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잡담 Apr 30. 2023

덜 채운 게 아니라 이미 차 있는 겁니다

17호_건축과 여백_특별잡담

작성 : 프로잡담러 T

게재 : Vol.17 건축과 여백, 2021년 겨울

 

나는 대화에서 항상 말을 덜 하는 쪽이다. 친구들과 함께하는 술자리에서도, 오랜만에 만난 동창들과 함께여도, 심지어 내가 이끄는 프로젝트의 회의에서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좋게 포장해주는 이들은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편’이라던가, ‘모두의 의견을 수용하는 자세’라고 표현해주지만, 직설적인 친구들은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드는 놈’이라고 타박하거나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지 말라’며 추궁하기도 한다. 물론 모두 틀린 말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가 특별한 의도나 꿍꿍이가 있어서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고상하게 변명하자면, 나는 그저 대화에 오가는 문장들 사이에서 여운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 걸 알고 있다. 나는 평생 뭘 해도 좀 이상하게 보이더라고. 그래서 여러분 중 누군가가 나를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으며 음흉하게 미소 짓는 변태’로 판단해도 그리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유 없이 변태 소리를 듣고 싶은 건 아니니, 내가 즐기는 여운이라는 게 무엇인지 좀 더 열심히 설명해야 한다. 그러면 적어도 이유 있는 변태쯤은 될 테니까. 그리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게 건축과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는지도 밝혀야 한다. 물론 이것도 열심히 해볼 터이니, 부디 여러분께선 여유를 갖고 따라와 주시길 부탁드리는 바이다. 따뜻한 음료 한 잔과 함께 읽기에 부담없는 수준일 것이다. 


여기부터 시작해야겠다. 특별한 이유로 굳이 대화에서 말을 줄이려고 노력한 것은 아니다. 나는 원래 말수가 적었다. 그게 편했고, 내겐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나이가 많아지고 대화할 자리가 늘어날수록, 이미 같은 자리에 있는데도 내게 대화에 참여하라고 요구하는 사람이 생겼다. 당연히 나도 함께 대화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지적을 받으니 처음에는 부담스럽고 어색했다. 그렇다고 말을 많이 할 생각은 없었기에, 왜 그 사람들이 내가 대화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여겼는지, 말을 많이 하지 않으면서 대화에 참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렇게 정리한 나만의 결론이 ‘대화 속에서 여운을 즐기는 것’이다. 이건 누군가의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는 것과는 명백히 다르다. 마치 조별 과제의 무임승차와 버스 기사 사이의 차이만큼 다르다. 대화에서 각자의 역할이 다를 뿐, 나 역시 성의있게 참여하고 있다는 뜻이다. 누군가 말하고 있으면, 누군가는 듣고 있어야 하지 않나. 나는 듣는 역할을 더 잘하고, 이를 충실히 수행하는 걸 넘어 행복하게 받아들이는 경지에 이르렀을 뿐이다.


나는 당신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경험이 흥미롭고, 의견은 소중하며, 주장은 존중한다. 진심으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건 대단히 귀한 경험이자 소중한 기회다. 어디서 주워 들은 표현으로는 모든 인간이 하나의 우주와 같으므로, 나는 당신과 대화할 때면 영화 《콘택트(Contact)》 의 천문학자처럼 다른 우주의 신호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셈이다. 그렇게 온 지구의 힘을 끌어모아 정성껏 내 반응을 준비하고 보내는 것이다. 


그러니 입을 열기까지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단둘이 있을 땐 당신이 어쩔 수 없이 내 말을 기다려주겠지만, 사람이 많아지면 대개 내가 준비되기 전에 다른 사람의 문장이 전달된다. 그럼 새로운 신호를 받아들이는 일이 급하니 내 반응은 더 늦어진다. 심해지면 대화가 한 바퀴 돌고, 정적이 흐를 때가 되어야 나는 말할 준비가 된다. 심지어 대화의 주제가 넘어가 버릴 때도 있기에, 기껏 열심히 듣고 생각한 게 무용지물이 되지 않도록 내 생각을 서둘러 내보낸 적도 있었다. 한때는 대화 사이에 정적이 흐르면 내가 잇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남몰래 눈치도 보았다. 그렇다고 내가 원하는 만큼 내 생각이 빨라지는 일은 없었고, 억지로 입을 빨리 열면 나오는 건 ‘덜 익어 허여멀건 영혼 없는 공감’, 혹은 ‘새카맣게 타버린 무책임한 주장’이었다. 그렇게 이어지는 대화는 맛도 없고, 즐겁지도 않았다. 상대방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내가 할 말에만 집중해버리니 엉뚱한 소리를 하기도 했다. 간단하게 샌드위치나 먹자고 했는데 채끝살에 마리네이드를 하는 거지. 심지어 상대방이 비건일 때도 있었다. 결국 나는 대화에 내 말을 더 채워넣길 포기했다. 대신 이미 차 있던 걸 찾아냈다.


대화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지, 소리를 주고받는 것이 아니다. 그런 건 통신이라고 하지. 그러니 대화를 굳이 소리로 꽉 채울 필요는 없다. 만약 당신이 10초 동안 말하고 있다면, 나는 적어도 10초 동안은 조용히 있어도 된다. 몇 초 정도 더 조용할 수도 있다. 그동안 나는 머릿속에서 《콘택트(Contact)》 한 편을 찍고, 당신의 문장에 맞게 정성껏 대화를 이어나갈 것이다. 물론 모든 대화에 똑같은 정성이 필요하진 않다. 그 경우, 나는 5초 정도만 투자하고 남은 시간을 당신과 함께하는 순간을 즐기는 데 사용할 것이다. 어차피 그러려고 만나서 잡담하고 있을 테니까, 나는 너무 늦기 전에 당신의 문장이 남긴 여운을 받아 대화를 이어나갈 것이다. 이 정도의 간단한 규칙만으로도 내 대화는 훨씬 편해졌고,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다. 그럼 꽤 합리적이지 않을까?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려 애쓰다 실패하고, 마음을 비우자 비로소 이미 갖고 있던 소중한 것을 되찾는 전개는 너무 뻔하다. 그런데 세상일이 다 그렇다. 세상일이 다 그렇다는 뻔한 말도 내가 겪어 봐야 무슨 말인지 알게 된다. 대화를 말로만 채울 필요가 없다고 깨달았을 무렵에, 나는 4평 남짓한 새 원룸을 어떻게 채울지 고민하고 있기도 했다. 다만 좀 달랐던 건, 대화는 어떻게 채울지가 막막했고, 원룸은 어떻게 비울지가 막막했다. 휴학 생활 동안 불어난 짐을 아무리 정리해도 바닥에 앉을 자리조차 내기 어려웠다. 침대, 책상, 옷장, 냉장고가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고, 어딜 둘러봐도 발 디딜 곳이 없어 답답했다.


아픈 머리를 부여잡으며 의자에 걸터앉아 멍을 때리고 있었는데, 흰 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냥 여기에 책상을 붙여버리면 바닥에 자리가 좀 남을 것 같은데. 그렇게 책상과 벽을 번갈아 노려보다, 천장 불을 꺼 버리고 탁상 조명을 벽에다 비춰보았다. 별안간 눈앞에 새 백지가 생겼다. 오, 세상에. 억지로 채울 필요가 없으니, 억지로 비울 필요도 없구나.   


4평짜리 공간에 들어있는 물질은 그대로였다. 이미 비좁은 방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조명 하나 바꾸니 여유가 생겼다. 이건 더 채워 넣은 것도, 비워낸 것도 아니다. 만약 물건을 더 버린다고 해도 방에 여유가 생기진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비좁은 원룸에 뭘 넣어도 비슷할 테니, 내 인식을 바꾸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건 대화와 공간이 같았다. 둘 다 이미 차 있고, 중요한 건 어떻게 차 있는지 내가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대화를 말로 채워야 한다거나, 공간을 물질로 채워야 한다는 생각이 가장 큰 문제였다. 말이 없다고 대화가 비는 것도 아니고, 물질을 빼면 공간이 비는 것도 아니다. 내가 당신과 함께 있으면 우리는 대화하고 있고, 내가 방에 있으면 나는 공간을 사용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소리가 아닌 것으로 대화를 채웠듯 물질이 아닌 것으로도 공간을 채울 수 있다. 아니, 이미 채우고 있을 것이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물질이 아니면서도 공간을 채우고 있는 다른 존재를 마저 깨닫는 것이었다.


언제나 처음이 어렵지, 다음은 쉽다. 가장 먼저 빛을 찾았으니 소리가 따라왔고, 이내 냄새를 발견했다. 블루투스 스피커, 룸 스프레이와 같은 소소한 것들이 내 방을 다채롭게 채웠다. 공간은 덜 채워지지도, 덜 비워지지도 않는다. 다만 이미 차 있을 뿐이고, 공간을 채우고 있는 다양한 요소를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었다.


흔히 ‘여백의 미’에 대해 이야기하며, 의도적으로 비워낸 자리에 역할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미술에 조예가 깊어지면 남은 공간을 채우는 조형의 흐름을 볼 수 있다는데 그건 잘 모르겠고, 적어도 보이지 않는 것이 ‘비움’을 의미하진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보이는 것이 ‘채움’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뭐든 더 넣을 수 있을지 모르는 상태를 ‘가득 참’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그저 ‘이미 차 있음’이라고 표현하기로 했다. 채워지지도, 비워지지도 않지만 분명 온전히 존재하고, 여기서 더 깊은 가치를 찾아내는 건 우리의 몫이기 때문이다. 


드넓은 도시의 웅장한 마천루보다 비좁은 자투리땅의 작디작은 소형 주택을 좋아하는 건 이렇게 제한된 틈새에 숨어있는 요소를 찾아내는 재미를 즐기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비록 지금은 10평 가까이 되는 방에 살지만, 만약 예전의 4평짜리 원룸으로 돌아가라면 절대 안 돌아가겠다. 차 있는 건 있는 거고, 좁은 건 좁은 거니까. 낭만이나 행복이 들어갈 자릴 찾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더라. 

  


  


WRITTEN BY

프로잡담러 T | 김준우

매거진의 이전글 21세 어린이를 찾고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