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꽤나 오랫동안 좋아해 왔다. 비를 맞는 것 까지 좋아 한 것은 아니지만. 그 시작점이 어딘지 모를 물방울들이 하늘에서 떨어져 땅에 부딪히고 산산히 부서지며 내는 소리들이 때로는 상념의 시간으로 안내 했고 때로는 시원한 감각을 일깨우곤 했다. 그러고 보니 물방울들의 희생이 삶에 위안이 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도 같다.
비를 맞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양말이 젖고, 어깨가 젖는다. 몸을 감싸는 것들에 물의 무게가 더해져 안그래도 지친 삶을 더욱 무겁게 만드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거워진 것들은 늘 한결같이 피부를 통해 눅눅함과 찝찝함을 가져다 준다. 그러니 나는 비를 맞는 것 보다 보고 듣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촉감을 제외한 시각과 청각에 즐거움을 주는 비라는 존재 자체가 달갑지 않은 날들이 늘어난다. 얼마 전부터 매일 산책을 가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기 때문일테다. 비가 오면 오늘 산책을 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앞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러한 감정은 찰나의 순간에 스쳐갈 뿐 막상 산책을 나가지 못해 찌뿌둥함을 느끼면 ‘비’라는 녀석을 탓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그동안 빗소리를 좋아했던 까닭은 늘 부정의 생각을 하는 것을 즐겼다는 것이 원인일지도 모른다. 괜히 들려오는 그 일정하고도 일정하지 않은 빗방울들의 소리를 들으며 우울의 감정들을 키웠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 부정의 생각들을 즐기던 스스로를 미워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비가 오는 날이면 우울감과 감성의 농도가 짙어졌었다는 사실을 곱씹고 싶어 그렇다.
부정의 생각들이 판을 치고 온몸과 정신을 지배했던 그 시기는 일주일 내리 집 밖에 나가지 않은 적도 있을 정도로 인간관계에서도, 현실에서도 폐쇄적이었던 시기였다. 그런 생활을 거즘 1년정도를 하고 나니 몸은 몸대로 불어 있었고 정신은 붙들고 있음이 다행이었다. 그러나 다시 작년 부터 바깥 생활을 시작했고 부정의 생각보다 긍정의 생각들이 날아드는 날들이 많아졌다.
생각이 맑아지기 시작하자 육체도 맑고 건강해 지는 방향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그러니 예전같으면 꽤나 힘들어 했을 산책을 매일 해 보겠다고 매일 아침마다 다짐하는 중이겠지. 밥을 먹고 산책을 하는 것이 소원이라던 그녀의 손에 이끌려 나갔던 첫 산책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20분 거리를 걸어놓고 다리가 아프다며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던 그날이.
은은한 자괴감이 가득했던 첫번째 산책을 경험한 이후에는 오기가 생겼다. 나도 잘 걸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매일 같이 산책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고 싶었다. 이러한 마음으로 꾸준히 나가자 10분 에서 20분, 30분, 40분 점점 걷는 시간이 늘어났다. 이제는 한시간 정도는 거뜬할 정도가 되었다.
바쁜 일상으로 인해 나와 그녀는 둘다 산책을 멈추었던 날도 많았다. 나약해져만 가는 우리의 모습은 살아가는 것이 아닌 죽어가는 것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다짐은 참 잘하지만 자의적이지 못한 우리는 본가에서 다시 데리고온 강아지를 핑계삼아 매일 매일 산책 나가는 것에 의무감을 더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정말 매일 새벽 2시 3시에도 한시간 씩 산책을 하는 습관을 만들어 내는 중이다.
애초부터 비를 별로 좋아하지 않던 그녀에게 비는 더욱 반가운 존재일 수가 없다. 그나마 비가 오는 것을 보는 것을 좋아했던 나 조차도 비가 반가운 느낌이 그다지 들지 않을 정도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요즘 내일은 비가 오는지 안오는지 일기예보를 확인하느라 바쁘다. 다음날 비가 온다고 하면 비가 오기 전의 시간에 산책의 스케쥴을 잡아야 하니까.
얼마전 겨울의 끝과 봄의 시작을 알리는 비가 내렸다. 빗소리가 귓가에 들리자 스멀스멀 올라와야 할 우울과 부정의 감정들이 나타나질 않는다. 깊은 심연의 어딘가에 숨어버린 듯 너무나도 고요했다. 산책의 습관이 만들어낸 뜻하지 않은 고요한 빗소리가 들려 오는 거리를 헤치며 집에 도착해서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비가 오는 것을 반기지 않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찝찝하고, 젖어서’ 라는 대답을 했다면 이제는 ‘산책을 하지 못하니까.’ 라는 이유를 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