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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담 May 16. 2022

명동의 두 공간 : 근대에서 현재까지

9호_건축과 성냥_프로잡담

작성 : 프로잡담러 F

게재 : Vol.9 건축과 성냥, 2019년 가을

 

 [사진1] 명동 신세계 백화점 본점의 신관과 구관을 잇는 다리, 신동휘


 회현역에서 내려 서울역 반대 사거리로 가면 신세계 백화점 신관과 본관이 보이고, 그 너머로 현재 화폐박물관으로 이용되는 구 조선은행이 보인다. 동쪽으로는 명동거리가 있는데 이 주위를 빙글빙글 돌다 보면 길하나 두고 생기는 미묘한 온도 차이에 기분이 떨떠름하다. 회현사거리 쪽을 먼저 보면 남산타워를 가운데에 끼고 양쪽으로 깎아지르는 높이의 은행과 대기업 빌딩들이 줄지어서 길을 타고 내려와 시청까지 연결되고, 이 사이에 고전주의 양식의 신세계 백화점 본관과 신관, 화폐박물관이 끼어 있다. 


 반면에 백화점 맞은편의 높은 빌딩 한 겹을 지나면 벽돌과 콘크리트로 깨작깨작 지어 놓은 명동거리 상가들이 골목에 줄줄이 꿰어져 있다. 마치 물과 기름을 보는 듯, 두 곳은 입주해 있는 업종은 당연히 다르고, 두 건물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어쩌면 그들의 태도 또한 다름을 목격할 수 있다. 한여름에 롱패딩을 입은 사람을 보듯 멀뚱멀뚱 서로를 마주한 이 불편하고 어색하고, 한편으로는 긴장감 넘치는 이 길을 그냥 지나칠 순 없었다. 이렇게 서로 꼭 붙어 있음에도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종잇장 뒤집듯이 확 바뀌는 거리의 모습을 보자면, 누구나 이 공간이 말하지 못한 이야기가 궁금해질 것이 틀림없다. 무엇이 오늘의 명동을 만들었을까.



명동의 이탈


 오늘의 명동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명동의 과거부터 되짚어 보아야 한다. 명동은 구한말 이래로 서서히 서울로부터 떨어져 나오던 공간이었다. 서양 세력이 점차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넓혀가면서, 1898년 명동 언덕에는 명동성당이 들어섰다. 단층건물이 대부분인 주변의 건축적 맥락을 깨 내었고, 명동의 풍수에 대한 염려는 그다지 신경 쓸 거리가 되지 못했다. 이윽고 주변 산세가 곧 스카이라인이던 한양의 하늘에 첨탑이 삐죽 솟아오르면서 명동은 스스로 짜릿함을 느꼈을 것이다. 한편, 열도를 떠나온 일본인들이 이 곳 명동에 모여 살면서 명동은 한양의 새로운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이들은 명동성당이 그랬던 것처럼 서울 한복판에 3~4층 높이의 서양식 건축물을 지어 놓았고, 그 건물 모두 식민지 조선의 정치와 경제를 휘어 잡는 데에 이용되었다. 이렇게 중심지가 된 명동은 언제나 신문물의 통로로서 말 그대로 ‘빛나는 동네’가 되고자 했다.


 이러한 일제의 명동 진입은 1905년 남산의 통감부를 시작으로 조선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 식산은행, 민간자본인 미츠코시(三越) 백화점까지 지어지면서 명동은 조선의 색을 싹 지우고 일제의 경성으로 바뀌게 된다. 이런 건축을 이용한 위계 만들기에 의해 그 주변 서울의 건축적 맥락에서 벗어나 명동은 스스로 섬이 되었다. 이렇게 불과 몇십 년 동안 뚝딱 지어진 명동은, 조선 양반들이 몇백 년에 걸쳐 다듬어온 북촌의 분위기를 누르기에 충분했고 그들이 말하는 ‘조선의 문명화’가 어떤 것인지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건축으로서 보여주었다. 이렇게 물리적 형상을 가진 이데올로기적 공간으로서의 도시는 한마디로 당시 ‘제국주의의 트렌드’였다. 

시인이자 건축가였던 이상의 날개에서 나오는 한 대목이 이런 명동을 본 건축가로서의 혼란스러운 감상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미쓰코시 옥상에서 바라본 식민지 명동의 모습을 이상은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나는 어디로 어디로 들입다 쏘다녔는지 하나도 모른다. 다만 몇 시간 후에 내가 미쓰꼬시 옥상에 있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거의 대낮이었다....나는 또 오탁의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서는 피곤한 생활이 똑 금붕어 지느러미처럼 흐늑흐늑 허우적거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끈적끈적한 줄에 엉켜서 헤어나지들을 못한다.” 이 이후에도 명동은 미군정과 6.25전쟁 때에는 외국 문화가 들어오는 문화 중심지로서, 그리고 민주화를 거치면서는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민주화운동의 거점으로 그 성격을 차츰 바꿔나갔지만, 언제나 주변과 위계를 두는 ‘명동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사진2,3] 혼마치1정목(좌), 경성명소 명치좌(우), 서울역사아카이브



현재로의 연결


 일찍이 일제가 세워놓은 금융기관들의 자리를 이어받아 70년대까지 명동은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런 금융 중심지의 성격은 강남과 여의도가 개발되면서 어느 정도 빛이 바랬으나, 구분 짓는 버릇을 물려받은 듯이 대로변으로 뻗은 은행과 호텔의 고층 건물들은 그 뒤의 명동거리를 내려다보며 아직 건재하다. 신세계로 바뀐 미쓰코시 백화점 또한 옆에 다른 고층 건물처럼 신관을 두면서 이전의 권위를 되찾고자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몇 번 출구로 나가야 하는지 이리저리 길을 찾기 위해 지도를 보면, 이런 관계가 이따금 보인다. 지도를 보면 명동 금싸락 땅 위에 넓은 부지에다가 큼직큼직하게 지어놓은 것은, 확실히 땅을 나누고 또 나눠서 지은 뒤편 명동 거리와는 입장을 달리하는 권위이자 과시로 보였다.


 그렇다면 이들이 여전히 명동을 휘어잡는 ‘공간의 중심’인지 묻는다면 모두 고개를 끄덕이진 않는다. 내가 본 명동의 고층 건물들은 오히려 껍데기에 가깝다. 아마 이러한 판단은 변화한 서울의 모습, 그리고 우리의 생활상 변화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70년대 이후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명동의 패션 브랜드들은 차츰 강남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이어 80년대 경제발전으로 ‘마이카 시대’가 열리면서 좁은 골목들로 이어지고 주차공간이 부족했던 명동은 쇼핑과 문화, 그리고 주차까지 모두 해결할 수 있는 복합문화시설에 비해 그다지 매력적인 방문 장소로 인식되지 못한다. 그다음 90년대에는 외환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은행들 또한 문을 닫거나 여의도 등 다른 지역으로 자리를 옮겨가면서 최고의 금융 중심지였던 명동은 힘을 잃게 된다. 이에 나는 명동의 고층 건물들을 보면서 스스로 불린 몸의 크기에 못 이겨 시대의 물살에 올라타지 못한 낙오자를 보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그럼 2000년대 이후 명동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명동거리로 들어서면서 비로소 오늘의 명동을 볼 수 있었다. 사실 명동거리의 낮은 건물들은 건축법의 높이 제한 때문이지만, 그만큼 거리의 구성은 요란하고 충실하다. 단순한 마감과 커튼월 천지인 바깥세상과 다르게 골목마다 제각각 형형색색의 정면에 알록달록한 간판이 솟아있는데, 층고도 제각각이고 인테리어도 같은 분위기를 찾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다. 걷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이곳이 바로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명동이다. 실제로 명동을 구성하는 건물 용도를 따져보았을 때 사무실이 약 30%로 가장 많지만, 우리가 눈으로 보고 인지하는 공간은 그보다 적은 약 16%와 11%를 차지하는 요식업과 의류판매업이다. 이들은 사무실보다 접근성이 좋지 않은 곳에 있음에도 오늘날 명동의 이미지를 만드는 ‘공간의 중심’이 되었다. 결국 목 좋은 곳에 있어 목동의 1/3을 차지하는 사무실보다는 그 뒤에 있는 꼬질꼬질한 명동거리를 거니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명동을 음미하는 방식이다.


[사진4] 간판이 가득한 명동거리, 신동휘


이 두 가지 공간을 가로질러 걸으면 두 공간이 각각 나를 어떤 방식으로 대하는지 느낄 수 있다. 내가 어디를 걷느냐에 내가 ‘갑’인지 ‘을’인지 그 위치가 달라진다. 철근 콘크리트와 유리로 쌓아 올린 명동의 고층 건물들을 따라 걸을 때 어쩌면 그것들의 쌀쌀맞음에 감정이 상할지도 모른다. 그 건물들은 강남의 테헤란로처럼 건물 밖으로 흘려내는 정보가 그렇게 많지 않다. 또한 때때로 높은 건물들에 의해 내 행동이 감시받는 느낌 또한 느낄 수 있다. 명동성당 또한 마찬가지로 친근하거나 가벼운 느낌을 주지는 않는 통에 나는 무엇인가 불편함을 느낀다. 눈을 아무리 굴려도 내가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은행 이름, 건물 안의 스타벅스 간판 외에는 별로 없어서 명동을 돌아다니면서도 이게 어떤 건물인지 궁금해하지도 않고 휙휙 그냥 지나가게 된다. 반면에 명동거리를 걸을 때는 여기가 어떤 공간인지 설명하려는 모습이 길 곳곳에서 드러난다. 사진만 봐도 시끄러워지는 간판의 가득한 텍스트와 별사탕 같은 형형색색의 전단지, 거기에 더해지는 스피커의 노랫소리, 쇼윈도를 통해 보이는 최신 패션 등 거리에 할 말을 토해내듯이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것이 이 건물들의 방식이다. 여기를 걸을 때면 나는 어디에서나 환영받는 손님 이 되어 여기저기를 쏘다니게 된다. 제작년 외국인 관광객의 약 88%가 방문했다고 답한 명동, 그들이 기억하는 명동은 다름 아닌 이 복잡한 명동이다.


[사진5] 고층건물이 즐비한 퇴계로, 신동휘



새로운 반항


 이제 공간의 주인은 명동거리의 상가들이 되었고, 위계가 바뀌었다. 이런 명동을 보면서 ‘공간의 중심’을 형성하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본 것만 같았다. 이 명동거리의 모습은 한편으로 그동안 지배와 피지배의 위계를 만든 ‘기성 건물’에 대한 반항이다. 그동안 규모와 양식으로서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어 그 공간의 주인이자 중심이 되는 건물들이 있었다. 앞서 말한 일제의 명동이 그랬고, 여의도의 국회의사당, 잠실의 롯데타워 모두 그 공간의 랜드마크로서 위계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의 관심은 단순히 규모로 향하기보다는 공간에 속한 건물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와 관계에 집중한다. 그런 의미에서 명동의 고층 건물들은, 명동을 찾아 방문한 관광객과 같은 일부 사람들에게는 공간의 중심이 아닌 길을 막는 장애물처럼 여겨질 수 있다.


 이와 달리 수직적이기보다는 수평적인 명동거리의 모습은 밖과 다르게 서로 맞물려 거미줄처럼 촘촘히 얽혀있다. 거리를 걸으면서 이리저리 시선을 뺏김과 동시에, 공간 사이의 네트워크와 그 장소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북적임이 공간의 힘을 만들어냈다. 이는 다시 인터넷으로 퍼져서 더 많은 사람이 방문하는 공간으로 만들어지고 머릿속에 박혀 비로소 장소가 된다. 우리의 관심은 바로 이 장소에 있을 것이다.


 이런 명동거리의 모습은 곧 기존 공식에 대한 반항이자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생각한다. 이제 공간이 자신을 주변과 구분 짓는 방식은 규모와 양식에서 한정되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건물 사이의 강력한 네트워크, 그리고 우리의 뇌리에 박히는 그 공간에 대한 이미지가 오히려 더 강한 자극이 된다. 이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서 다시금 공간의 위계를 만들어내고 있는 명동의 앞으로가 기대된다.



참고문헌

김선아, 서울시 명동의 시간대별 활성화 지구 분석, (2010)

이향아, 식민지 도시계획, 제국 영국의 전 지구적 유산, (2009)

홍정욱, 명동 역사속 문화적 재구성, (2017)

보이는 명동, 보이지 않는 명동. (2011). http://www.hani.co.kr/arti/area/

area_general/501110.html.

한국여행 중 서울지역 방문지 . (2019). https://data.seoul.go.kr/dataList/

datasetView.do?infId=10945&srvType=S&serviceKind=2.





WRITTEN BY

프로잡담러 F | 신동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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