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잡담 Mar 21. 2024

우리의 공원에 숨겨진 이면

9호_건축과 피크닉_특별잡담

 #0 우리가 가는 피크닉, 공원


 봄이다. 코로나로 모두가 힘들어하지만 야속하게도 봄은 너무 따뜻하고 아름답다.  사회적 거리 두기의 기간에도 사람들이 한강 등으로 피크닉을 떠나는 것은 코로나를 겁내지 않는 안전불감증이라 볼 수 있지만, 피크닉이 우리의 현재 삶에 깊게 스며들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우리는 집 앞 벚꽃길이나 공원에 산책하러 나가기도 하고, 역사가 담겨있는 공원에  들르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우리의 공원은 단순히 녹지공간, 천혜의 자연을 인간이 사용하기 좋게 가꾼 정원 정도로 생각하거나, 혹은 선구적인 도시계획가가 근대 시민에게 준 선물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공원의 태동에는 무서운 힘이 숨겨져 있다.



#1 근대의 발명품 공원의 시민교육을 통한 이데올로기의 주입*1


 park(공원)라는 말은 군주와 귀족들이 수렵하기 위해 동물들은 가두어 놓았던 구획된 땅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시간이 흘러 왕가의 사냥터를 귀족에게 공개하여 그들의 사교장이 되기도 하였고, 점점 공원은 시민들에게까지 개방하여 도심 속 녹지를 제공하였다. 이런 변화를 통해 시민에게 개방된 공원은 모두에게 도심 속 자연공간을 제공해준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실은 당시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태동으로 인한 노환경의 악화, 노동자의 삶의 질 악화에 대한 미봉책으로써 도시에 녹지공간을 두어 아슬아슬한 폭발 직전 상태를 막아 그들의 지배체계를 유지했다. 부르주아계급은 착취당하던 노동자들에게 노동시간 감소, 휴일제공과 함께 공원문화를 장려하여 그들의 반발을 감소시키고, 생산성을 증가시켰다. 그리고 노력, 성실을 강조하는 윤리교육을 통하여 당시 사회문제를 노동 착취구조가 아닌 노동자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 그들의 지배계급을 유지하였다.*2 또, 지배계급은 공중 도덕/공중 위생에 기반한 관리 규정을 통해 공원을 운영했는데,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문화들(술집, 투견, 복싱 등)를 저급한 문화로 멋대로 규정하고 이를 제약하였다. 이러한 공원 운영방식을 통해 부르주아의 행동 양식을 시민들에게 일방적으로 주입했고, 이는 당시의 지배 이데올로기(근대, 부르주아) 지배계급의 입맛에 맞는 시민을 양성하는 효과를 가져왔다.*3


1 「근대적 발명품으로서의 공원」을 읽는것을 권장한다. 근대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 주입으로서 사용됨을 논증한다

2 부르주아들은 자본주의의 문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당시 사회문제를 노동자의 불성실함으로 돌렸다.

3  `보잘 것 없는 계급의 즐거움을 위한 야외 공간이 그들을 저열하고 천박한 쾌락을 벗어나게 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술집과 투견, 권투 시합에 대한 항의가 있었지만, 노동자들에게 다른 레크리에이션을 할 기회를 주지 않는 한, 그런 것을 추구하게 된다.’ 「The Select Committee on Public Walks」(1834), p. 507.


 그에 대한 예로, 센트럴파크는 19세기 중반 시민 모두가 평등하게 도시 속에 자연을 누려야 한다는 생각 으로 계층 간의 혼합, 춤/도박이 아닌 건전한 여가활동 촉진의 목적을 가지고 계획되었다. 당시 노동계층의 여가문화는 술을 많이 먹고 힘을 자랑하거나 시끄럽게 떠들고 열광적으로 노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그들의 문화를 저급한 문화로 취급하여 배제/배격 하는 방식으로 공원이 관리되었다.*1 

 이는 단순한 공원 이용 제제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문화를 이해하지 않고 철저히 부정한 것이며 중산층 문화(근대 시민성)를 노동계층에게 강제로 주입한 것이다. 공원 규칙 제제를 통한 중산층 문화를 주입하고자 하는 시도는 센트럴파크뿐 아니라, 당시 유럽 대도시에서도 성공적이었음을 당시 문헌을 통해 알 수 있다.*2


 또, 의도치 않게 공원이 계층 간 차이를 심화시킨 경우도 있다. 노동자는 근무시간, 금전적 이유로 공원을 이용하는 데 있어 시간/공간적 제약이 있는 반면에 부르주아는 그 제약들이 없었다. 특정 장소에서, 특정 시간에 공원을 이용하는 것이 특권계층임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이었으며 그것이 계층 간의 차이를 심화시켰다. 또한 모든 계층을 위한 공원 내에서  입장료를 지불해야 하는 음악회 등의 행사를 통해, 돈이 공원 내에서 공간 권력을 만들어내고 계층 차이를 심화시켰다. 


 이러한 공원 이용 규범과 행태는 공원을 찾는 이들을 문명화된 시민으로 훈련하는 역할을 했으며, 근대 사회의 시민들을 규제하고 계층 차를 유지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었다.*3  또한 공원을 찾는 이들은 공간의 주체인 동시에 객체가 되었고 서로가 서로를 보는 시선은 다시 규율을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권력이 되어 규율사회*4 의 장치가  되었다. 


1 「The Select Committee on Public Walks」(1834)

2 `정원을 만든다는 생각이 런던에서나 실현 가능하지, 주민들이 너무 격렬하고 혁명적이라 곧 나무를 쓰러뜨리고,

 꽃을 꺾고, 식물을 뿌리째 뽑아버릴 파리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하던 때가 있었다. (...)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상객들은 훌륭하게도 질서 정연하고 품위 있게 행동했다.’ Robinson. (1878). 『The Parks and Gardens of Paris Considered in Relation to the Wants of Other Cities and of Public and Private Gardens』.

3 Tony Bennett. (1995) 『The Birth of Museum: History, Theory, Politics』 (London: Routledge). 

4 푸코의 지적처럼 19세기에 새로 등장한 수용소와 감옥, 병원 등은 관찰-시선을 통해 주체로서의 인간을 객체로 바꾸는 장치가 되었고, 도시공원 에서의 교화도 이러한 성격을 띤다. Michel Foucault. (2004) 『감시와 처벌:감옥의 역사』(오생근 역). 서울: 나남. (원서출판 1975)


 여기서 우리는 `공원에서 타인에게 피해 주지 않고 이용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필자의 대답은 (도판 01)`현재 우리가 당연시하는 공공장소에서의 예절은 절대적인 규범이 아니라, 근대 지배계층에 의해 의도적으로 학습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다.


 이처럼 공원은 근대 계몽시대의 `발명품’이며 당시, 산업혁명으로 인한 폐해를 잠재움과 동시에 근대 시민상을 주입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데올로기 주입의 의도가 있든, 없든 간에 근대 공원은 `지배계급의 입맛에 맞게 당시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끼워 맞춰진’ 시민을 양성하는 데 큰 일조를 하였다. 그렇다면 공원이 대한민국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자.



#2 격동의 20세기를 겪은 한국의 공원사 - 식민과 탈식민 이데올로기의 흔적 읽기


 대한민국은 19세기 말부터 [근대화의 실패/식민 피지배/독립/동족상잔/독재/민주화]  등 매우 굴곡진 역사를 겪어왔다. 그리고 한국의 공원사에는 이 역사가 모두 담겨있다. 천천히 훑어보자.


1. 개화기 시대의 공원 - 도시 위생관리, 서양 근대 문화의 장점 제공 

 조선은 피크닉을 위한 공원이 따로 조성되어 있지 않았다. 대신 조선에는 산이 많기때문에 등산하며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 것이 피크닉과 같은 기능을 하였다.*1 서양의 근대 공원과 그  문화를 경험한 조선의 이러한 예시가 바로 독립협회가 만든 독립공원이다. 서양의 근대식 공원 문화를 경험한 조선의 지식인들은 조선에는 없는 서양식 근대공원을 통하여 합리적인 근대적 사고와 생활양식[정서 순화, 공중위생, 공중도덕, 계층 혼합]등 근대문화의 장점을 동포들에게 제공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예시가 바로 독립협회가 만든 독립공원이다. 공원에서의 자유로운 산책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독립협회 주최로 산업진흥, 신교육, 자유 민권 등을 주제로 한 토론회를 매주 주최함으로서 독립공원을 민중계몽의 장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즉 독립공원에는 개화기의 조선 지식인들의 동포를 위한 마음이 담겨있었으며 그 의지는 현재까지 남아있다.*2


2. 일제강점기의 식민통치에 사용된 공원계획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식민통치의 명분으로서 `야만(조선)을 문명(일본)으로 개화’를 내세웠다. 그 중, 공원계획은 토지 수탈, 조선왕조 격하, 국가 정체성 해체, 일본 문화의 주입을 하는 데 이용되었다.


1) 공원화를 통한 토지 수탈

 일본은 공원 조성을 그들의 침략성을 감추는 목적으로 이용하였다. 통감부 시대에 도벌과 채석 등의 방지를 내세워 남산의 토지 절반을 경성공원으로 설정하여 관리하였다. 그리고, 영국과 미국이 남산 토지의 사용권을 얻으려고 하는 것을 알게 되자 조선 정부에게 한일의 공동공원을 만들자 하여 무상으로 토지를 대여받아 한양공원을 만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공원을 구실로 한성부 일본인 거류지에 인접한 남산 토지를 수탈하여 거류지 밖으로 이권을 확장하였다.*3


2) 조선왕조 격하

 일본은 창경원/장충단/사직단 등 조선의 신성한 공간을 공원화 하였다. 아름다운 공원을 공공에 개방한 것이라 볼 수 있으나, 순조의 공간이었던 창경원에는 근대의 상징인 박물관, 미술관을 건축하였으며 효창원의 경우 골프장으로 사용하였다. 즉, 일본은 조선왕조 공간을 개방하여 왕권을 격하시키고자 하였으며, 공공성을 매개로 왕조해체의 폭력성을 은폐코자 했음을 알 수 있다.


1.`한국인들에게는 공원, 장식된 공공장소 혹은 레크리에이션 장소의 개념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경치가 좋아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산록을 거니는 것을 즐겨한다.' (Hulbert, 1896, 강신용,[한국근대 도시 공원사]

2.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은 미국인의 요구에 의해 만들어 졌으나, 3/1운동의 발생지로서 후에 조선인들의 독립의지가 담긴 상징적인 공간이 되기도 하였다. 공원의 태동과 상관없이 민족의 의지가 새겨진 특이한 사례이다.

3. 하시모토 세리. (2016).「한국 근대공원의 형성–공공성의 관점에서 본 식민과 탈식민의 맥락


3) 일본문화주입

 18세기 말부터 신사는 일본 거류민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세워졌으며, 일제강점기부터는 총독부 주관으로 조선 신사를 시작으로 전국에 지어졌다. [신사=공원]의 문화만을 주입한 것이 아니라, 일본인 전쟁사망자를 위한 기념비를 조선의 신사에 짓고 공원 내의 조경까지 일본의 식재를 심어 일본 내 공원을 `그대로’ 복제함으로써 공원 이용자에게 일본의 문화를 통째로 `주입’하고자 했다.*1 후에 1936년부터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강제로 제국주의식 문화를 주입했으며 천황 이데올로기/내선일체 사상과 결부 시켜 전쟁에 동원하는 정신교육에 공원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3. 해방 후 탈식민 이데올로기


 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식민의 역사를 극복하고, 전란의 피해를 복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대한민국이 미약한 민주주의국가에서 출발하여 독재를 거쳐 마침내 민주화를 거룩하였다.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 초기의 대통령과 군부독재정권은 자신의 통치기반을 확고히 하고자 탈식민 이데올로기 이용한 통치자로서의 우상화를 하였는데, 그 흔적은 공원계획에도 남아있다.


1) 이승만 전 대통령

 이승만은 공원계획을 이용하여 이조 황실의 신성성 획득과 자신의 우상화 작업을 꾀하였고 이를 통해 자신의 통치 정당성을 얻고자 하였다. 왕가재산 국유화와 유지보수를 표면상의 이유로 창경원을 폐쇄하지만, 그 속내는 창경원의 보수와 국고환수가 아닌 영구적 폐쇄를 통한 왕가 공간의 성역화였고*2, 이조 황실의 신성성을 자신의 우상화로 끌어와 통치자로서의 정당성을 획득하는 도구로써 사용하였다. 또한 용두산공원을 자신의 호인 `우남’공원이라 이름 짓고 3/1운동의 상징인 파고다 공원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고, 남산 정상에 우남정, 서울 시내에 우남회관을 건설하는 등 공원계획을 우상화의 도구로 사용하였다.*3

하지만 4/19 혁명 1주일 후 시위대는 이승만 퇴위를 요구하며 이승만 동상에 철삿줄들을 걸어 끌어내렸는데, 이는 국민들이 동상의 건설에 숨겨진 정치적 의도를 무의식적으로 느껴왔다고 추측 할 수 있다. 철거 7년 후에는 3/1운동 민족대표 의암 손병희 동상이 세워졌다.


 1. ’창경원의 밤벚꽃놀이가 시작되면 제일 먼저 모던걸과 모던보이가 이 곳으로 달려온다 ...(중략)... 창경원은 밤벚꽃놀이라는 새로운 도시문화 상품을 1920-30년대 식민지 조선 사람들에게 제공하였던 것이다.’ 신명직 (2003) [모던보이 경성을 거닐다] 현실문화연구.

2. 이승만은 “시민의 공원으로는 사직공원이나 장충단공원을 정비해서 쓰게 하고… 그리고 보수한 후에는 동물원과 식물원 그리고 덕수궁은 석조전만 구경하도록 하겠다”. 폐쇄의 목적은 창경원의 보수가 아닌, 왕가공간의 성역화였고 일왕의 궁궐처럼 평생 공개하지 않으려 했다. 당시의 국민들은 이에 크게 반발하였다.

3. 용두산공원과 남산공원에는 일본신사가 위치해 있었다.


2) 군부 독재정권


 당시 서울대공원 건설에 이은 창경궁 복구사업 등 조선왕조 유산의 복원은 단순한 유적의 복원이 아니라 일제에 의해 왜곡된 민족 정체성을 되살리기 위해 ‘정화’ 하는 탈식민의 작업이었으며 그 작업은 정권의 통치 정당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정치적 수단이었다. 조선왕조의 궁궐과 민족 이데올로기를 결합함으로써 식민권력이 망친 문화유산을 되살려내어 한국의 통치자로서의 정통성을 가지고자 하였다. 당시 정부가 시행했던 문화유산복원사업의 양에 비해, 당시 언론은 문화유산복구에 대해 많은 담론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보아, 필요치 이상으로 정권은 그 얘기를 꺼내 취사선택하여 정치적 도구로써 사용했다 추측할 수 있다.


 이처럼 해방 후부터 군부독재 시절까지 공원계획은 탈식민을 위한 탈식민이 아닌, 정치적 도구로서 ‘탈식민’이라는 껍데기(프레임)가 이용되어 공원은 정치적 도구로 사용되었다.


#3 탈식민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난 21세기의 한국, 새로운 문제점


 위의 글들을 통해 공원은 단순한 녹지공간이 아니라, 1. 시대적상황이 담겨있는 공간, 2. 지난 역사가 켜켜이 쌓여 새로운 의미를 계속 생성하는 공간임을 알 수 있었다.


 대한민국은 1967년 공원법 제정 이후로 전국단위의 공원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작은 규모의 공원에서부터  한강공원에 이르기까지 현재 많은 공원이 조성되었다. 또한 녹지공원의 조성뿐 아니라, 하수처리장(선유도공원), 석유탱크(문화비축기지) 군사 벙커(평화문화진지) 등 건축을 통해 낙후된 산업기반시설을 탈바꿈시킨 다채로운 공원까지 나타나며, 전국의 다양한 공원은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하고 있다. 필자는 조심스레 현재 대한민국 공원계획은 식민/탈식민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새 문제점을 제기하고자 한다.


 공원의 개발은 필연적으로 파괴를 전제할 뿐 아니라, 녹지화/위생화 등을 전제로 하는데 이는 과거의 공원이 가지고 있던 억압의 이데올로기(문명과 야만의 논리)가 똑같이 작동한다.

 과거에 일본에 의해 야만으로서 취급받던 대한민국이 이제는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 즉, 공원 정비가 진행될 경우 `공공선’을 가장한 `소수자에 대한 억압’이 존재할 수 있다. 이를 유념한 채로, 현재 대한민국에는 이런 상황이 없는지 살펴보자.


탑골공원 / 종묘광장공원 성역화 사업


 정부는 `독립운동의 성지’로서 탑골공원 성역화를 위해, `위생 정비, 노숙인 퇴거, 노인이 이용할 수 있는 공간 축소’ 등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탑골공원에는 일제강점기때 조선인들의 독립운동 의지가 적층된 공간일 뿐 아니라, 서울에서 소외되고 갈 곳 없는 노인들이 모여서 그들이 시간을 보내고 또한 그들의 음성적인 문화(박카스 할머니) 등 시대적 상황이 새겨진 곳이다.


 서울시는 2001~2002년 탑골공원 성역화 작업의 일환으로 공원 내 음주·가무와 장기, 바둑, 이야기 모임 등을 금지했다. 이에 노인들은 대거 종묘광장공원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2007년 종묘공원 성역화 작업이 시작되자, 노인들은 다시 탑골공원으로 돌아왔다.*1 2008~2016년 종묘광장공원 성역화 사업은 2002년 탑골공원 성역화 사업의 과오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종묘공원 성역화 사업을 진행하면서 문화재청과 종로구청은 공원 곳곳에 있던 큰 나무를 들어내고 묘목을 심었다. 이제 갓 사람 키를 넘긴 묘목은 그늘을 만들기에 턱없이 작았으며, 그마저도 묘목 주위로 잔디를 심어 사람의 진입을 막았다. 또한 잔디 사이로 두 사람이 겨우 걸어갈 만한 좁은 길을 냈고, 그 길 가운데 드문드문 세 사람이 앉을 만한 벤치들을 두었다.*2 즉, 환경정비를 가장한 노인 정주공간의 제거가 동반되고 있다. 


 그들의 비위생적, 음성적 문화는 개선되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환경 정비사업을 위해 소수자의 희생이 필요하다면, 그들을 진정으로 배려하는 행정조치가 동반되어야 한다. 성역화 사업은 일방적으로 조경을 통해 그들을 내칠 뿐, 종로구가 노인에게 제공한 정책이라고는 복지관 하나에 몰아넣는 수준에 그쳤다. 노인의 정주 공간을 없애고 단속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노인을 그대로 쫓아내는 것이다.


 1. 120년의 타임 슬립, 탑골공원. 중앙일보 https://news.joins.com/Digitalspecial/311

 2.노인을 위한 종로는 없다 : 사라진 종묘공원. 김도형 https://thepin.ch/knowledge/mwz2/jongno-5


 탑골공원과 종묘광장공원 성역화 사업이 같은 과오를 반복한 것은 국가 기관이 노인들을 배제하는 정책에 둔감한 것도 있지만, 종로구민 나아가 국민까지 이에 둔감하다 볼 수 있다. 우리는 탑골공원, 종묘광장공원을 지나가며 갈데없는 노인이 시시콜콜 대화를 나누고 장기를 두고 담배를 피우며 음주·가무를 하는 것을 분명히 불편한 눈초리로 보아 왔으며 배제의 시선을 쏘아댔을 것이다. 필자도 여기서 자유롭지 않다. 현재 소외된 노인의 문화가 과거의 독립운동 흔적보다 가치가 없다 단정하고 제거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상황은 글 앞의 상황과 겹치지 않는가? 근대 공원의 규칙을 통해 시민들을 교육하고,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게 되어 암묵적인 규칙을 강요하는 권력이 생겨 강요하게 된다. 우린 150년 전 센트럴파크에서 노동자를 쫓아내고 멋대로 그들의 문화를 부정한 과오를 또다시 반복하는 것이다. 갈 곳 없는 노인들이 모여서 생긴 문화, 나아가 음성적인 문화를 배제할 권리는 우리에게 없다. 환경정비가 필요한 부분은 있겠지만, 공원 이용자의 상황과 문화에 대한 세심하고 깊은 배려와 상생의 태도로 다가가서 그들을 보듬어야 한다. 서울시의 탑골/종묘광장 공원 성역화 정책에는 그러한 태도가 전혀 없다.


#4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위와 같은 시선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수가 소수를 배제할 권리가 없듯이, 소수자를 위해 다수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 없다. 본질적으로 이야기하고픈 것은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녹지가 어떠한 역사를 복개한 녹지인지, 혹여나 그 과정에서 중산층인 우리가 약자를 내쫓고 `억압과 배제를 통해’ 녹지를 `향유’하는 것은 아닌지를 반려하는 것. 또한 공원 등 공공공간이 정치적, 경제적 도구로서 은밀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첨예하게 바라보고 바로잡는 것. 마지막으로 그를 통해, 후손을 위하여 어떤 공공의 공간을 물려줄 수 있을지 깊게 고민해보자는 것이다.


윗글에서 밝혔듯 이승만은 조선신사 자리였던 남산에 우남정을, 3/1운동의 시발지인 파고다공원에 자신의 동상을 세워 우상화 작업들을 하였다. 만약 현재에 문재인 대통령이, 혹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재임 중에 독립공원과 서소문 성지역사박물관에 자신의 동상을 세웠다 상상해보자. 즉시 반발이 일어날 것이다. 이처럼 그때 당시에는 이런 정치적 상황에 대하여 무감하였고, 비판 없이 수용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우상화 정치작업이 공원계획에 쓰였다. 정치적 의도뿐 아니라  다른 문제도 언제든 있을 수 있다. 현재 서울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청계천의 복원에는 시장 상인들과 노점 등 기존 삶의 생태계를 내쫓은 역사가 있다. 이처럼 현재에도 이런 정치, 경제, 문화적 억압과 배제의 논리가 곳곳에 숨어있을 수 있다. 아니, 곳곳에 숨어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에 대해 늘 예민하고 민첩하게 반응하여 후대에게 물려줄 공원에 대하여 고민하여야 한다.


 이제 이 글을 읽은 우리는 버스를 타고 종로를 지나가며 탑골공원에서 소외된 노인의 모습과 100년 전 독립을 외치던 조선사람을 겹쳐볼 수 있고, 독립공원의 조경만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개화를 꿈꾸던 19세기 지식인을 떠올릴 수 있다. 한강을 거닐며 치맥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발전사를 곱씹을 수도 있고 혹은 조선 시대에 배가 가득했던 한강을 떠올릴 수 있다. 공원에 앉아서 우리는 어떤 공원을, 어떤 역사를 후대에 물려줄 것인지 공원에 앉아 친구들과 얘기 나눌 수도 있다. 아니, 해야만 한다. 필자와 함께한 대화를 시작으로!





참고문헌

하시모토 세리. (2016). 한국 근대공원의 형성 공공성의 관점에서 본 식민과 탈식민의 맥락.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과 박사학위논문

조경진 (2007). 공원문화의 현실과 지평 : 서구와 한국의 공원이용 변천과 비교를 중심으로. 환경논총 Vol.45, pp. 33-54

황주영. (2014). 근대적 발명품으로서의 도시공원 : 19세기 후반 런던과 파리를 중심으로. 환경대학원 협동과정 조경학과 박사학위논문

강신용. (2004). 『한국근대 도시 공원사]』

신명직. (2003). 『모던보이 경성을 거닐다』 현실문화연구,pp. 45-46

중앙일보. (2018).  120년의 타임 슬립, 탑골공원. (news.joins.com/Digitalspecial/311)

김도형. (2016). 노인을 위한 종로는 없다 : 사라진 종묘공원.  (thepin.ch/knowledge/mwz2/jongno-5)



게재 : Vol.10 건축과 피크닉, 2020년 봄

작성 : 프로잡담러 I | 홍익환

매거진의 이전글 한강 잡담회 : 취중진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