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하는 제주도 애월 여행(3) / 조져지는 건 언제나 나였다
제주여행 2일 차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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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이 나오는 시간인 8시 30분 전에 아침 산책을 나갔다.
어젯밤 졸린 눈꺼풀을 이겨내고 계획한 일정이었다.
'8시까지 씻고 나갈 준비를 싹 마무리 한 다음, 30분간 산책 다녀와서 조식을 먹고, 9시에는 숙소를 나서서 바로 오늘의 여행을 시작해야지.'
즉흥적인 여행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성향이라 하나부터 끝까지 컨트롤하려고 한다.
계획을 짜면서 행복한 ISFJ도 있겠지만, 사실 난 그런 쪽은 아니다. 계획이 있어야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계획을 짜는 스타일이다. 거기에 완벽주의 성향까지 더해져 퍼즐처럼 딱딱 들어맞는 아름다운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사실에 괴로움을 느끼고 막막해지기도 한다.
빽빽함과 느슨함 사이에서 괴로움을 느끼는 나. 차라리 행복한 계획형 인간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스스로 만든 의무감 속에서 다녀온 동네 산책, 저 멀리 바다가 보이는데도 큰 감흥은 없었다. 계속 시간을 체크하며 걷다 보니 어딘가를 진득하게 바라보기보다는 발걸음이 빨라진다. 쫓기듯 계획을 이행하느라 체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실제로 음식을 먹다가도 자주 체하곤 한다.)
조식을 다 먹고 과감하게 다시 동네를 산책하러 나갔다. 산책을 몇 분간 할 건지, 그 뒤에 뭘 할건지의 계획을 내려놓고 일단 걸어보기로 했다. 급작스레 결정한 무계획은 묵직한 불안감을 가져다주었으나 이번엔 같은 풍경을 봐도 아까와 달랐다. 여유를 가지고 아름다운 색의 바다를 지긋이 바라보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한계 속에서 조급함을 느낀다. 그러고 보면 조급함은 내게 참 익숙한 감정이다. 때론 내가 이 자기 파괴적인 감정에 중독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계속해서 조급함을 느끼기 위해 어떻게든 한계를 찾아내는 걸지도.
분명 계획이 주는 안정감과 효율성, 그리고 안도감이 있다. 그것들이 날 좋은 곳으로 이끌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 계획을 짜기 위해 드는 에너지와 지켜지지 않았을 때 받는 스트레스를 따져본다면 그게 진짜 날 위한 계획이 맞나 하는 의문이 든다.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마주치는 것에 극도의 스트레스를 느끼는 나,
그러나 이미 많은 문제를 해결하고 살아온 나를 기억한다면?
그러니 결국 마주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며 나를 조금 더 믿어준다면?
내 인생은 다양한 방향으로 다채로워 질지도 모르겠다.
오레오 쿠키 같은 암석, 층층이 색이 다른 바다. 오랜만이야 제주 바다.
좋아 이거면 됐다!
이 마음은 조급함과는 정반대 되는 마음일 것이다. 이런 마음도 필요하다.
<아이콘-사랑을 했다>의 가사는 현자와도 같은 너른 마음이었던 것.
그거면 됐다, 널 사랑했다
바람이 엄청나게 불어서 대머리만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은 제주 바다.
머리를 야무지게 묶고 바다의 움직임을 조금은 느긋하게 그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관찰했다.
이 바다를 바라보기 위해서라면 얼굴에 기미 몇 개쯤은 새겨줄 수 있지.
끝없이 도전하는 파도, 부서지고 스며드는 바닷물, 그 옆에 잔잔히 고여있는 맑은 물의 퀘렌시아.
그거면 됐다.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