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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목 Oct 03. 2021

늘 똑 부러질 필요는 없어

30대가 되기 전에 알았다면 좋았을 것들 #13

어릴 때부터 줄곧 들어온 말

"똑 부러져야 한다"


 아빠,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 가족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똑 부러진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들었다. 애매한 입장을 취하여 섣불리 원하는 것을 말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가족들은 나에게 입을 모았다. 언제나 가족들이 원하는 답은 정해져 있었다. 아니었다고 부정한다고 하더라도 어렸던 나는 왜인지 모르게 원하는 답이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고 그 답을 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에 결국은 뱉어냈다. 모두가 원하는 답을. 가족들이 고의로 나에게 이런 생각을 심지는 않았을 테다. 다만, 몇 번 힘겹게 뱉어냈던 의견에 대한 부정이나 실망감을 표현한 모습들이 나를 자꾸만 작아지게 만들고 눈치를 보게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니 나에게 똑 부러져야 한다는 것은 타인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타인이 원하는 답을 주는 행위로 인식되었다. 답의 이유는 알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의도였든 아니었든 강요된 똑 부러짐에 대한 요구에 나는 겉만 번지르르한 당참의 답을 들려주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똑 부러짐 뒤에 다가올 책임은 생각하지 못하는 말만 앞서는 사람이 되어 버리게 만들었다. 부모님은 나에게 늘 현명하지 못한 사람이라며 책망할 때가 있지만 말과 책임은 늘 나란히 걷는 동반자와 같은 존재였음을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라 해야 할까. 씁쓸함이 찾아온다.


 똑 부러짐과 당참은 비슷한 맥락의 단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20대가 당찼고 똑 부러진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 자평 해 본다. 그러나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스스로의 생각 자체를 말한 적은 거의 없었지 않았나 하는 후회가 물밀듯이 몰려온다. 하기 싫어도 감내할 수 있는 범위면 할 수 있다며 당차게 말했던 그 시절. 결과는 늘 스스로를 힘들게 했으나 스스로가 뱉어낸 말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나의 몫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끝끝내 해내고야 말았던 그 시절. 그러니 타인에게 나는 '예스맨'이라는 인식을 갖게 했을지도... 생각해 보면 내 입에서 'NO'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은 한 겨울에 자라나는 새싹을 찾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어느 정도 감내할 수 있는 정도의 속 빈 똑 부러짐은 관두고 싶은 마음을 참고 책임을 질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는 스스로를 성장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저 그런 무엇이든 들어줄 예스맨이 되어가는 과정이었을 뿐이다.


 그 예스맨의 과정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스스로가 스스로를 얽매고 만들어 버리는 것 일지도 모른다. 뱉었던 말에 대한 책임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기꺼이 부탁을 마무리 짓는 순간 힘들었던 것이 눈 녹듯 사라지는 참 별난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니까. 이는 거짓된 똑 부러짐이 끝나는 순간 다음 선택지를 들이밀면 여지없이 또다시 똑 부러진 척을 하고 이는 무한 반복의 굴레가 된다. 한 가지 스스로를 위안 해 보자면 그들이라고 악감정을 갖고 그러는 것은 아닐 것이다. 꾸역꾸역 해내는 사람이 되어버린 나에게 더 이상 고마움을 느끼지 못한 채 부탁하게 되었을 뿐... 호의가 계속되면 둘리인 줄 안다는 우스갯소리가 참 웃프다.


 똑 부러진 줄 알았던 나의 똑 부러짐은 사실은 맹탕이었다. 거절이 언제부터 그리 꽁꽁 싸매서 남들 눈에 비추어 보이지도 못할 보물 같은 존재였을까. 내가 부탁하는 입장이 되었을 때야 비로소 결국은 거절하지 못해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필요할 때에 나를 찾던 이들은 정작 내가 그들을 찾자 가감 없이 거절의 의사를 내 비추었다. 그제야 알았다. 똑 부러지게 말해놓고 그에 뒤 따라오는 책임에 고통받는 미련한 짓은 결국 남 좋은 일이었다는 것을. 나의 노력과 정성을 알아줄 이 보다 무시할 이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말이다. 남들이 쓸어버릴 하얀 눈 위에 예쁘게 위로의 말을 적어 두는 나만 아는 그런 노력.


 애초에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라면 애매한 태도를 취하자. 구태여 똑 부러지게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내어주지 않아도 괜찮다. 홀로 애쓰고 마음고생해 봐야 알아줄 이보다는 결과만을 원하는 부탁을 하는 이들이 태반이다. 어차피 상대가 바라던 답은 긍정이었고 내가 바라는 것은 부정이니까. 그리고 내가 답해주지 않으면 더 이상 그들은 나에게 답을 요구하지 않을 테니. 그러고는 또 다른 이에게 부탁을 하러 연락처를 실컷 뒤지고 있을 것이 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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