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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 은둔자 Sep 11. 2018

거울의 왕국, 일본의 정신을 찾아서

서양의 시각에서 보는 일본, 그리고 일본과 우리?

ARTE(아르테)라는 방송은 프랑스와 독일이 함께 만드는 것이다. 미테랑과 헬무트 콜 때에 만들어졌다.

요즘 아르테에서 일본이 개항 150주년을 맞는다며 (즉, 일본과 프랑스의 수교 150년을 뜻하는 것! 우리나라와 프랑스는 2016년에 130주년 우호관계를 기념했다) 일본에 관한 다양한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쏟아내고 있다.


그중, "거울의 왕국, 일본의 정신을 찾아서" (원제:Au royaume des miroirs, A la recherche de l’âme japonaise)라는 독일의 Bianca Charamsa 감독이 만든 다큐 얘기를 하려고 한다.


https://www.arte.tv/fr/videos/078735-000-A/au-royaume-des-miroirs/  


이것은 일본의 정신, 혹은 일본의 정체성 찾기에 관한 다큐다. 다양한 일본의 예술인, 배우, 감독, 소설가, 조형예술가, 건축가, 다도 선생, 스님을 만나서 그들이 말하는 일본의 정신을 키워드로 담아낸다.



일본의 정체성은 애매함?

다양한 키워드 중 하나가 '애매함'이었다. 애매함은 희미하고 어두운 것이다. 밝고 명확한 것과 대조된다. 

게이이치로 히라노(Keiichirō Hirano)라는 소설가의 작품에서 삶과 죽음이 혼돈된 상태로 보이는 듯했다. 소설 속 주인공이 죽었는데, 얼마 후 태연하게 다시 살아나는 상황이 반감 없이 강한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을 일본인의 삶과 죽음에 대한 모호한 태도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독일의 감독이 만든 작품이란 전제로, 서양인들의 입장에서 일본인들이 쉽게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작품을 쓰고, 그것이 큰 공감을 얻는 상황이 (게이이치로 히라노는 1999년에 아쿠타가와(Akutagawa)상을 받았다) 일본인의 애매성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독일인의 정체성을 명확함으로 여기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이데거(1889-1976)는 인간의 존재를 시간성으로 파악하여, 인간의 죽음은 존재가 끝나는 지점이라 한다. 즉 삶과 죽음은 칼로 자르듯 선명하게 구별되는 것이다. 일본인 와츠지 테츠로(1889-1960)는 하이데거의 시간성을 비판하며 인간은 죽은 뒤에도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 안에서, 그의 행적이 남은 사회 안에서 영원히 산다는 공간성의 개념을 제시한다. 그의 저작 '풍토'(1935)는 오귀스텡 베르크의 분석으로 유명한데, 두 철학자를 대조하는 작업이다.


서양인들은 일본의 개념이 자신들의 명확한 대조와 '다르게' 보이는 것을 '애매함'으로 얘기하는 것은 아닐까? 혹은 일본인들은 서양의 정체성을 명확함으로 설정하고, 상대적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모호함으로 정의하는 것은 아닐까? 

서양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하늘로 간다고 생각하고, 일본에서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땅에서 산 사람과 섞이고 엮인다고 생각한다. 이런 대비는 일본 대신 우리 한국을 넣어도 비슷하게 적용될 수 있다. 특히 지금도 조상의 묘를 좋은 자리에 잡아 후대에 조상의 은덕을 입고자 하는 음택은 같은 맥락이다.



일본의 미는 폐허의 미학?

이 부분은 "거울, 반사(반영)의 예술"이라는 카테고리로 소개되었는데, 내 보기엔 거울보다는 폐허의 미학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서는 일본의 조형예술가 다카히로 와사키(Takahiro Iwasaki)의 이야기를 한다. 히로시마에서 사는 이 예술가는 히로시마 원폭이 있던 날짜 8월 6일을 모르던 자신의 대학 친구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할아버지는 원폭 피해자였고, 그는 당연히 모든 일본인이 이 날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단다. 그는 이 날을 일본인들이 잊지 않고 기억하게 하려는 작업 동기를 가지고 있고, 예술이 현재를 다음 세대에 전하는 고리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일본인들에게 주어진 환경, 지진, 태풍, 쓰나미 등과 같은 재난 앞에서 인간의 힘이 얼마나 미약한지를 느끼며, 영원을 꿈꾼다고 말한다. 아무 이유 없이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재난들과 그 재난이 만들어내는 파괴를 보며 존재의 미약함은 일본인의 정신에 깊게 각인되어 있다고. 여기에서 덧없음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파괴의 미학을 이야기한다. 배경이 되는 당게 겐조가 설계한 히로시마의 평화 기념관은 폐허가 그 어떤 예술작품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로 제시된다.

베를린에 브라이트샤이트 광장(Breitscheidplatz) 중앙에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가 있는데, 2차 세계대전 당시의 폭격으로 교회가 파괴되었다. 파괴된 첨탑을 유지한 채 새로운 교회를 지었는데, 프랑스에서는 베를린 기념교회라고 부른다. 히로시마의 평화기념관과 같이 폐허의 흔적이 강한 개념으로 드러난 건축물이다.


왼쪽이 베를린의 카이저빌헬름기념교회의 첨탑, 오른쪽이 히로시마의 평화기념공원의 겐바쿠돔이다.


예술가는 작품으로 자신의 세계관을 드러낸다. 그 세계관은 이전까지는 없던 새로운 것이고, 어쩌면 다카히로 와사키가 말한 것과 같이 다음 세대에게 전해질 의미가 있다면 긴 생명력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고민해 보라고 자극한다. 예술품을 감상하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이 다큐를 관심 있게 보았던 이유는 서양인들이 바라보는 일본, 그리고 일본과 나름 같은 한자 문화권으로 (서양에 비하면) 많은 유사점이 있는 우리를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었다.

이 다큐는 총 7개의 카테고리, 다도 / 애매 / 거울 / 와비사비 / 영혼 / 고향 / (없을) 무로 전개되었다.

우리는 일본처럼 차 마시는 것을 '도'의 경지로 만들지는 않은 것 같지만, 정약용이 다산초당에 유배하던 시절 초당 앞의 넓은 바위 위에서 자주 차를 마시고 바둑을 두고 한 얘기가 나온다. 다도와 관련된 와비 사비의 개념은 조선시대 우리나라 사대부들의 미학과 맞닿는 부분이 있다. 꾸밈이 없는 수수함이 와비, 예스러운 아취가 사비로, 꾸밈이 없고 수수하며 은은하고 깊은 정감이 있는 미의식이다. 

영혼과 관련해서는 다다오 안도가 등장하는데, 그의 건축에서 주재료가 되는 콘크리트 벽을 빛을 반사하는 반들반들함을 거울과 연계하고, 그가 추구하는 일본의 정신을 부각하려 했지만 잘 드러내지는 못했다. 

마지막의 '무'는 스님이 도를 닦는 한 방법으로 거울을 마주하고 자신의 마음을 비추고 진실을 찾는 도구로 쓰인다고 얘기한다. 일본의 신화에서도 거울은 자기 자신을 깨닫는 상징이며, 거울이 깨끗하면 진실에 대한 이해가 완벽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거울은 깨끗하게 닦아 반들반들 윤이 나게 해야 한다고 한다.

사실, 제목의 '거울'은 전체적인 다큐의 세부적인 카테고리와 정확하게 맞아 들어가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각각 다른 모양의 구슬들이 있는데, 끝부분에서 억지로 끼워 맞추는 느낌이 들었다.




* 다큐에서 일본의 이름이 서양식으로 이름+성의 순서로 소개된 것을 그대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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