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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담 Aug 21. 2023

장식과 범죄, 로스의 눈으로 본 아파트 공화국

15호_건축과 방학_프로잡담


오늘날 한국의 지배적인 주거 형태는 아파트로, 그 획일화된 형태와 구성으로 인하여 많은 이들에게 담뱃갑이라는 조롱을 면하지 못하는 신세다. 일반적으로 아파트는 양식이 없는 것, 그래서 그 안에 진실한 삶이란 없으며 오직 부동산으로서의 가치만이 남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아돌프 로스(Adolf Loos)의 관점에서 현대 아파트를 다시 본다면?


로스는 1909년 발표한 글 「건축」에서 건축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바 있다. “획일화되는 것을 꺼린다고? 그래, 그렇다면 그 옛날 건물들은 한 시대와 나라 안에서 획일적이 아니었던가? 그 획일성 덕분에 우리가 양식과 나라 별로, 민족과 도시별로 훑어볼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러면 집은 예술과 관계없고 건축은 예술의 반열에 들어가지 않는 것인가? 그렇다. 건축의 아주 작은 부분만이 예술에 속한다. 묘비와 추모관, 그 외의 모든 것, 어떤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것들은 예술의 왕국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로스의 시각에서 획일화는 곧 시대를 대변하는 양식 탄생의 징후이며, 집은 예술과 관계가 없어도 괜찮은 실용품에 속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을 아파트 공화국이라고 부르며 비난하는 자들을 가히 단박에 잠재울 만한 주장이다. 『장식과 범죄(Ornament und Verbrechen)』를 통해 로스의 눈으로 아파트를 비롯한 현대 한국의 주거를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로스는 그의 비평 전반에 걸쳐 장식은 사회의 발달과 함께 자연스럽게 도태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현대의 표현을 빌리자면 로스는 최초의 미니멀리스트인지도 모른다. 로스는 「가구의 추방」에서 옷장을 비롯해 집 안의 모든 움직이지 않는 가구들은 벽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치 그가 미래를 여행해서 붙박이장을 보고 돌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게 만드는 대목이다. 


한편, 로스의 이념은 단순히 입면의 무장식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후 라움플란(Raumplan, 로스의 건축사상에 의해 형성되어진 공간구조화 수법)이라는 개념으로 정립되는 복잡한 내부 공간 구성을 주장하며 공간을 2차원에서가 아닌 3차원의 볼륨에서 생각하고자 했고, 그 결과로 자유로운 공간을 생산해냈다. 이 역시 로스의 예언가적 면모를 뒷받침한다. 현대의 건축은 단순히 아파트에서 발전을 멈추지 않았다. 2010년대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땅콩 주택과 최근 1인 가구에게 인기가 많은 복층형 원룸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복층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나, 사실은 메자닌 또는 스킵 플로어의 형태를 띠는데, 이는 로스의 중요한 업적인 라움플란을 이어받은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렇듯 단순성과 보편성을 지향한 형태가 아닌 동적이고 개별적인 공간을 지향한 라움플란은 희미하게나마 21세기 한국에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 1인 가구의 빠른 성장과 함께 미니멀리즘은 가장 인기 있는 인테리어 문법으로 자리잡았다. 이제 사람들은 과거의 꽃무늬 벽지와 체리색 몰딩이 아닌 흰 벽과 흰 천장을 원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미니멀리즘 인테리어 광풍을 무장식을 주창한 로스의 영향으로 해석해도 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한 필자의 대답은 ‘아니오’다. 비록 로스가 여러 저작을 통해 미래를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드러낸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 1인 가구의 미니멀리즘 선호는 로스의 영향이라고 하기보다는 최후의 현실적 선택지로써 채택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현대의 낮은 주거 안정성은 사람들로부터 양식 있는 가구를 선택할 기회, 안목을 발휘할 기회를 앗아갔다. 2년마다 집을 옮겨야 하는 사람들은 지금 사는 집에 어울리는 가구를 선택하기보다는 어느 집에나 두루 어울릴 가구를 고른다. 로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장식의 변화는 생산품의 보다 빠른 가치 하락을 초래하므로, 사람들은 최선이 아닌 차선책으로 미니멀리즘을 선택한 것이다. 이는 안타까운 현상이지만 역설적으로 로스의 안목을 입증해 보인다. 장식적인 아르누보보다는 장식이 없는 일상용품과 건축의 생명력이 더 질기다는 로스의 주장이 이렇게 매 순간 증명되는 것이다.




이제 개별 건물이 아니라 건물들이 한데 모여 만드는 단지, 도시에 대해 살펴보자. 영국의 건축가이자 역사 비평가였던 앨런 코쿤(Allan Colquhoun)은 2002년 발표한 논문에서 아돌프 로스의 무장식이 개성의 은폐라면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그것은 이상적인 미의 표출이라고 분석했다. 그의 관점에서 보자면 로스의 건축 개념은 현대 도시의 표상이다. 로스는 「신사복」에서 의복에 대해 논하면서 가장 눈에 덜 띄는 자가 가장 현대적으로 입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원리는 21세기 아파트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데, 아파트는 그 거대한 단지 규모를 제외한다면 동질성에 의해 각각의 형태를 완벽에 가깝게 은폐시킨다. 이 덕에 개별 구성원들은 자유의 또 다른 이름인 익명성을 확보하게 되고, 이른바 프라이버시라고 불리는 이 자유 덕에 현대 사회는 과도한 인구 밀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유지될 수 있었다. 비록 1909년에 이르러 로스는 의복에서 적용되는 이 원칙이 건축에 완벽히 들어맞는 것은 아니라며 주장을 일부 철회했지만, 여전히 둘 사이에는 기묘한 일치가 있다는 의견을 고수했다. 더욱이 로스 하우스가 그 장식 없음으로 인해 ‘자극적인 옷을 입은 군중 사이 단순한 옷을 입은 남자’처럼 돋보이던 시대와는 달리 2021년의 서울은 장식 없는 건물이 이미 군집을 이루고 있으니, 무장식이 오히려 건물을 돋보이게 하는 역효과를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로스는 예술과 수공은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집은 예술이 아닌 수공이었고 따라서 집은 보수적이어야 하며 현재에 봉사하고 편리함을 추구해야 한다. 또한 아파트라면 무릇 눈에 띄지 않는 외피를 통해 개인에게 익명성을 부여하고 편리를 증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집의 편리함이 그것만으로 전부 설명될 수는 없다. 모든 집이 모든 개별성을 무시하고 오롯이 획일화만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편리함에 봉사하는 진정한 방법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로스는 외부와는 대조적으로, 내부에 관해서는 통일성보다 자율성을 더 중시했다. 앞서 언급된 라움플란은 그 예시 중 하나이다. 「어느 가난한 부자의 이야기」를 통해 로스는 건축가가 집의 모든 세부 사항을 결정해 거주자의 자율성이 억압되고, 방이 사람을 휘두르는 세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로스의 관점에서 양식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삶이었다. 또 그는 「로툰데의 인테리어」에서 자신이 유년 시절 살았던 집을 회고하며 이렇게 적었다. “확실히 그 안에는 어떤 양식이 없었다. (…) 그러나 한 가지 양식이 있었다. 그 거주인의 양식, 그 가족의 양식이” 오직 사랑하는 이가 선물한 그림이 벽에 걸릴 수 있어야만, 그 집에서 진정한 삶이 피어나고 가족의 내밀한 양식이 창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로스는 『장식과 범죄』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글로 많은 비난을 샀다. 세간의 오해와 달리 그는 모든 장식이 범죄이므로 지금 당장 불태워야 마땅하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 그는 1924년 「장식과 교육」에서 고전적 장식은 형태와 심미적 이해를 증진하므로 여기에는 관심뿐만 아니라 원주체계와 그 구성에 대한 학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단지 장식을 제거함으로써 얻는 효과, 노동시간의 단축과 임금 상승에 더 주목했을 뿐이다. 오직 야만인들만이 손이 닿는 모든 곳에 문신을 새긴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일상용품에서 장식이 차차 설 자리를 잃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는 장식이 도태되는 과정을 문명 발전의 자연스러운 순리라고 여겼다.



지금까지의 고찰을 종합해 보면 유럽 건축사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명으로 손꼽히는 아돌프 로스가 무려 100년도 전에, 마치 예견이라도 한 듯이 21세기 아파트를 옹호할 수 있는 근거들을 미리 마련해 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오늘날 아파트에는 왜 이토록 조롱에 가까운 비난이 쏟아지는 것일까?


그 바탕에는 단순히 아파트의 조형성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부자들의 전유물로 이상화되는 개인 주택에 대한 좌절된 선망과 집이 주거가 아닌 자산으로 전락한 현 세태에 대한 불만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아파트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로부터 건축의 예술적인 부분은 모조리 거세당하고 오로지 실용적인 요소만이 남은 괴물처럼 취급되고 있지만, 집을 실용품으로 여겼던 로스의 관점에서 아파트에게는 죄가 없다. 오히려 아파트는 예술적인 측면은 일찌감치 포기했기 때문에, 예술가와 수공업자의 경계를 흐리고자 노력한 아르누보와 일상용품과 예술의 통합을 시도한 독일 공작 연맹을 비판했던 로스의 눈에는 아파트만큼 훌륭한 대안이 없을지도 모른다. 아파트는 이제 21세기를 대표하는 새로운 양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대한민국의 오래된 별칭은 아돌프 로스에 의해 오명이라는 오해를 벗을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재료에 있어서만큼은 로스 또한 지금의 아파트를 비판하고 나설 것으로 보인다. 로스는 1898년 발표한 글 「피복의 원리」에 이렇게 썼다. “각각의 재료에는 고유한 형태 언어가 있다. 다른 재료의 형태를 자신을 위해 받아들일 수 있는 재료는 없다. 형태란 각 재료의 가용성과 생산방식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그 재료와 더불어 그 재료를 통하여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가장 인기 있는 인테리어 요소는 단연 원목과 대리석이다. 두 재료는 부의 상징처럼 여겨지며 실제로 값이 비싸다. 당연히 모든 사람이 원목과 대리석으로 집을 지을 수는 없었고 이내 플라스틱으로 이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샷시에서 비롯해 장판에 이르기까지, 플라스틱임이 분명한 자재들에 나무의 결을 새겨 넣었다. 심지어는 자연스러운 형태를 위해 목재에 최악의 요소로 꼽히는 옹이까지도 모조리 묘사했다. 모조대리석 역시 플라스틱을 비롯한 합성 수지를 이용해 특유의 패턴을 흉내 내 제작된다. 모두 로스가 지적했던 고유한 형태 언어를 받아들이지 못한 사례이다. 하나 다행인 것은 로스가 말하는 최악의 피복은 따로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주창한 피복의 법칙에 따르면, 피복이 입혀진 재료는 어떠한 경우라도 피복과 혼동될 여지를 남겨서는 안 된다. 목재는 나무색으로 칠해져서는 안 되고 석고는 조적의 형태를 흉내 내서는 안 된다. 천만다행으로 우리의 아파트는 로스의 관점에서 최악을 면한 셈이다. 하지만 최악을 면한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로스가 지적한 그 얕은 수작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늘날 건축은 재료를 속이지 않고 본연의 가치를 살리는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아돌프 로스. (2006). 장식과 범죄. 서울: 소오건축.


도판목록 

사진 The moral question in Adolf Loos


  


게재 : Vol.15 건축과 방학, 2021 여름

작성 : 프로잡담러 X | IJ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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