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선택의 순간들이 있었다

30대가 되기 전에 알았다면 좋았을 것들 #11

by 윤목

'내가 했던 선택들은 모두 맞았을까? 아니, 맞다는 표현보다는 옳았을까? 하루에도 수십 번씩 선택하도록 만든 삶이 떠밀어 신중하지 못하고 가벼이 여겨버린 선택들이 있지는 않았을까.'


찰나의 중요하지 못했던 혹은 중요하지 않았던 선택들이 습관을 이루었다. 습관으로 인해 선택이 아닌 흐름으로 변하게 되어버린 선택들은 더는 삶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야 나는 깨닫는다. 정말 소소한 선택들이 어쩌면 가장 중요한 선택이었을 수 있었다는 생각. 그 소소하다 생각되었던 선택들은 최선이었던 것인지, 차악을 선택했던 것 인지에 대한 의문을 던져본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나는 그 의문에 대한 답이 어찌 나올지 뻔히 알고 있다.


'그래도 최악은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


그랬다. 최선을 다해 차악을 골랐다. 스스로를 가련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의 병이 있어 그런지 내가 선택해야 했던 모든 순간들은 늘 더 나빠질 것이냐 아니면 벗어나느냐의 기로에 놓였던 힘든 선택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밥 하나를 먹는 것에 있어서도 배고픔에서 빠르게 벗어나기 위해 아무런 음식이나 시켜 볼 것이냐 아니면 좀 더 고민해서 모든 것이 맛있어질 시기가 찾아왔을 때에 아무런 음식을 시켜 먹을 것이냐에 대한 심오한 고민이 바로 그 예이다. 남들에게는 쉬운 일 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선택의 괴로움의 연속으로 인해 힘든 시간이었다. 유난하다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대다수가 그렇지는 않으니 어쩌면 내가 너무 부정적 이거나 쓸데없이 어두운 것 일지도.


말로는 긍정을 외치며 속으로는 한없이 부정인 경우들이 있다 보니 긍정을 외치던 선택은 지레 부정의 결과를 낳기 마련이었다. 그러고 나면 늘 ‘설마가 역시..’라며 실망과 좌절이 갇혀 다음의 차악을 선택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일도, 사업도, 사람의 관계에서 마저도 차악이 차악을 선택하게 만드는 굴레는 그렇게 삶의 덫이 되어 발버둥 칠 수록 육체와 정신을 옥죄어왔다.


반복되는 옥죔의 과정에서 몇 가지의 단계가 찾아왔다. 처음엔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스스로에게 짜증이 났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모든 것은 다 나의 선택이었으니까. 그 다음은 미치도록 싫어 떨치려 해도 쉽사리 떨쳐지지 않는 현실과 멀어지기 위한 방안으로 술을 마시기도, 흡연을 하기도 했다. 일종의 약물이라 하면 약물이라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의존이라 할까. 하루, 이틀, 일 년, 이년 맛도 좋고 영양도 좋을 담금주의 훌륭한 소재가 되어버린 나는 더 이상 스스로의 힘으로 두발을 딛고 서있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화장실, 방, 화장실, 방에 생활환경이 국한되며 짧아진 동선만큼이나 삶에 대한 의지도, 생각도 짧아졌다. 삶에 대한 생각을 하는 시간보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무기력함은 다행스럽게도 술과 담배는 끊어내게 했다. 아마 아플 용기는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계속되는 차악의 선택 속 나는 어느새 기꺼이 고민해 가면서 행복함보다는 덜 불행함을 위한 선택들을 해 내고 있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불행 속에 살아가는 가련한 존재라 위안 삼으며 불행을 삶 자체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누가 불행한 삶을 살고 싶어 할까. 다만 불행에 익숙해져 있던 것 일 뿐. 이번의 선택도 차악이라 생각했던 선택의 순간에서 최선, 아니 최고의 선택지가 보이기도 한다. 불행을 위한 선택의 반복 속에서 더 이상 마지노선이라 생각한 순간이 찾아온 순간 이번만큼은 최선의 선택을 하기로 했다. 이미 힘을 잃어버린 두 다리는 다시 걷기 시작하는데 상당히 많은 용기와 노력을 필요로 했다. 마음만 앞서 이미 달리고 있는 이들의 모습과 비교하며 다시금 차악을 선택하려 드는 습관이 나오려 들었다.


“아직 이제 다시 시작이야. 천천히 해”


의지가 되면서도 정신을 바짝 들게 해주는 걱정 어린 말이 들려왔다. 불행을 향한 삶을 살아가던 나는 아직 스스로를 아끼는 법을 몰랐다. 그저 달리는 것에만 신경 쓰는 바람에 나의 상태조차 돌보지 못했다. 나 스스로를 돌보지 못해서 그 오랜 시간 동안 차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놓고선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려 들었다. 그래서 이번엔 최고에 가까운 최선의 선택을 하는 중이다. 나를 조금 더 사랑해 보기로 하는 선택.


사실 알게 모르게 모든 선택의 순간들은 한 두 가지의 선택지만을 내밀지 않았다. 늘 가장 중요한 것들은 세 번째 네 번째의 순위에 있기 마련이다. 모든 이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특히나 코앞의 현실만을 바라보는 이가 있다면 수십 가지의 선택지 중 좋아보이는 한 두 개만 뽑을 것이다. 지금 당장 벗어날 수 있는 그런…본인이 하고 싶은 방향에 대해서만 바라본 채… 그러고는 나처럼 차악의 굴레에 빠져들겠지. 선택을 할 때에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래야 정말 중요한 선택지를 찾아낼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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