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학사전-거실
"거실은 집의 심장이다. 그곳에서 가족의 맥박이 뛰고, 일상의 리듬이 만들어진다."
- 크리스토퍼 알렉산더, 『패턴 랭귀지』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안방에만 TV가 있었다. 거실은 피아노와 오디오 그리고 3인용 소파와 큰 화분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7시에 칼 같이 들어오시는 아버지와 저녁식사를 하고 각자의 방에 있다가 안방에 모였다. 함께 9시 뉴스를 보면서 과일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릴 적 내게는 온 가족이 함께 있었던 안방이 거실이었다.
거실은 가족의 성장과 함께 변한다. 결혼 후 아이가 태어난 후에는 거실에 매트가 깔렸고, 유아기에는 장난감이 가득했다. 초등학생이 되면서 좌탁이 하나 들어왔고, 아이들이 성장한 지금은 거실 한쪽에 로잉 머신이 자리 잡게 되었다. 거실은 그렇게 가족의 소소한 역사를 담아간다.
나이가 들면서 거실에 대한 생각도 변했다. 젊었을 때는 멋진 거실을 꿈꿨다. 세련된 인테리어, 좋은 가구, 감각적인 소품들. 하지만 이제는 편안한 거실이 더 좋다. 푹신한 소파, 따뜻한 조명, 아늑한 분위기. 거실의 가치가 미적 완성도에서 분위기와 편안함으로 바뀌었다.
거실은 소파를 어떻게 놓느냐에 따라 공간의 위계가 달라진다. 여러 변화를 거쳐 지금 우리 집은 주방에서 요리하거나 설거지할 때도 TV를 볼 수 있게 거실창에 수평하게 두었다. 자연스럽게 TV는 거실 창문 앞에 놓였고, 좌측 벽엔 그림, 우측 벽엔 스탠드 조명을 둘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 배치는 대청마루를 모방한 것이다. 소파에 앉으면 하늘이 보이고,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바로 맞을 수 있고, 양측에 벽이 있어서 위요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건축을 배워서 인지, 집에서는 애매하게 열린 세미-퍼블릭 공간이 싫거나 없으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거실은 집에서 가장 먼저 손님에게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현관을 들어서면 바로 거실이 보인다. 그래서 거실은 항상 어느 정도 정돈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완벽하게 깨끗할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의 체면은 유지해야 한다. 이것이 거실의 이중성이다. 가족의 사적 공간이면서 동시에 타인에게 열린 공공의 공간.
내가 경험한 서구 주택의 거실 문화는 많이 달랐다. 유럽의 오래된 집들을 방문해 보면, 거실은 격식을 갖춘 응접실에 가까웠다. 평소에는 잘 쓰지 않고, 손님이 왔을 때만 여는 공간. 가족의 일상보다는 사교를 위한 공간이었다. 반면 한국의 거실은 가족의 일상이 펼쳐지는 곳이다.
코로나 시기에 거실의 의미가 더욱 커졌다. 재택근무를 하게 되면서 거실은 사무실이 되었고, 온라인 수업 때문에 거실은 교실이 되었다. 각자의 공간이 부족한 집에서 거실은 유일한 공용 작업 공간이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거실의 다양한 변화 가능성을 강제적으로 경험했다.
거실은 집의 중심이지만, 진짜 중심은 공간이 아니라 그 안을 채우는 사람이다. 집의 거실이라는 공간이 의미를 갖는 것은 그곳에 가족이 모이기 때문이다. 빈 거실은 그냥 열린 방일뿐이다. 사람들로 채워질 때, 대화로 가득 찰 때, 웃음이 울려 퍼질 때 비로소 거실은 진정한 우리의 거실이 된다.
가족이라는 몸 안에서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마음의 심장과 같은 그런 곳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