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건축은 무엇을 담고 있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는 미술가, 조각가, 과학자, 건축가였던 그들은 어느 한 분야의 직업으로만 부르기가 힘들다. 미술을 논할 땐 미술가, 과학을 논할 땐 과학자의 면모 (그것도 아주 뛰어난)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건축은 오랜 시간 인간과 함께 발전해온 학문이다. 자연재해로부터 피하기 위해 동굴을 찾는 것으로 시작하여 지금은 하나의 상품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렇듯 건축행위는 필요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오늘날 어떤 건축에 사는가를 보고 사람의 수준을 판가름하는 척도가 되었다. 비싼 옷을 두르며 우월감을 뽐내는 건 너무 직접적으로 비치니, 비싼 집에 사는 것으로 은근히 자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집이라 봤자 대기업에서 만드는 아파트일 뿐 어디에도 사는 사람의 인생철학이나 가치관은 담겨있지 않다. 그 허무함을 매우듯 공간을 비싼 가구들로 채우는 건지도 모르겠다.
본디 음악, 예술은 건축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초기 문명시대에는 제사를 드리는 제사의식에서 마을공동체가 모여 노래하고, 춤 주고, 먹는 행위를 함으로 공동의 목적을 가진 공공공간이 생겨났고 중세시대에는 버트레스 구조의 발견으로 높은 창과 층고가 확보되자 성당, 교회를 중심으로 스테인드 글라스로 성서의 이야기를 담고, 하늘을 찌를듯한 첨탑으로 신과의 친밀함을 드러내고자 했으며, 드높은 층고의 성당 안에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성가를 배경으로 미술과 음악 기술이 발전하였다. 그러니 건물을 지을 때 건축가는 거주를 한다는 한 가지 목적만을 생각한 것이 아니고 여러 기술자, 미술가, 음악가와 함께 건물을 지어 나가며 인간의 문화 예술 행위(인류의 문명)를 감당할 수 있는 건물을 지었다. 이처럼 모든 문명은 건물을 중심으로 발정하였으니 건축은 인류문명의 중심에 있다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건축가는 영어로 Architect로 그리스어 Arkhitekton에서 유래한 말로 'Arkhi:우두머리'와 'tekton:기술자'가 합쳐진 단어다. 여러 기술자를 지휘하여 하나의 건물을 짓는 사람이 우리가 알고 있는 건축가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가는 하나의 기술만 알고 있어도 안되며 '건물을 짓는 기술만'알고 있으면 안 된다. 모든 사회, 문화에 걸쳐 다양한 영역에 관해 관심을 갖고 이를 건물로 구현하는 방법에 대해 연구해야 한다.
그래서 건물에 담기는 것은 그 안에 사는 사람과 관련된 문화 즉, 그 사람을 형성시켜온 가치관, 교육, 철학이어야 한다. 오늘날 건축 잡지를 보면 멋진 가구로 점철된 인테리어 아니면 독특한 외관과 재질에 관한 설명뿐이다. 건축가가 건물을 짓기 위해 건축주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나눔 끝에 대지와 관련한 건축가의 공간 구상, 철학, 개념에 관한 설명은 여전히 불충분하다. 알려야 할 부분보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보이는 것에만 치중하기 때문에 우리의 건축문화는 세계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늘 변방의 위치에 있다.
건축은 한 영역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다. 여러 영역을 지칭하며 많은 분야를 포괄적으로 묶는 단어다. 이러한 건축의 방대한 영역을 줄이는 것은 건축을 의뢰하는 클라이언트다. 어떤 클라이언트를 만나는지에 따라 분야가 좁아지기 때문이다. 주택을 의뢰하는 음악가일 수도 있고, 사옥을 의뢰하는 게임회사일 수도 있고, 미술관을 의뢰하는 사업자가 될 수도 있다. 누가 어떤 건물을 의뢰할 때 영역은 좁혀지며 이를 공간으로 구현하는 건축가의 성향에 따라 같은 목적의 건물이어도 그 특징이 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건축은 건축 그 자체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 건축에 투영시키는 사람의 삶이 있어야 가능하다.
오늘날 우리는 건축을 통해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가. 비싼 집값이 훈장인 것처럼 으스대며 어디 명품시계 다루듯 그렇게 여기고 있지 않은가. 집 가격이라는 한 가지 맹목적인 목적만을 쫒으며 건축을 판단하고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가. 건축가 또한 자신의 건축 철학 실천에만 혈안 되어 명품을 만들어내는 장인 행세를 하고 있지는 않는가.
나의 공간을 찾는 연습을 해야 한다. 남들이 보기에 이쁘고 좋은 집이 아니라, 나의 삶을 잘 반영하고 그 공간을 통해 삶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건축을 찾아야 한다. 나의 삶을 돌아보며 오래된 것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고 일률적인 가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아름다움과의 조화를 꿈꿔야 한다.
우리를 둘러싼 건축,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이야기를 통해 도시의 이야기를 살피며 나의 이야기를 덧붙인다면 오래된 공책에 새로운 이야기를 쓰듯 새로운 나의 공간을 통해 오랫동안 있었던 이 도시에 작은 이야깃거리 하나 남기는 것도 참 멋진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