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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shlee Apr 20. 2016

건축가의 주유천하 IV 서울 경희궁

열아홉. 위치, 이름조차 생소해진 적막한 마지막 궁궐, 慶喜宮경희궁

경희궁의 아침
경희궁의 아침 조감도

10여년전 경희궁을 마치 앞마당 처럼 사용 한다는 주상복합아파트와 오피스텔의 이름으로 경희궁에서 200m도 채 안되는 위치에 고층 주거공간이 섰다.

이것 참....

10년이 흐른 뒤에도 다를게 없다.

이번엔 100m안쪽으로 돈의문 뉴타운이라고 약 600세대의 아파트 단지가 2017년 목표로.

慶喜宮경희궁은 숙종과 경종이 태어나고

경종,정조,헌종이 즉위했으며

숙종,영조,순조,인헌왕후,인선왕후,인경왕후,선의왕후가 승하한 곳이다.


이렇듯 경희궁은 조선후기 정치중심무대로서 어느 궁궐에도 뒤지지 않는 비중과 중요성을 간직한 궁궐이다.

그래 창덕궁과 창경궁을 동궐이라 부르고 그와 짝을 이루어 경희궁을 서궐이라 일컬으며 인조 이후 역대 왕들이 당시의 법궁인 창덕궁과 이곳을 번갈아 오가며 정무를 보고 생활을 영위하였던 것에서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궁궐이 아닌 제례공간으로 종묘에 그 자리를 넘겨주고 기억속에서 사라진 궁궐이 되어버렸다.

사직단처럼 서촌전체을 여행하지 않는다면 경희궁을 따로 찾는 이는 아마 적을 것이다.

이제 한양의 마지막궁궐인 경희궁으로 가 본다.


선조의 첫번째 부인 의인왕후가 자식을 못 낳자 후궁 공빈 김씨가 아들을 둘 낳으면서 뜬다.

임해군, 광해군.

임진왜란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둘째아들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된다.

1600년 중전 의인왕후 별세하자

1602년 두번째 중전이 된 인목왕후가

1606년 영창대군을 낳습니다.

이미 세자는 후궁의 자식이 등극했는데 적자가 태어났으니 조선 최대의 정치싸움이 예고된다.

영창대군 3살에 지켜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얼떨결에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중전의 아들이 살아 있고 친형인 임해군도 있으니 걱정이다.

1609년 친형에게 사약을 내린다.

9살 적자 영창대군은 1614년 증살.

아직도 11명의 왕자가 생존해 있다.


전란이후 영창대군의 집(경운궁 후에 덕수궁)으로 이궁을 한 새로운 왕궁을 물색한다.

1617년 14명의 형제중 다섯째 동생 정원군의 집이 어진왕이 산다는 인왕산자락에 왕의 기운이 있다고 한다.

가뜩이나 취약한 정통성 때문에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우던 광해군은 이 말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마침내 그 집을 몰수하여 궁을 짓게 되니 이것이 慶德宮경덕궁, 훗날의 경희궁. 1620년


1617년에 시작된 경덕궁 공역은 순조롭지 못했다.

인경궁과 동시에 진행하였던 까닭에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619년에는 인경궁의 공사를 중지하고 경덕궁 공역에 집중토록 하여 이듬해 10월에는 대부분의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끊임없이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들과 첨예하게 대립하던 광해군은 결국 경덕궁으로 이어를 준비 중이던 1623년3월12일에 정원군의 아들 綾陽君능양군 쿠데타인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새 궁궐에는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비운의 길을 걷게 된다.

역사의 아이러니를 안고 출발한 경덕궁은 인조 이후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임금들이 머물면서 왕궁의 구실을 착실히 해냈다.

인조는 즉위 다음해인 1624년에 이괄의 난을 겪어 충청도 공주까지 피난을 갔다가 보름 만에 돌아온 인조는 난으로 크게 훼손된 창덕궁과 창경궁으로 입궁하지 못하고 경덕궁에 임어하여 9년을 생활했다.

이로써 경덕궁은 이궁의 지위를 갖게 되었고, 동궐에 대비되는 서궐로 불리면서 조선 왕조의 대표적인 궁궐로 자리잡아가며 조선 후기의 새로운 양궐체제가 확립된 것이죠. 특히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다.

경희궁에는 정전인 崇政殿숭정전을 비롯하여 편전인 자정전,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등 10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었다.

1820년대 경희궁 전경을 그린 西闕圖案서궐도안을 보면 당시 120여 채가 넘는 경희궁의 규모를 알 수 있다.

서글픈 역사를 안고 있는 경희궁의 말로도 비참하다.


1910년 나라가 망하면서 경희궁에 일제는 자식이 다니는 총독부중학교를 세운다.

이 학교는 1915년 경성중학교로 개칭되었다.

왜놈들은 다시 경희궁지 25,000평을 떼어나 전매국 건립하여 왕궁에 담배 제조공장을 차리게 된다.

1926년  숭정전을 매물로 내놓는다.

서울에 있던 일본사찰인 조계사(조동종)가 사들여 장충동으로 이전한다

(한옥은 이렇게 분해해서 다시 조립이 가능하다).

해방 후 이 일본사찰 자리에 동국대학교가 들어서면서 ‘도를 바르게 깨우치는 집’인 正覺院정각원이라는 법당이 된것.

정각원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0호.

이제 ‘존경받는 정치를 하던 숭정전’에서 스님이 목탁을 치는것이고.

1988년 전문가들이 동국대로 가서 정각원의 해체 이전 가능 여부 조사했는데 내부는 법당에 맞게 개조됐고 너무 낡아 무너지게 생겨 이전불가로 결론이 났습다.

1928년 왕의 집무실인 신나는 정치를 하던 집, 흥정당은 일본사찰에 매되어 광운사로 이전 복원하지만 광운사 폐사된다.

노란색 용포를 입고 활을 쏘는 황제의 모습이 한 마리 학과 같다는 황학정은 사직단 뒤로 이전 활터가 되었다.

황학정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5호.

해방 후 경희궁지의 일본인 학교는 서울고등학교가 되었다.

이렇게 1920년대를 거치면서 경희궁은 일부 회랑만을 남긴 채 우리 곁에서 영영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전부 팔아먹어 이제 이곳이 왕궁이라는 사실도 망각되고...

이렇게 터만 남다시피 했던 경희궁이 최근 우리에게 다시 모습을 나타낸다.

해방 이후 서울중·고등학교가 들어섰던 경성중학교터는 1978년 이 학교가 이전하면서 현대건설 소유가 되었고 현대건설은 20층 규모의 사옥 신축에 나서지만 인문학도들의 강력한 반발해 그것을 1984년 서울시에서 매입한다.

당시 염보현 시장.


1932년 조선총독부는 이토 히로부미의 공적을 기리고 그의 혼을 모신다며 서울 한복판에 이토의 이름을 딴 박문사란 절을 세우며 불도를 닦는 가람은 경복궁내 준원전을 옮겨다 지었고 정문은 경희궁의 흥화문을, 정문 옆 돌담은 광화문을 허물 때 나온 석재를 가져다 썼다.

해방 후 박문사는 철거되고 신라호텔이 들어서고.

그래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은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하고 있어 반환한다.


1988년 경희궁 1차 복원.

흥화문 터에는 이미 구세구회관이 자리하고 있어 황당하게 서쪽으로 100m 물려 복원했다.

그나마 흥화문만 진짜고 나머지는 가짜.

왕궁의 정문은 2층 누각으로 짓는게 원칙이지만 유사시에 잠시 피해 머무는 궁이라 위계를 낮춰 흥화문만 단층이다.

흥화문 앞으로 서울역사박물관 드나드는 차들이 줄 지어 들락날락하고

1994년 서울 정도 600년을 맞아 경희궁지에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 분관 건립한다.

복원공사 중단.

서울시 의회는 왕의 침전인 회상전 등의 복원 비용 164억 전액 삭감한다.

그 이유는 국가지정 문화재는 70%는 국가, 30%는 지자체 부담이 원칙이지만 문화재청 예산 지원이 중단되자 서울시도 예산 지원 중단한 것이다.

2002년 서울시가 126억 투입.

숭전전, 편전인 자정전, 영조의 초상화를 모셨던 태령전 복원하고 태령전 뒤편에는 ‘서암’이라 불리는 거대한 바위가 있는데 원래 이름은 왕의 바위인 ‘왕암’이었지만 ‘상서러운 바위’라는 뜻의 서암으로 개명한다.

2002년 경희궁지에 다시 서울역사박물관 개관해 원래 7만평의 경희궁은 이제 달랑 1만평 남았다.

왕궁을 일제만 훼손하는 건 아니다.


2002년 경희궁 앞뜰에서 건축가 렘 쿨라스가 연출한 Prada Transformer 프라다 트랜스 포머 라는 세계적인 이벤트가 열린다.

이걸 보고 또 사람들 열광했다.

바로 뒤에 경희궁이 뭔지 알까....

담당 종로구청이 받은 임대료는 50,000,000 원.

왕궁 앞마당에서 명품을 판것.

Prada Transformer

1944년 일제가 경희궁에 조성한 방공호 발견해 지금 서울역사박물관이 수장고로 사용 중이다

길이 110m의 폭 9m, 높이 5.8m 2층.

경희궁 훼철 4백년사를 다 보여주는 건물이다.

경희궁은 결코 자랑하지 않고 우리가 하는 꼴을 지켜보고 있다.

경희궁의 회랑 지붕이 최고다.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 2가 1번지

사적 제2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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