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잡담 Jul 18. 2023

건축 영화를 통한 영감 쌓기

building ARCHI INSPIRATION Films

마감 기간 내내 바라고 또 바랐던 방학이다. 이맘때쯤이면 종강만 하면 뭐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되고, 그 책임은 한여름의 가운데를 지나는 내가 지곤 한다. 그러면 또 어떤가, 설계가 끝났는데! 그런데 이번 여름은 초입부터 더위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이미 이글거리는 열기가 눈에 보이는 것 같은데 다음 주부터가 진짜 최악의 폭염이란다. 믿고 싶지 않다.


걱정되리 만치 여름 달력을 빼곡히 메우고 있던 수많은 약속들은 COVID-19 방역 상황 악화로 전부 날렸고, 이번 방학에야말로 기필코 공부해 가리라 다짐했던 렌더링 프로그램은 이 날씨에 돌리고 싶을 리 만무하다. 마룻바닥에 눌어붙어 조금이라도 냉기를 붙잡아 보려 몸부림치다 고개를 들어 보니 벌써 오후 두시 반.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겠다고 가까스로 생각하나 해가 기울려면 6시간은 족히 남았다.


만일 당신에게 몸을 일으킬 힘이 남아 있다면 택할 수 있는 좋은 타협점이 있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가장 친한 전자기기와 충전기, 지갑, 기호에 따라 손에 쥐고 있으면 즐거운 것―일기장, 만년필 등―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리고 용감하게 문을 나서 더위를 먹기 전에 다다를 수 있는 거리의 카페까지만 움직여 보자. 무사히 입성했다면 얼음이 기분 좋게 잘그락거리는 유리잔을 들고 자리를 탐색한다. 충전기가 바로 옆에 붙어있고 등받이가 적절히 기울어진 푹신한 의자 한두 개가 놓인 구석의 자리라면 적당하다.


물론 집에서도 카페 부럽지 않은 냉방을 즐길 수 있는 경우라면 이렇게 힘들여 기어 나올 필요가 없겠지만, 대다수의 우리는 누진세가 두려울 것이므로 별수 없다. 적어도 나는 얌전히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백색소음을 곁들인 남의 집 에어컨을 택하겠다.


인풋이 있어야 아웃풋이 있다. 우리는 지난 6월 말에 철저하게 쥐어 짜내졌으므로 다시 그만큼의 재료를 채워 넣을 필요가 있다. 이럴 때 타인의 세계관의 액기스인 건축 영화는 훌륭한 양식이 된다. 건축에 대한 깊은 생각에 더해 아름다운 미장센을 통해 미감까지 충족시킬 수 있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앉은 자리에서 커피와 함께 즐기기에 좋은 ‘건축 영화’ 몇 편을 소개하겠다. 아마 ―우리가 넷플릭스에서 흔히 그러하듯― 포스터와 줄거리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워질 것이다.



1. 건축가의 삶을 다룬 영화

첫 번째 섹션은 소위 거장이라 불리는 건축가 개인에 대한 영화들이다. 삶 전반을 연대기식으로 다룬 작품도 있고, 그들의 건축 세계의 기원을 찾아가는 작품도 있다. 유사한 고민을 거쳐 왔을 이들의 답변과 기어코 앞서 나아간 발자취를 살펴보는 것은 언제나 위로가 된다.



≪이타미 준의 바다≫ (2019 | 정다운 감독)

자연과 시간의 결이 깃든 건축을 선물했던 재일 한국인 건축가 이타미 준-유동룡. 경계에서 길을 만든 그의 삶, 그곳에 머무는 사람들의 시간과 삶의 터전을 존중한 건축 이야기를 통해 끝나지 않은 그의 ‘집’을 들여다보다!

재일 한국인 건축가인 이타미 준/유동룡(1937~2011)의 건축을 다룬 영화다. 대중에게는 제주도의 수·풍·석 미술관으로 알려져 있다. “떠도는 여행자의 삶을 살며 사람과 생의 온기가 담긴 집을 빚었던”, 경계 선상에 선 자가 구축한 건축 철학을 잔잔한 음악과 좋은 영상으로 담아내었다.




≪나의 아버지, 건축가 루이스 칸≫ (2003 | 나다니엘 칸 감독)

20세기의 위대한 건축가인 루이스 칸은 거친 아름다움과 깊은 정신이 아로새겨진 멋진 건물을 남겼다. 빛, 공간, 질감을 통해 시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했지만, 그의 죽음은 의문으로 남아있다. 그의 아들 나다니엘이 개인 여정을 통해 복잡한 그의 삶을 추적한다.

루이스 칸의 숨겨진 아들이었던 나다니엘 칸이 제작한 아버지이자 건축가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평생 그를 외로이 기다려 왔던 어머니에 대한 미련을 인 이가 남겨진 건축물들을 통해 ‘아버지’와의 화해를 시도하는 이야기이다. 필자는 영화의 원제가 ≪My Architect≫라는 점을 좋아한다.




≪말하는 건축가≫ (2011 | 정재은 감독)

정기용은 단독 건축전을 준비하면서 평생에 걸쳐 쌓아온 성과물을 보다 폭넓은 대중들과 소통하고자 한다. (중략) 그의 마지막 전시 준비 과정을 축으로 그의 삶의 궤적, 그의 건축 철학과 작업, 그리고 죽음에 직면한 한 인간의 예민한 심리를 포착한다.

한국의 건축가 정기용(1945~2011)에 대한 건축 다큐멘터리이자 휴먼 다큐멘터리, 그리고 <감응: 정기용 건축>(2010) 건축전의 준비 과정을 기록한 예술 다큐멘터리. 사회와 건축의 상호작용과 그 안에서의 건축가의 책임, 공공 건축에 대한 깊은 생각들이 잘 담겨 있다.



2. 전문적인 건축 이슈를 다룬 영화

  좀 더 진중한 톤으로 건축의 하위 주제를 다루는 영화들이다. 생산성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보다 적합하다. 집중과 고찰을 요하는 무거운 주제라도 영상을 통해 접하면 지면으로 보는 것보다 부담이 덜할 것이다.


≪바우하우스≫ (2018 | 닐스 볼브링커, 토마스 틸쉬 감독)

심플하고 모던한 디자인의 시작, 인류 첫 창조 학교 '바우하우스'의 100년 발자취! 예술과 기술의 조화, 자유로운 상상력, 배움의 즐거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바우하우스의 움직임은 현재진행형이다!

현대 디자인의 실질적 뿌리인 바우하우스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영화.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사람 중심의 디자인 철학으로 현대 디자인의 모습을 바꾼 바우하우스의 100년 발자취와 그 신념을 이어가는 현대 예술가들의 프로젝트와 목소리를 담은 작품이다.”(1)




≪나의 호텔 순례기≫ (2016 | 크리스티안 페트리 감독)

감독 크리스티안 페트리는 여행의 정서와 방랑자들의 쉼터로서의 호텔에 매혹되어 이 여정을 시작했다. (중략) 호텔은 아랍의 사막에서 기원한 이래 지금껏 예술가, 사색가, 괴짜 백만장자 등 다양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임시 거처였으며, 그 역사는 현대적인 삶의 발전사를 반영하는 풍부한 이야기를 담아낸다.

크리스티안 페트리의 호텔 여행기. 호텔의 ‘쉼’의 기능에 초점을 맞추었다. 멋지고 편안한 기억을 만드는 호텔의 건축 미학에 대해 세세하게 짚어 준다.




≪슬럼: 미래의 도시≫(2013 | 장-니콜라스 오르혼 감독)

슬럼은 가장 궁핍하고 불행한 사람들의 공동체라는 뜻을 갖고 있으나 실제 그들의 삶은 그렇지만은 않다. (중략) 영화는 슬럼을 부정하는 것은 도시 전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한다. 나아가 주류 시스템 밖의 슬럼에 여전히 존재하는 자생 방식에서 오히려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찾아 공존할 것을 제안한다.

슬럼(slum)에 관한 고찰과 제안. 건축학과의 어떤 수업에서든 도시와 사회에 대해 말하자면 슬럼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낮은 곳이라서만이 아니다. 설계자의 손을 떠나 스스로 선 도시-사회-공동체의 안에는 우리가 알아야 할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3. 건축 혹은 건축가가 나오는 영화

  비교적 서사적이고 가볍게 볼 수 있는 작품들로, 주로 외부의 시선으로 대상화된 건축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들이다. 주연의 직업으로 건축가는 꽤 자주 채택되는 편이다. 여유롭고 멋있는 삶을 즐기는 ‘건축가’의 모습에 속이 꼬이더라도 한 번쯤 봐 두어야 ‘너도 야경을 내려다보며 커피를 홀짝이느냐’는 질문을 들었을 때 덜 당황할 수 있다.



≪콜럼버스≫ (2017 | 코고나다 감독)

모더니즘 건축의 메카, 콜럼버스- 원치 않은 발걸음으로 도시에 다다른 한국인 ‘진’과 이곳을 사랑하지만 또 다른 이유로 떠나지 못하는 ‘케이시’의 늦여름 짧고 깊은 만남.

건축을 통해 내면을 살피는 인물들의 이야기.  '콜럼버스'는 미국 모더니즘 건축의 중심지로 불리는 지방 소도시의 이름이다. 건축, 공간, 모더니즘을 삶과 관계에 주의 깊게 얽어 놓은 모습은 고요하고 아름답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 (2013 | 구스타보 타레토 감독)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우리는 끝내 만나게 될 거에요! 매칭률 100%를 향한 도시남녀의 신개념 러브스토리!

영화의 시작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차가운 건축물을 응시하는 샷이다. 영화는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실패한 도시 계획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별거와 이혼, 가정폭력, 대화의 단절, 무관심, 우울증, 공황 발작 같은 현대 질병은 모두 건축가들 때문이다. 주인공들도 이 같은 도시의 무책임한 건축의 산물이다.”(2) 동의 여부를 떠나 공공 건축에 관한 한 우리는 최대한 많은 비판을 접할 필요가 있다.




≪성가신 이웃≫ (2009 | 마리아노 콘 감독)

레오나드는 유명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작품인 집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어느 날 아침 소음에 잠이 깬 그는 옆집에 살고 있는 노동자인 빅터가 자신의 집 쪽으로 큰 창을 내는 공사를 시작한 것을 알아챈다. (중략) 주택과 거주라는 인권의 기본 주제를 통해서 심층적인 사회적 주제를 담아내려고 한 작품.

오롯한 삶에 만족하던 레오나드와 그를 침범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빅터의 충돌은 도시의 삶이 두른 얄팍한 껍데기를 솜씨 좋게 보여준다. 영화의 배경이 된 것은 르코르뷔지에의 <쿠루체트 주택>이다. 건축물과 공간에 대한 이해가 영화 전반에서 드러난다.



인용

(1) 작자미상. (연도미상). 바우하우스. 다음.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30639 

(2) 박은경. (2013). 영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 경향신문.



참고문헌

작자미상. (연도미상). 이타미 준의 바다. 다음. 

자유인. (2005). EBS 다큐스페셜-나의 아버지 건축가 루이스 칸. 다음 블로그. 

김덕영. (2016). 건축가 루이스 칸과 나의 아버지.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네이버 브런치). 

작자미상. (연도미상). 말하는 건축가. 다음. 

작자미상. (연도미상). 바우하우스. 다음. 

작자미상. (연도미상). 나의 호텔 순례기. 다음. 

작자미상. (연도미상). 슬럼 : 미래의 도시. 다음. 

작자미상. (연도미상). 콜럼버스. 다음. 

작자미상. (연도미상).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 다음. 

박은경. (2013). 영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 경향신문. 

작자미상. (연도미상). 성가신 이웃. 다음. 

  

  


게재 : Vol.15 건축과 방학, 2021년 여름

작성 : 프로잡담러 I | 김정인

매거진의 이전글 흰 바람벽 속에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