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대를 향한 그림 같은 집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남진의 노래 ‘임과 함께’에 나오는 가사 첫 줄이다. 사랑하는 님과 함께 살고자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겠다는 소망이 담긴 노래에 잠시 딴지를 걸어보자면, 그림 같은 집을 지을 때의 그림은 어떤 그림이어야 하며 당최 그림 같은 집은 무엇일까?
우선 그림은 2차원 평면에 그려지는 예술이다. 점, 선, 면의 요소로 주어진 캠버스의 크기를 나눠 그림의 주제나 배경이 들어갈 위치를 잡고 표현한다. 2차원 평면에서는 한 면만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얼굴을 그린다고 했을 때, 내가 보는 얼굴의 한쪽 면, 앞모습 혹은 옆모습, 비스듬히 바라본 모습 중에서 하나의 모습만 담을 수 있다. 모든 평면 위에 그려지는 그림은 한 번에 한 면만 볼 수 있고 동시에 여러 면을 볼 수는 없다.
반면 3차원 공간에는 모든 면을 볼 수 있다. 점과 선은 없다. 단지 입면체만 존재할 뿐이다. 건축의 평면도를 기억하는가? 선으로 그린 도면이지만 근본은 위에서 바라본 벽면을 똑바로 내려다본 그림이다. 따라서 건축 도면에 의해 해석된 그림에는 선이 없다. 또 다른 해석으로 선은 어쩌면 누워있는 검정 사각기둥일지도 모른다. 기둥끼리 서로 만나 공간의 뼈대를 구축하고 있을 것이다. 교차점은 위에서 바라본 사각기둥일지도 모른다.
그럼 결국 그림 같은 집이란 어떤 누군가의 그림을 3차원의 공간으로 물체화 시킨 것이 아닐까?
사진만 놓고 보면 '에엥? 몬드리안이 건축도 했어?' 할 수 있겠지만 이 건물은 네덜란드의 게리트 리트펠트라는 건축가이자 가구 디자이너가 설계한 슈뢰더 주택이다. 슈뢰더 주택은 몬드리안의 그림의 3차원 입체판과 같다. 몬드리안과 함께 데스틸 운동에 참여함으로 영감을 얻어 공간을 구성할 때 균형 잡힌 색 분배와 공간 분할로 데스틸의 정신을 잘 드러내었다.
수평선에 관계하는 단 하나의 선은 수직선이다. 빛의 3 원색은 빨, 노, 파이다. 이 색들은 절대적이다. 다른 색은 이 원색의 조합으로 이루어지기에 절대적 색이라 할 수 없다.
공간을 구성하는 요소의 절대적 관계. 그렇다. 리트벨트는 이 절대적 관계로 데스틸이 추구하는 개념을 형상화한 상징적인 건축물을 지은 것이다.
슈뢰더 부인의 요구로 설계된 이 주택은 1924년에 완공되었다. 지금 우리가 보면 평범한 형태지만 당시 유럽의 1920년대 건물의 모습을 감안했을 때 이 건물이 던진 파격적 형태와 미적 기준은 완전히 저 세상에서 건너온 듯한 모습이 분명했을 것이다.
처음 이 건물을 의뢰할 당시 슈뢰더 부인은 아이를 셋 둔 과부였다. 그녀는 확고한 요구사항을 가지고 있던 건축주였고 가족적인 고려사항을 또렷하게 관철시킨 결과 모더니즘 건축가들이 지은 주택들 중 보기 드물게 가사노동과 아이들의 생활이 편리한 주택이 되었다. (실제로 아이들이 커감에 따라 공간을 구획할 수 있도록 가변성을 요구하였다.)
후에 이 건물 또한 유네스코의 지정으로 문화재로 등록되었는데 근대건축의 시작점이라 말하는 꼬르뷔제의 빌라 사보아와는 건축주의 만족도에 있어서 사뭇 결과가 다르다. 건축주로서 슈뢰더 부인은 그녀만의 기준과 확고한 공간적 요구를 스스로 끝까지 관철하였고 건축가도 자신의 건축 철학을 고수했지만 건축주의 요구 또한 놓치지 않고 잘 반영한 결과라 생각한다. 요즘 말로 건축주와 건축가의 케미가 잘 맞았다고 할 수 있겠다.
‘임과 함께’의 후렴구 가사는 다음과 같다.
‘멋쟁이 높은 빌딩 으시대지만, 유행 따라 사는 것도 제멋이지만, 반딧불 초가집도 님과 함께라면, 나는 좋아 나는 좋아…’
우리 모두가 각자 사는 삶이 다르듯 서로 다른 삶이 담길 공간의 형태 또한 다양해야 한다. 오늘날 주거공간의 미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집값이 아닐까? 물론 내가 소유한 집의 집값이 높다면 그건 정말 기쁜 일이다.(요즘처럼 너무 높아도 문제지만)
그러나 그 집값의 가치를 결정짓는 요인이 단지 대기업에서 공급하는 몇 평짜리 아파트가 아니라 나와 내 가족이 누릴 안락한 공간이었으면 좋겠고, 주변의 학군과 학원가가 아니라 좋은 이웃과 다양한 삶을 나눌 수 있는 열려있는 동네였으면 좋겠다. 획일적이고 일률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힌 집자랑이 유행이고 그것을 따라사는 것도 제멋이지만, 사랑하는 이와 함께할 진정한 공간을 찾는 일에 가치를 두는 즐거움을 회복하면 좋겠다.
기억했으면 좋겠다. 슈뢰더 주택을 시대를 뛰어넘는 명품으로 만든 건 대기업 브랜드가 아니라 당시 무명이었던 건축가의 인정받지 못했던 새로운 시대를 향한 철학이었고, 주변 학군을 따지는 학부모의 시각이 아닌 세 아이를 위한 따듯하고 아늑한 집을 갖기 위한 한 과부의 요구였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