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친과의 만남
묘소에 사초 후 함께한 동생과 지난 일을 돌아보면서 어려웠던 부자지간의 관계를 조심스럽게 꺼냈습니다,
저의 첫마디는 많이 존경했던 분이지만 지극히 사랑할 수 없었다였고 동생도 그랬다고 하더군요.
형제간에 처음 나누는 대화였습니다.
관계가 어려워서 사랑할 수 없었다는 말은 부자지간에 보편적이지 못한 드라마틱한 일이 있었거나, 불신의
형태는 아니더라도 사랑할 수 없었던 다양한 이유가 있었겠지요.
그렇게 보면 부모의 입장은 여러모로 힘들다는 생각에도 미치게 됩니다.
저의 입장에서 보면 당신은 어린 자식과 노부모를 남기고 아내와 사별한 슬픈 당사자였고, 계급사회에 속한
공무원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유연한 삶은 아니었다고 이해가 됩니다.
새로운 여인과의 관계도 배다른 동생들과의 모든 관계가 당신에게는 바로 세워야 했던 결코 녹녹하지 못한
여정임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마다의 목소리는 담을 넘을 수 없도록 작을 수밖에 없었겠지요.
표정과 표현은 극히 절제된 무엇이었겠지만 모두에게 공정했다고 이를 위안 삼으셨을 것입니다.
모두에게 스스로 짊어질 균등한 의무와 책임을 가지도록 하셨을 것입니다. 그 과정이 힘드셨겠지요.
책임을 공평하게 나누고 의무를 견고하게 부여할 때 주관자의 태도는 지극히 엄격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나는 선친의 고된 삶을 피상적으로 인식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분을 이해하는 삶을 살았다면 극진한 마음은 내밀하고 신산했어도 스스로 애쓰는 곡진함이 함께 있어야 했겠지요.
오히려 당신은 제게 위로해 드려야 하는 대상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사랑할 수 없었던 선친께서 보여주신 상식밖의 행동을 목격하거나 가정폭력의 피해자는 아닙니다.
당신은 절제의 표현방식과 우리가 서로 익숙하지 못한 방식으로 사랑을 전하셨을 것입니다.
당신의 말씀을 제가 알아듣지 못했다는 말이 적절한 표현이지 싶습니다.
다만 설익은 과일이 매대에 올려지는 불편한 진실처럼 돌아가신 선비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선친께는 설익은 모습으로 살아야 했다고 위안을 삼을 때가 많았습니다. 모습도 부자연스러운 설익은 과일의 피곤함을 아실까요? 선친은 선친대로 저는 저대로 가족은 가족대로 그대로였습니다.
선친을 위로하고 슬픔을 함께하는 과거의 행동이 나에게 힘든 고통으로 남았다면 모든 것이 저에게 원인으로
남았던 것일까요? 선친을 위로하는 행동은 품에 맞지 않는 옷을 몸에 맞추는 수고를 다하는 일이었습니다.
몸에 맞지 않는 옷도 지나는 세월 속에서 몸에 맞추어 갔습니다. 그렇게 당연한 고정관념이 된 것이지요.
선친을 회고하려는 글을 쓰려고 펜을 들고 나는 과거로의 여행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마음을 주신 방식이 받아들이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되짚어 생각하게 했습니다.
나의 씀은 걸음을 더디게 하고 있었지만 새로운 사실로 나를 설득하지는 못했습니다. 오래된 모든 기억이
새로운 순서와 의미를 주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무엇이 만들어 지기에는 너무 멀리
온 것 같습니다.
어쩌면 아픔을 새롭게 치유하고 새로운 사실로 나를 이해하게 할 수 있는 무엇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놀라운 일은 선친께서 작고 하신 후에 나는 걸음걸이, 말투, 표정까지 당신을 닮아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친과 닮아 가는 것으로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표정에서 늙은 아비의 노파심을 살피는 모습을 보면서 그분도 저러셨을까 싶을 때가 있습니다.
내가 그분과 무엇을 달리해야 하는 과제는 아마도 이번생에서는 찾지 못할 것 같습니다. 두렵습니다.
아이들은 그 이전의 아버지보다 늙어가는 아버지를 사랑하겠지만 나에게 보이는 선친의 모습은 저의 발걸음을 느리게 하고 있습니다. 선친께서도 지나온 세월 때문에 저와 같은 행동을 하셨을까요?
저는 예정된 논리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고정관념으로 글을 시작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아마도 마지막을 그대로 마무리할 것 같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저와 같은 생각으로 저를 기억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면 저는 선친께서 느낄 수도 있으셨을 마음으로 아이들의 사랑을 느끼고 이해할까 싶은 생각을 합니다.
손녀의 손을 잡고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시는 선친의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제가 그렇게 걸어가면서 손녀의 손을 잡고 있습니다. 당신의 사랑을 되물어 보면서 말입니다.
글은 마음을 진심으로 담아내지 못한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 싶습니다. 저의 씀이 미천하여 격에 맞지 않은 글을 쓰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저는 선친께 불효하고 송구한 마음을 감출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