세상살이 품이 좀 넓어진 것 같아서.


오늘은

섬에 들어가려던 내 하루는 허탕을 쳤지만

그 허탕이 주는 계획 없는 한 날을 하릴없이 잘 놀았다.

모처럼 혼맥의 즐거움까지 곁들여...

그럼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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