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수 있지만 용납하고 싶지 않아할 때가 많은 요즘. 말을 삼킨다.
"하고 싶은 말을 삼키다."
하고 싶은 말을 삼키는 것은 무엇을 위한 행동 일까? 섣불리 말을 할 수 있다는 걱정 때문에 삼킬 수도 있고, 굳이 말을 하지 않고 마찰 없이 지나가고 싶어서 일 수도 있다. 오랜만에 설을 맞아 부모님을 만난 나는 오늘 하루에도 몇번이고 화가 났다. 먹지 못하는 생 전복을 계속 해서 몸에 좋으니 먹으라며 권하는 끈기있는 엄마에게. 아직 밥을 먹지 않은 엄마가 '음식 더 필요한거 있어요?' 라고 했을 때 '없어' 라고 말하며 스스로의 식사를 끝마쳐 버리는 단호한 아빠의 배려심 없는 모습에. 계속해서 배부른 나의 상태를 무시하고 음식을 더 권하는 친절한 할머니에게 말이다. 내가 원하는 행동 방향과 반대대는 가족과의 시간으로 화가 났다 안났다를 반복한 오늘, 괜한 입씨름 하기 싫어서 나도 모르게 하고 싶었던 말들을 삼켰던 듯 싶다. 아마, 순간의 감정으로 튀어나오는 말들로 인해 오랜만의 본가 방문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였을 지도.
요즘들어 무척이나 말을 삼키는 일들이, 그런 날들이 많아졌다. 예전에는 말을 삼키는 횟수 보다 치열하게 말하고 상대와 의견을 나누는 것을 즐겼었는데... 20대의 후반에 접어들고 30대에 입문하기 시작 했을 무렵부터는 그와는 정 반대로 말을 아끼고 삼키게 되는 나의 모습을 인정하고 지켜볼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사람과 사람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화라고 늘 입버릇 처럼 말하고 다니던 나였는데 말이다. 어쩌면 조금 슬픈 이야기다. 나도 모르게 대화의 단절을 당연하다는 듯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편으로는 단절이 아니라 싸우고 싶지 않아서 하는 합리화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다. 사실 요즘의 나는 조금 지친듯 하다. 누군가를 설득하는게, 혹은 누군가와 삶의 자세나 행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대하여 말이다. 그렇다고 평생 누군가를 설득해야 하는 삶의 미션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래 '너'라는 사람은 혹은 '타인'은 '나'와 살아온 배경이 다르니 하나의 행동에 대한 관점도 의견도 다를 수 있다라고 생각해 버리는것 같다. 부딫히는 것보다는 마음이 2배 3배 아니 수십배는 편하니 말이다.
'그래, 그럴 수 있지' 라는 말은 내가 가장 입버릇 처럼 말하는 문장 중 하나이다. 이 문장 하나에 누군가의 행동에 대한 나의 판단을 인정과 포기 둘 중 하나의 의미로 아주 기묘하게 내리는 것을 느꼈다. 정말 그럴 수 있다의 동의를 내포하고 있는 '그럴 수 있지'와 타인이 살아온 방향에 있어 나는 이해할 수 없지만 너는 그렇다니 동의는 해줄게라는 의미의 '그럴 수 있지' 이렇게 말이다. 일전에 지인이 '그럴 수 있지' 라는 말을 버릇처럼 하는 내게 "정말 재수 없는 말투야, 너가 내 의견에 동의를 하는건지 아니면 그냥 귀찮아서 그럴 수도 있다고 넘겨버리는 건지 도통 모르겠어" 라고 이야기 했던 적이 있다. 솔직히 나는 그 지인에게 단 한번도 동의를 해서 그럴 수 있다고 이야기 한 적은 없다. 살아온 방향이 너무 달라서 생각하는 방향마저 너무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어서 일지도. '언제나 너의 생각은 존중 하지만, 나는 거기에 대해 동의 하지는 않아. 그러니 알아서 하도록 해' 라는 회피적인 성향이 조금더 강했을 뿐. 그러다 보니 점점 하고 싶은 말들을 앞과 뒤, 모두 잘라버리고 '그럴 수 있지' 라는 한 문장으로 애매한 그 상황을 정리해 버리곤 한다.
나의 나쁜 대화법 '그래, 그럴 수 있지'. 지우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그런 운동장의 분필가루로 만든 선처럼 인정과 포기의 그 애매한 경계를 넘나드는 문장. 말을 삼키는데 최적화 되어있는 문장. 앞으로도 애용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