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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담 Apr 23. 2023

21세 어린이를 찾고 있습니다.

14호_건축과 설레임_ 일상잡담

작성 : 프로잡담러 Q

게재 : Vol.14 건축과 설레임, 2021년 봄

 


아직 어린 시절의 이야기다.


가족들과 놀러갔다가 홀로 떨어져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마침 핸드폰은 꺼져 있었고, 내게는 모르는 사람에게 핸드폰을 빌릴 수 있을 만큼의 용기도 없었다. 어떻게 할까,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 보니 눈 앞에 길이 있어도 보이지 않고, 지도가 있어도 어디로 가야 할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스피커에서 울린 미아방송 덕분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길을 잃었을 때의 그 혼란스러운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나는 이제 꽤 컸고, 혼자서도 길을 찾아갈 수 있지만, 서울이라는 곳은 나를 어린시절로 돌아가게 해 그때처럼 방황하게 만든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어떤 곳일까?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나에게 서울은 환상의 도시였다. ‘환상적으로 근사한 도시’가 아니라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환상의 도시’였다. 빌딩 숲이니, 마천루니 하는 것들은 소설에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수학여행으로 3번 방문했던 게 전부였던 서울에 대한 내 기억은 굉장히 단편적이었다. 나의 서울에는 경복궁, 국립 박물관, 그리고 에버랜드만이 있었다. (사실 에버랜드는 서울이 아니지만..) 그렇기에 서울에서 생활하고 서울 사람들과 만나고 서울을 돌아다니면서 본 모든 것들은 내 세계를 둘러싼 벽을 무너뜨리는 경험을 안겨주었다.


대학생활을 위해 동경했던 서울에 올라왔다. 하지만 매일 과제에 시달리며 기숙사에서 시간을 보내길 대부분, 서울을 둘러볼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그러다 하루는 과제도 수업도 진작에 끝나고 잠깐의 여유가 생겼다. 무료하게 침대에 누워있다가 문득 서울구경이 가고 싶어졌다. 어디를 가볼까 하다 매일 뉴스에 나오는, 막장 드라마의 클라이막스에 나오는 그 법원청사에 가보고싶어져서 무작정 짐을 챙기고 핸드폰 지도가 시키는 대로 지하철을 환승하며 서초로향했다. 사실 서울에 올라와서도 대부분의시간을 학교 주변에서만 지냈던 나는 서울이 대단하구나 생각하면서도 특별히 다르다거나 하는 것들은 느끼지 못했다. 익숙한정도로 낮은 건물들, 익숙한 정도의 도로폭이 있는 대학가에서는 서울이란 곳도 그냥 사람 사는 곳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내 정신을 쏙 빼놓은 넓은 도로와 높은 건물들.정신없이 달리는 자동차들과 무관심한 사람들.



그 풍경에 익숙해질 무렵에 도착한 법원청사는 미디어를 보며 상상했던 모습보다 훨씬 크고 웅장했다. 휴일이라 조용한 법원을 홀로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목적은 달성했지만 그냥 돌아가기에도 아쉬워 조금 더 둘러보자며 청사를 나와 무작정 앞으로 걸었다. 법원에서 서초 삼성타운까지 이르는 반듯하고 정갈한 길을 따라 걸으면서 위화감이 들었다. 양쪽에는 XX법률 사무소, 법무법인OO 같은 간판을 걸고 상아색 벽돌로 고급스럽게 마감된 건물들이 빽빽했다. 사실 법원으로 향하고, 법원에서 나오는 길이 즐겁고 활기찬 것도 이상하긴 하지만, 이 길은 너무 우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건물들에서 잘못을 저지른 어린 아이를 꾸짖는 듯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이런 위화감은 건물이 높아질수록, 사람들이 많아질 수록 더욱 커져 시야를 모두 덮은 거대한 벽 아래를 걷는 사람들의 무리 속에 섞였을 때는 나 혼자 빈 도시를 걷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 엄청난 광경을 앞에 두고도 분노를 토하기만 하는 시위대 사람들, 주위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길만 쫓아서 가는 사람들. 이 거리에는 빛나는 건물이 가득한데, 거리 위 사람들의 모습은 전혀 빛나지 않았다. 도시가 우리의 삶과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나가는 동안 불편한 마음이 들었던 법원 앞 상아색 건물들


전원이 꺼지기 전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 이 풍경을보면서 도시에서 길을 잃은 기분이 들었다.



결론

짧은 여행이 끝나고 역으로 향하는 길, 하루 종일 사진을 찍고 지도를 켜다 지쳐 잠든 핸드폰을 손에 쥐고 당황하는 사이 정신차려보니 나는 황량한 육교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도로는 너무 넓어서, 그곳이 길인 것을 알면서도, 나는 길을 잃은 것만 같았다. 길을 잃은 ‘나’를 찾는 미아방송이라도 하고 싶어졌다. 누군가 그렇게 나를 불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분명 서울에서의 생활은 근사하다. 하지만, 한 달 그리고 조금이 지난 아직까지도 나는 서울이 두렵다. 이 거대한 도시가, 나를 내려다보는 저 고층 빌딩이 너무 두렵다. 도시는 사람을 닮고, 사람은 다시 도시를 닮아가는 것 같다. 높게 솟은 건물 사이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내 눈에는 길을 따라서 흘러가는 것으로 보였다. 빛나는 건물들이 반듯하게 닦인 도로를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이 도시에서 “표류”하지 않을 수는 없을까, 서울은 그런 도시가 될 수 없을까 하고 생각했다.


도판목록 / 사진 / 직접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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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잡담러 Q | S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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