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잡담 May 20. 2023

Romantically Apocalyptic

구하라는 공주님은 안 구하고

작성 : 프로잡담러 I

게재 : Vol.15 건축과 방학, 2021년 여름 일상잡담

 


  인류 멸망 시나리오는 언제나 인기 있다. 역사 시대가 무로 돌아갈 계기는 수도 없이 많다. 자연재해로, 인류가 초래한 재난으로, 때로는 좀비 사태 발발로 인류가 멸망하는 이야기는 잊힐 만하면 개봉일로부터 5년쯤 후를 제목으로 달고 극장가에 걸린다. 비종교인에게도 꽤 알려진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날’의 경고와 계시는 수많은 창작물에서 메타포로 인용되어 왔다.


 질병, 전쟁, 재난, 문명의 반작용 등 세계관 단위의―인간이 대처할 수 없는― 극한 상황을 ‘아포칼립스’, 그리고 그 재앙이 휩쓸고 지나간 후의 시점/세계를 ‘포스트 아포칼립스’라고 칭한다. 이 명칭은 성경 마지막 권인 요한계시록의 영어명(Apocalypse)에서 유래한 것으로 주로 그 안에 나타난 종말의 이미지를 지칭한다. 거대한 재앙을 맞이했을 때 인간들이 극적으로 문명을 지켜내었을 수도 있겠지만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탐닉하는 절대다수의 창작물은 이전 세계의 폐허 위에서 시작한다. 이 장르의 주요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폐허, 부서진 것, 극한의 환경, 고요, 위협, 투쟁, 생존, 자연에의 경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걸 미학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갈한 것에서 안정감을 얻는 동시에 그것을 어지르고 파괴하는 행위와 그 결과물에서 전위적인 아름다움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폐허, 파괴된 것, 버려진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건 나뿐만이 아니다. 그 기능만 남은 것이 아름답지 않을 리가 없지 않나.


 누군가는 이리저리 패인 흔적이 남은 콘크리트 벽 위로 햇빛 한 줄기가 빗기어 드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벅차오르겠지만 누군가는 대체 그걸 왜 좋아하는지 이해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해한다. 창작자들이 가끔 예술이랍시고 멀쩡한 물체를 깨부숴 놓고 이름을 붙이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주면 고맙겠다. 다만 이것도 꽤 보편적인 미학이라는 주장을 「폐허와 소생의 환시(幻視)」1를 근거로 해 보고 싶다.


1) 김현섭, 「폐허와 소생의 환시(幻視) (2012) - 후지모리 테루노부의 졸업설계를 바탕으로 후지모리 건축의 기저에 흐르는 사상적 배경을 살피는 논문.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폐허 이후의 건축에 대한 상상이 주 논점이다.


 젤다의 전설은 1986년 시작된 액션 어드벤처 게임 시리즈로 현재 닌텐도의 간판 IP 중 하나이다. 서브컬처를 접하는 사람이라면 “녹색 옷이 젤다죠?”라는 밈으로 꽤 익숙할 것이다. 오랫동안 이어진 시리즈인 만큼 수많은 게임이 만들어졌고, 그들의 배경이 되는 세계관 또한 상당한 연속성과 디테일을 갖추고 있다.


 이 글에서 이야기할 것은 그중 2017년 발매된 <젤다의 전설: 야생의 숨결>이다. 이 게임의 시점은 대재앙으로 대륙에 번영하던 문명 대다수가 쓸려나가고 100년이 지나 겨우 소생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는 시기다. 한 마디로 포스트 아포칼립스다. 눈에 보이는 거의 모든 장소에 실제로 가볼 수 있는 오픈 월드 게임이므로 멸망 이후의 세계를 만끽하기에 최적화되어 있다. 사실 게임의 목적은 100년간 홀로 사투를 벌이고 있는 공주님을 도와 재앙을 물리치는 것이지만, 그 누구도 최종 결전으로 직행하지 않는다. 이 게임의 본론은 산을 타고 하늘을 날며 이전 세계의 폐허를 유유자적 관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미학에 대해서만 떠들고 싶은 것은 아니다. 나는 이 게임이 도시계획과 건축적 요소를 서사에 제대로 녹여낸 아주 좋은 사례라고 생각한다. 건축으로는 아주 많은 것을 할 수 있고, 그중에는 스토리텔링도 있다. 좋은 ‘건축적 스토리텔링’이 무엇인지 건축학도를 벅차오르게 한 요소들을 늘어놓고 낱낱이 살펴보자. 근데 이제 폐허의 미학을 곁들여서. 



1. 세계관 차원

 게임의 배경인 ‘하이랄’의 전체적인 형태와 구성은 왼쪽 지도와 같다. 5개 종족으로 구성된 ‘사람들’은 종족 위주로 뭉쳐서 각 지역을 정주지로 삼고 있고 그중 하일리아인(해당 세계관의 인간)이 중심지를 차지하고 있다. 방위를 기준으로 기후가 변하지는 않지만―극지방은 북쪽, 열대지방은 남쪽에 위치하고 있기는 하다― 지역 간 기후 차이가 꽤 크다. 그리고 지역별 건축물들은 이 기후에 영향을 받는다. 주택과 구조물들의 디자인은 기후 특성과 건축물의 형태를 자연스럽게 연결 지을 수 있을 정도로 당위성이 상당하다. 구체적으로 어떤 ‘건축 양식’이 나타나는지는 다음 장에서 살펴보자.  



 100년 전의 ‘대재앙’은 하이랄 도성에서 시작되어 위 그림의 루트로 진행되었다. 이 게임의 폐허의 미학의 진가는 바로 여기에서 드러난다. 본래 대륙 중심부에 위치하며 정치/군사적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을 도성과 근방의 시내는 가장 큰 피해를 당해 터만 남기고 깡그리 날아가 버렸다. 현시점의 지도를 보면 가장 번영할 법한 지역이 통째로 ‘하이랄 평원’이 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00년 후의 세계에서 ―지형적 특징으로 인해 적의 접근이 어느 정도 차단되었던 타 종족들의 정주지를 제외하고― 가장 번영하고 있는 것은 땅끝마을인 ‘하테노 마을’이다. 왕성이 기능하던 시절에는 대륙의 끝자락에 위치한 시골 마을이었으나 오히려 그 덕에 재앙의 피해가 덜 미친 것이다. 위치상의 요인도 있었지만 지형적 특징에서 이득을 보기도 했다. 왕성에서 마을로 향하는 최단경로는 커다란 ‘쌍둥이 산’ 사이를 통과하는 좁은 길이다. 그 때문에 병목 현상이 일어나 적의 진군이 늦춰졌고, 백병전을 피할 수 있었기에 효과적인 대항이 가능했다.   



 ‘시작의 대지’는 게임을 시작하면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지역이다. 지금은 사람 한 명 없이 풀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만 들리는 조용한 땅이다. 하지만 지도를 조금만 살펴보면 무언가 석연찮은 점이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대륙의 중심지도 아니고 마을이 있었던 것도,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을 법한 곳도 아닌데 이 땅만 지면에서 한참 위로 들어 올려진 데다 매우 두꺼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심지어는 이 대지의 주위에만 군사 기지가 두 개나 배치되어 있다.


 그 이유는 시리즈를 어느 정도 아는 플레이어라면 유추해볼 수 있는데, 고원의 남쪽에 위치한 ‘시간의 신전’이 성지의 입구이므로 이곳을 최우선으로 방어하려 했으리라는 추측이 가장 신빙성 있다. 높은 지형이기 때문에 비교적 재앙의 영향을 적게 받았음에도 시간의 신전 주변에만 잔뜩 몰려 있는 적 기체의 잔해들이 추측의 설득력을 높인다.



2. 도시 차원

 하일리아인은 과거 왕성 근방의 시내에 밀집하였으나 왕가의 멸망 후 대륙 전역에 퍼져 있다. 타 종족의 마을에 거하기도 하고, 마구간들을 거점 삼아 유랑하기도 한다. 현시점 유의미한 하일리아인의 정주지는 하테노 마을, 카카리코 마을, 나크시 마을, 시자기 마을, 그리고 마구간 정도로 꼽아볼 수 있다. 실질적으로 이전 세계에서 살아남은 유이한 마을인 하테노와 나크시는 모두 대륙의 끝자락에 위치한 땅끝마을이다.


 하이랄 왕성과 시내는 대부분 석조 건축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외 지역의 주택과 건축물은 대부분 목재로 만들어졌다. 평이한 기후인 하테노 마을의 주택은 일반적인 목조 주택의 모습을 하고 있고, 열대 기후인 나크시 마을의 주택들은 습기를 피하기 위해 나무 데크로 지면과 분리되어 있다.    


<사진> 위부터 차례대로 시자기 마을, 마구간, 나크시 마을 주택, 모델하우스.



 하테노 마을 구석 공터에는 ‘볼슨 건설’에서 고안한 모델하우스가 설치되어 있다. 큐브 형태의 방이 이어져 집을 형성하는 구조인데, 집의 규모에 따라 다양한 시도가 가능한 데다 조그맣게나마 테라스도 만들 수 있다. 간결한 모양의 주거 유닛 형태임을 보아 척박한 땅 어디에서든 쉽게 적용할 수 있도록 고안한 것이 아닌가 싶다.


 마구간은 대륙의 전역에 퍼져 있으며 전부 도로를 면하여 골고루 배치되어 있다. 설정상 가호를 받은 안전지대이기 때문에 흉흉한 세상에서 여행자들의 여관 역할을 겸하고 있다. 목재 골조의 여기저기를 덮고 있는 천막과 패턴이 들어간 천 조각들은 북부의 유목 민족을 연상시킨다.  



a. 물고기를 모티브로 한 조라족 건축의 특징은 보석처럼 섬세하게 세공된 석조 건축물들이다. 여기엔 물에 가까이 사는 종족이므로 수원지에 정착했는데, 그곳이 석재와 광물이 풍부한 곳이어서 건축 기술 또한 그에 맞추어 특화하게 되었다는 당위성이 부여되어 있다. 푸른빛의 석재와 야광석이 함께 사용되어 마을 전체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다. 덕분에 마을 전체가 하나의 조각품처럼 보일 정도로 경관이 수려하여 관광지로서 인기 있고, 조라족 사람들 또한 자신들의 건축 미학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b. 겔드의 마을은 사막 한가운데의 관광도시다. 가판대, 술집, 밤에도 잠들지 않는 불야성의 도시는 우리가 <알라딘>, <아라비안나이트> 등에서 상상해 왔던 장면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세계 전역에서 찾아드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상업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며 마을의 구획 또한 상점들을 중심으로 되어 있다. 재앙의 상흔이 옅게나마 남아 있는 외부 세상에 비해 이곳만큼은 100년 전에도, 오늘도, 내일도 들떠 있을 것만 같은 분위기다.


 건축물들은 전부 흙과 모래로 지어졌다.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는 커다란 수원이 있고 거기에서 나온 수로가 마을의 모든 지붕 위를 휘돌아 흐른다. 혹서와 혹한을 오가는 사막의 기후와 달리 마을 내부에서는 일정한 온도가 유지되고 있는데, 그를 위한 장치가 아닌가 추측해 본다.  



c. 새를 모티브로 한 리토족은 높은 절벽 위에 자리를 잡았다. 상당한 간격을 두고 모여 있는 절벽 몇 개를 활용하여 필요한 시설과 주택을 세우고 그 사이를 목제 다리로 이었다. 마치 횃대와 같은 모습이다. 절벽 아래의 입구에서부터 마을 꼭대기에 이르기까지는 두세 번을 돌아 올라가게 되어 있다. 아래층에는 잡화점과 여관 등의 시설이, 위층에는 주택들과 촌장의 집이 배치되었다.


 모든 건축물은 목제이며 벽체가 거의 없이 기둥과 지붕만으로 이뤄져 있어 저 멀리 헤브라 극지방이 바로 내다보인다. 타 종족의 주거지에 비해 폐쇄성은 덜하나 기둥 사이와 바닥에 태피스트리가 적극 활용되어 아늑함이 부족하지는 않다. 태피스트리와 이곳저곳에 장식된 천에는 ‘에스닉(ethnic)한’ 패턴이 사용되었다. 마구간과 마찬가지로 북부의 민족복을 연상시키는 모습이다.


 이곳에 신혼여행을 온 사람(NPC)은 화려한 관광 도시인 겔드나 건축물이 화려한 조라에 비해 리토의 마을은 관광지로서의 가치가 덜하다고 말한다. 실제로 고지대에 위치해 주변이 허허벌판이고 떠들썩한 일이 일어날 법하지도 않아 마을은 항상 고요하다. 하지만 필자는 그 건조하고 정갈한 느낌을 가장 좋아한다.  



d. 돌을 주식으로 하는 고론족은 자연히 자연히 광산 개발 및 채굴이 용이한 산 중턱에 자리를 잡았다. 이 산은 하이랄 전역에서 가장 높고 거대한 활화산인 ‘데스마운틴’이다. 어디에나 용암이 흐르고 있기에 목재는 절대 사용할 수 없다. 주택을 비롯한 건축물들은 돌로 지어졌고, 흔들다리 등 타지역에서는 목재가 사용될 만한 자리는 전부 철이 대체하고 있다. 식사와 채굴 외 활동에 크게 개의치 않는 게 종족 전체의 성향인 듯 마을의 구성이 단출하고 광장 혹은 공터가 종족별 마을 중 유일하게 없다.  



 이 게임의 설정이 오픈 월드 게임인 만큼 특별히 구체적이긴 하지만 웬만큼 세계관이 구축된 게임이라면 종족별 정주지의 위치, 건축물의 형태 등에 어느 정도의 건축적 당위성은 부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게임 개발 과정에서 건축은 세계관 단위에 적용되기도 하고, 집 내부에서 쓰이기도 한다. <동물의 숲> 주민들의 집 인테리어와 박물관 디자인은 아무렇게나 나온 것이 아니다.


 건축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많다. 특징지어 게임 개발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웹툰, 소설 등 여러 창작물에서 건축은 얼마든지 스토리텔링에 활용될 수 있다. 매체의 종류를 떠나 건축에 대한 이해를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아는 것은 창작자로서의 강점이 된다. 그 능력은 많은 창작물을 접하고 또 ―우리가 길거리의 모든 것을 주시하듯― 관찰하는 것을 통해 기를 수 있다. 그리고 이 게임은 아주 훌륭한 사례가 되어 줄 것이다.


 바깥을 혼자 돌아다니기에 이 여름은 너무 위험하니 집 안에서 얌전히 하이랄로 떠나보는 게 어떤가. 마침 2022년에 후속작이 예고되어 있으므로, 여건이 된다면 망한 세계의 대체 어떤 부분이 로맨틱하다는 건지를 직접 알아보는 걸 적극 추천한다.



참고문헌

Nintendo. (2018). The Legend of Zelda: Breath of the Wild - Creating a Champion. Dark Horse Comics.


도판목록

사진제공 | 프로잡담러 I 직접 촬영, 하이랄.

사진출처 | [1] 스퀘어에닉스 <니어: 오토마타> 공식 홈페이지 Imageboard 

사진출처 | [3] 가이드북 스캔본 - 티스토리 블로그 

사진출처 | [8] 닌텐도 제공 공식 이미지(마구간)


  

  


WRITTEN BY

프로잡담러 I | 김정인

매거진의 이전글 여름의 발소리는 바로 코앞까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