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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담 Jul 10. 2023

흰 바람벽 속에는

17호_건축과 여백_특별잡담

작성 : 프로잡담러 O

게재 : Vol.17 건축과 여백, 2021년 겨울

 

   

여백(餘白)을 상징하는 색상은 흰색이다. 동시에 이는 다양한 건축물에 쓰여 온 색이기도 하다. 구조부를 제외한 부분에 흰 회칠을 하던 우리의 전통 건축이나 이집트, 로마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근대에는 여러 건축가들이 즐겨 사용하면서, 소위 말하는 그럴듯한 건축물의 상징이 되어 현대에도 자주 사용되고 있다



그들이 흰빛의 벽체를 통해 얻고 싶어하는 효과는 무엇일까. 이유를 고민하다 보면 떠오르는 시가 있는데, 바로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 이다.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아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이 시에서 흰 바람벽은 비어있기 때문에, 어떤 것이든 상상하여 채워낼 수 있다. 마치 스크린처럼 작용하는 것이다. 건축물에서 흰색이 사용되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이다. 물성을 지워내 아직 때묻지 않은 순수를 표현하면서, 동시에 주변의 풍경을 거울처럼 담아내고, 어우러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혹은 색을 비워 볼륨 등의 다른 요소를 방해 없이 표현하려 하기도 한다. 이는 근대 시대에 이루어진 장식 배제 운동의 일환으로 이어진 시도이다. 거슬러 올라간다면 문인화와 선종의 영향으로부터 이어진 동아시아 여백의 개념이 재해석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 선종에서 여백은 우주를 암시하는 기법으로 사용된다. 이러한 이론들을 기반으로 이 글에서 언급될 여백의 정의를, 무엇을 덧입히든 받아낼 준비를 마친 상태라고 내렸다.


그렇다면 백색의 벽체는 건축의 여백이라 불릴 수 있는 요소일까? 흰 도료가 발린 순수한 벽체는 보는 이에게 아름답다는 인상을 전달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질적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로 인해 여백보다는 정점의 성격에 가까워진다. 우리 도시의 입면을 나열해 보았을 때 실제로 순백의 파사드는 흔하지 않다. 그만큼 작은 크기라도 하나가 등장했을 때, 상당한 인상을 남긴다. 어우러지기보다는 그 자체의 목소리가 두드러지는 것이다.


건물의 가장 필수적인 요소를 떠올려 보면, 새하얀 재료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무결한 백색의 공간은 없다. 도화지에 그려지는 그림의 입장에서 흰색은 비워진 것이다. 그러나 땅과 자연 위에 지어지는 건축물의 입장에서 흰색은 채워진 것이다. 그 자체로 빈틈이 없으며, 이물질을 용납하지 않는 공간이다. 즉, 흰 벽은 우리의 인상보다 꽤나 장식적인 요소이다. 백색 시대를 이끌었던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초기 건축물들을 보더라도, 당시의 흰 레이어는 그 아래의 조적조를 감추기 위한 장식이었다 .


흰 벽은 단지 이미지적인 여백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오가자, 건축가들은 대안을 찾기 시작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는 노출식이라 불리는, 구조체와 재료를 강조하는 기법이 더욱 성행한 것이 바로 이때이다. 트렌드는 하얀 벽에서 잿빛의 콘크리트 벽으로 점차 전환되었다. 이로써 불필요한 덧칠 없이 그 자체를 강조하는 방식을 취하였고, 건축은 장식에서 더욱 탈피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노출된 콘크리트 벽이 건축의 여백이 되어 줄 수 있는 것일까?


세월의 흔적이 덧입혀지는 것을 극도로 회피하는 흰 벽들과 달리 노출콘크리트는 비교적 흔적을 용인하는 편이다. 자연적인 균열이나 이끼 등이 덮여도 부자연스럽지 않고, 가구 등으로 다른 재질이 가까워져도 잘 어우러진다. 그러나 지나치게 추앙되는 유행으로 번지면서, 갓 완성된 초기의 상태를 완성이라 생각하고, 이를 상징화하고 있는 것 같다. 그로 인해 무언가 더해지는 것을 인위적으로 막아내는 듯해 아쉬움이 남는다. 자연적인 기포를 배제하고 매끈한 표면을 만들어내려는 제작방식 또한 이미지적인 여백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듯하다.


채움을 위한 비움이 아닌 비움을 위한 비움의 아이러니는 아직까지 현존한다. 회화는 상상의 무대이다. 정지된 한 폭에서도 우리는 수많은 사고를 덧입힐 수 있다. 그러나 건축물은 삶의 무대이며, 박제되어 있을 수 없다. 수없는 행위와 흔적이 차오르고 사라질 수 있어야 한다. 건축에서의 여백은 그것의 배경이 되어 주어야 마땅하다. 이를 위해서는 상징적인 편견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반드시 여백일 필요는 없다. 그 위로 사람과 물체 그리고 삶이 덧입혀져 안정을 얻을 수 있도록 준비된 곳이라면, 어디든 여백이라 부를 수 있다.


한계가 존재하긴 하지만, 지금까지의 흐름은 이러한 방향을 잘 유지해왔다. 진정한 비움과 채움의 선순환을 달성하기 위해 앞으로는 더 무엇이 필요할지, 많은 고민과 토론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김종헌 (2009). 17세기∼20세기 초 유럽과 미국에서의 극동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근대건축에 미친 영향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 논문집 - 계획계,25(2),143-154.

민치윤, 심우갑 (2008). 르 코르뷔지의 건축의 '흰 벽(White wall)'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 학술발표대회 논문집 - 계획계,28(1),407-410.



  


WRITTEN BY

프로잡담러 O | 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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