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진 것들을 싫어합니다

모든 것은 제가 단단하지 못해서입니다.

by 윤목

상담을 하거나 책을 보다 보면 상당히 거북스러운 문장들을 만나곤 한다. 제 아무리 각자의 생각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딘지 모를 그들의 확신은 늘 나를 더더욱 부정적으로 만들었다. 때로는 그런 나 스스로의 모습을 보며 사회 부적응자는 아닌지 되돌아보는 습관마저 생길 지경이다. 가령 말하는 이의 확신에 대한 대상이 내가 아니다 할 지라도 듣는 이인 나는 늘 불편했다. 오지랖이 넓다고 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정해진 것을 싫어하니까.


대체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정해진 것이 싫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을까. 아마 그 시발점은 중고등학교 시절이었던 듯싶다. 받은 성적에 따라 높으면 성실한 아이, 착한 아이, 똑똑한 아이로 낙인찍혀 버렸던 시절. 반대로 낮은 성적을 받으면 공부 못하는 아이, 집중력이 낮은 아이, 헛 똑똑이 등 온갖 비난과 멸시의 수식어들이 네임택처럼 따라다니게 만들었단 시절이었으니까. 미련하게도 어린 시절의 나는 타인이 붙여준 수식어에 스스로를 정의하는 삶을 살았다. 나뿐이었을까. 대다수의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때의 또래인 우리들은 서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성적으로 나뉘어져 버리는 우리의 됨됨이들은 결코 우리를 수식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저 어른들이 아이를 구별하는 기준들이었고 그 중복 가능한 닉네임들은 어느 학교에서나 존재하는 꼬리표 들이었다. A학교의 1등에게 붙여진 ‘똑똑하고 착실한 아이’라는 수식어는 B학교에서도, C학교의 1등 들에게도 붙여져 있듯이.


그렇게 성적 매김을 싫어하면서도 입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가장 좋아했던 과목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단연 ‘국어’ 과목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좋지는 않았다. 엄밀히 말해 국어 과목이 담아내고 있는 문학과 비문학의 글들이 좋았지. 시험 문제들은 물론, 정해진 사고와 답을 머릿속에 주입해 주는 수업 시간들에는 전혀 호감이 없었다. 글을 쓰는 것은 작가의 마음이고 글을 읽는 것은 독자의 마음인데 작가의 의도를 독자가 꼭 파악해야 하는가. 파악을 해야 한다고 한들 글을 읽고 각자가 처한 상황과 가지고 있는 생각에 따라 달리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을 자습서와 교과서에 정해져 있는 천편일률적인 답으로 외워야 한다니. 생각을 정해 놓는 교육의 과정 자체가 싫었다. 한 명의 반항아처럼.


“너는 그 일이 참 잘 어울린다”


가장 꺼내기 힘든 말이다. 그래서 꺼내어 본 적이 거의 없는 말. 이런 뉘앙스의 말을 쉬이 상대에게 건네본 적도 건네볼 생각도 없는 편이다. 타인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아서 그렇다. 어쩌면 굉장히 건방진 말일 수도 있다. 그만큼 나의 말에 무게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는 의미니까. 그렇다고 해서 간과할 수도 없는 부분이다. 우리 모두는 단단하지 못한 사람들이라 타인의 시선과 대우에 따라 바뀌는 습성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사회성이라는 것을 지니고 태어나 타인과 자연스럽게 서로가 스며들며 살아가는 만큼 자연스레 체득되어 버릴 수밖에 없으니. 그 깊이가 깊든 얕든 서로에게 스며드는 과정에서 무심코 건넨 나의 한마디의 문장에 자칫 스스로의 삶을 규정해 버릴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어쩔 수 없이 한마디를 내뱉게 되는 날이면 내 한마디에 흔들리고 굳어질 정도로 마음이 단단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틀리길 바랄 뿐이다.


깊어진 밤을 지나 어스름한 새벽녘 마저 뒤로한 채 아침을 맞이하며 밤을 꼬박 새워본 날이 잦다. 대개 밤을 새우는 이유는 타인과의 생각의 공유에서 스스로의 생각과 비교하며 납득하려 드는 경우들이었다. 나에 대하여 정의하는 대화들, 전혀 그렇게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그리 되고 싶지 않은 모습의 가면들이 자꾸만 나의 삶에 씌워지는 느낌들이 나를 겹겹이 에워쌌다. 그런 대화들을 주고받은 날이면 하루의 많지 않은 대화중 나의 가치관과 충돌하는 이야기들을 곱씹어 보곤 했다. 비록 대화 당시에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 지긋이 웃으며 세상에 더할 나위 없는 포용의 대가처럼 보이려 포장했다 하더라도, 잠자리에 누워 곱씹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단단하지 못한 스스로의 탓이었다. 시침의 바뀜을 지켜보는 기나긴 상념의 시간이 지나고 결국은 또 스스로를 위안한다.


찰나의 순간 타인에게 보인 나의 모습이 온전한 스스로는 아니라고. 그리고 타인이 정해버리는 삶을 선택하고 싶지는 않아 보다 단단해지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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