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잡담 Dec 05. 2022

하라던 설계는 안 하더니 - 잡담 동문 인터뷰 (3)完

19호_건축과 여행_잡담의 잡담

*'하라던 설계는 안 하더니 - 잡담 동문 인터뷰(2)' 에서 이어집니다.




5. 설계 꼭 해야 하나요?

T : 진로 얘기는 사실 이 주제를 위한 빌드업이었다. 내가 [잡담]에 합류하기 전에 건축 탈출, 소위 ‘탈건’을 다룬 글을 읽었는데, 특히 설계 과목에 치중된 교육과정에 문제를 제기하는 지점이 인상적이었다. 건축에서 아예 도망가진 않더라도, 굳이 설계 일만 할 필요는 없지 않나. 5년에 달하는 건축학 교육과정에서 설계 스튜디오의 비중이 높은 것에 대해 의견을 듣고 싶다.


H2 : 회사에서 깨지고 부서지며 깨달은 건, 내가 아무것도 모른 채 졸업했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 학교의 교수님들이 유학파가 많아서 그랬는지 몰라도, 설계 수업은 예술적 성향이 강하다. 현실의 설계에 당장 중요한 법률, 수치, 기준에 대한 지식은 알기 어렵다. 내가 할 일은 산업디자인인데 학교에선 순수 미술을 가르치는 기분이다. 설계 수업은 당연히 중요하게 다뤄야 하고, 비중을 줄일 필요는 없다. 다만 저학년 때 했던 프로젝트를 고학년 때 한 번 더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있다.


T : 발전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H2 : 맞다. 더불어, 지금 학생들이 학교에서 건축의 다양한 영역을 바로 느끼는 덴 한계가 있다. 교과의 다양성도 부족하고, 최신 경향의 반영도 느리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축의 변화와 움직임은 정작 유튜브에 있다.


T : 공감한다. 물론 설계 수업에서 잘 다뤄주시는 교수님도 있지만, 모든 걸 교수 개인의 역량에 의존할 순 없다.


A : 건축 교육과정이 설계에 치중되었다는 주장엔 공감한다. 많은 학생이 졸업하는 순간 설계에서 손을 떼고, 어차피 실무 준비를 시키는 건 회사의 몫이다. 다만 학교에선 같은 공간이라도 더 좋게 만들 수 있도록 고민하는 교육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한 공간 속에서도 건축가마다 할 수 있는 일이 다 다르다. 누구는 설계하고, 누구는 기획하고, 누구는 수치를 맞추고 누구는 운영한다. 우린 이 종합적인 영역을 탐구할 시간도 부족하다.


J : 건축 커리큘럼은 설계일을 할 사람에게 맞춰지는 게 맞다. 건축의 어느 진로를 걷더라도 필수적으로, 총체적으로 다루고 알아야 할 내용이 있다. 설계가 결국 건축의 가장 핵심적인 분야고, 여기서 더 나아가는 만큼 자신의 장기가 된다. 다만 각자 원하는 전공, 필요한 선택 과목을 들으며 다양한 길을 탐색할 수 있는데도 설계에만 매몰되는 현상은 분명히 문제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설계 과목을 빼면 다 곁가지 취급하는 풍토가 생기는 걸 경계해야 한다. 열려 있어야 발전의 기회가 생기고, 자신의 진로를 스스로 파악하고 매진할 기회가 더 많이 필요한 것엔 공감한다.


H1 : 결국 ‘건축학교육인증’에 맞춰야 하는 커리큘럼이다. 건축과 출신이 다른 일도 많이 할 수 있는 이유는 문제 상황을 통합적으로 사고하고 해결하는 능력 덕분이라고 생각하는데, 지금 설계 과목의 구성이 그런 능력을 길러주는 느낌은 아니다. 보통은 내 프로젝트라도 교수의 의견이 가해지면 그걸 그대로 따라가야 한다. 내 생각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그러니 세미나를 하더라도, 유명 건축가의 작품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의견을 나눌 시간이 주어지면 좋겠다. 같은 작품도 분명히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자신이 뭘 좋아하고 아닌지 파악하는 게 중요한데, 지금은 그러기 쉽지 않다. 학생 때 자신의 취향, 기준, 능력을 기를 기회를 주면 좋겠다.


T : 지금 졸업 전시회를 준비하는 I의 의견은 어떤가.

I : 나는 설계가 싫지 않다. 오히려 좋아한다면 좋아하는 사람이다. 설계도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진 몰라도.


T : 짝사랑인가.

I : 그런 것 같다. 그래도 건축학과에선 설계 위주로 돌아가는 게 맞는다고 생각한다. 여지를 열어두는 것도 당연히 필요하다. 그래서 요즘은 학생들을 걱정하는 교수님도 있다. ‘탈건’ 하려는 학생들에게 자신이 뭘 해줄 수 있는지 고민하시기도 한다.

A : 세상에.


I : 19년도에 졸업한 선배가 쓴, 자신이 더는 ‘건축’하지 않게 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내가 배운 게 설계가 아니라 건축에 필요한 사고 과정이었다고 이해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S : 다 필요 없고, 밤은 새지 말라. 나중에 한꺼번에 다 처맞는다. 지금도 주변에서 한 명씩 간다. 차라리 못하고 욕을 좀 먹고 말지, 교수님들은 당신의 건강을 책임지지 않는다. 가뜩이나 시간도 빡빡한데 학점도 교수님 재량에 너무 크게 좌우된다. 학생이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건 적고, 6학점짜리 설계에 뜻이 없는 사람일수록 고통받는다. 차라리 고학년일수록 다른 방향, 시야를 넓힐 기회를 줬으면 좋겠다.




6. 계속 [잡담]이나 해도 괜찮을까요?

T : [잡담]의 본체가 ‘하라는 설계는 안 하고’라 하셨으니,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하라는 설계는 안 하고, [잡담]이나 해도 괜찮을까?


H1 : 하라는 대로만 설계하면 재밌는 게 나오기 어렵다. 어차피 기존의 내러티브를 답습하게 되고, 시키는 것만 하게 된다. 차라리 옆길로 새기도 하면서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도 좋지 않나. 쉽게 생각하면, 하기 싫으니까 그냥 다른 것 좀 해도 괜찮다.


T : 그럼 지금의 [잡담]이 계속되려면 어떤 것이 필요할까.

J : 사람이 모이면 같은 목표를 공유하는 게 중요하다. 뭔가를 만들어내고 싶은 열망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고, 그렇게 만들어진 걸 보고 또 사람이 모여서 이어진다. 그게 순환하는 동기 부여가 된다.


Z : 친목이 중요한 것 같다. 소수의 사람이 대가 없이 하는 일의 장점이자 단점이지만, 그만큼 생기는 유대감과 친밀감이 크다.


H2 : 팀장급 ‘잡담러’의 능력이 중요하다. 에너지, 추진력이 없으면 유지할 수 없다. 개인적으로는 코로나 사태 이후 온라인 활동이 당연해진 게 아쉽다. 함께 모여서 뭔가 하는 분위기가 잘 생기지 않는다.


T : 코로나 사태를 거치며 분명히 [잡담]이 많이 변했다. 외부와 소통할 기회를 많이 잃으며 [잡담]이 고립되었다고 느낄 정도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매 호 작업이 고비고 난관이다.

Z : 외람되지만, 그렇게 힘들게 버티고 있다면 굳이 계속하는 이유가 있는가?


T : 현실적으로, 물질적으로 안 하면 되는 일이긴 하다. 법적인 계약을 맺지도 않았고, 그냥 다 포기하고 뛰쳐나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기어코 [잡담]을 만들고 있는 사람들은 결국 각자의 마음에 나름의 이유를 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미련일 수도 있지만, 그걸 깨달은 이상 포기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Z : 맞는 말인 것 같다.


J : [잡담]은 계속 새롭게 거듭나면서 유지되었다. 그래서 우리(창립 멤버) 같은 OB가 오래 있으면 별로다.


A : 어차피 모든 사람이 영원히 할 수는 없다. 또 각자 만들고 싶은 책이 있기 마련이다. 권한도, 역할도 고정되면 안 되고 계속 움직여야 한다. 내가 할 땐 아무것도 없이 마음대로 했지만, J가 편집장일 땐 글의 질이 높아졌다. 다음 편집장은 더 진중한 주제를 다뤘고, 그다음엔 [잡담]의 디자인이 완전히 달라졌다. 사람이 바뀌면 [잡담]도 변하는데, 점차 장점은 쌓이면서 발전한다. 당장 ISBN만 하더라도 우리가 해결하지 못했던 현실적인 숙제였지만, 우리 다음의 누군가 맡아서 해결했다. 매 호 맡은 사람은 힘들겠지만, 그렇게 반복되며 개선될 테니 굳이 너무 길게 할 필요는 없겠더라.


T : 무형의 유산만 잘 전달된다면, 새로운 사람들이 곧 새로운 개성으로 [잡담]을 키울 것이라는 뜻인가.

A : 그래서 시니어의 역할이 중요하다. 글 작성과 잡지 발간의 프로세스를 경험해봐야 더 멀리 볼 수 있다. 거인의 어깨 위에서 봐야 한다.

 


7. 마치며.

앞서 걸은 사람의 발자취는 따라 걷는 사람들에게 이정표가 되고, 그렇게 같은 방향으로 지나간 발자국이 모이면 길이 됩니다. 이 길에 갓 오른 사람으로서 앞서 지난 사람들, 처음 걸은 사람들을 만나볼 수 있었던 건 여러모로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때로는 길이 중요한지, 도착지가 중요한지 헷갈리기에 우린 앞을 보고 걷다가도 길을 종종 잃습니다. 각자의 여행에서 정말 소중한 게 무엇인지 남이 알려줄 수는 없지만, 그들의 여행기를 읽다 보니 적어도 다음 한 발을 내딛는 게 더는 무섭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하라던 설계는 안 하더니 - 잡담 동문 인터뷰 (3)完

[잡담] 2022 여름/가을 특별호 "건축과 여행" 수록

WRITTEN BY

프로잡담러 T | 김준우 | agk12345@naver.com  

매거진의 이전글 하라던 설계는 안 하더니 - 잡담 동문 인터뷰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