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rchitect Y Oct 08. 2019

일반인문 CXVII 가갸날, 국어연구학회, 말모이

; 한글날 93돌에...

10월에는 유독 기념할 일이 많다. 

달력만 봐도 기념일이 빼곡하다. 

국군의날, 노인의날, 개천절, 한글날, 문화의날, 임산부의날, 경찰의날, 금융의날…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10월은 독립기념일 등 유독 뭔가를 기념하는 날이 많다. 

내일은 한글날 이다.


잘 알고 있듯 10월9일 한글날은 훈민정음 해례본에 적혀 있는 '세종 28년(1446년, 창제; 1443년) 9월 상한'이라는 구절을 근거로 정해진 것으로 한글학회에서 상순의 끝 날인 음력 9월10일을 훈민정음 반포일로 잡고, 이를 다시 양력으로 환산한 것이다.

동아일보에 게재된 가갸날 기념행사 사진(왼쪽). 국립한글박물관 내 전시되어 있는 가갸날 기념행사 모형(오른쪽)

1926년 음력 9월 29일 가갸날이라는 이름을 시작으로 1928년 한글날로 개칭된 후 1931년 양력(율리우스력*)으로 환산 10월 29일에서 다시 1934년 양력(그레고리력*)으로 다시 환산 10월28일로 사용하다 1940년 안동에서 훈민정음 혜례본의 발견(正統 十一年 九月 上澣 정통 11년 9월 상한)으로 10월9일로 알게되 광복후 1946년에는 한글날을 법정공휴일로 지정하였고 1970년 공식 공휴일이 되었지만 1990년에 휴일이 많은 것은 산업 발전에 장애가 된다는 경제 단체의 문제 제기로 단순한 기념일이 되었다, 2006년부터 한글날이 국경일로 정해졌습니다.

(*카이사르의 이름을 딴 율리우스력은 평균역년을 365.25일로 오차가 1년에 674초, 그레고리우스 13세의 이름을 딴 그레고리력은 365.2425일로 오차가 1년에 +26초로 두 기준의 차이는 13일. 조선이 그레고리력을 도입한 것은 1896년)

훈민정음 혜례본 SBS

훈민정음 혜례본은 국보 제70호이자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훈민정음 28자를 세상에 반포할 때에 찍어낸 것으로 훈민정음을 설명한 일종의 해설서이지만 한문으로 되어있다.


한글은 많은 수난의 역사를 지나며 생채기가 수 없이 많이 생겨 있듯 한글어학회와 큰사전도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 많은 일이 있었다.

올해 말모이라는 영화를 통해 한글 사전을 만들려는 어학회의 노력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기회가 있었다.


1908년 8월31일 서울 돈의문 밖 봉원사에 하기 국어강습소 졸업생들을 비롯해 우리말 연구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기울어가는 국운을 한탄하며 겨레 말글을 지키고 살려야 할 필요성에 공감했고 이 자리에서 주시경 선생을 중심으로 ‘국어연구학회’가 탄생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학회의 탄생이었다.

학회 이름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한글학회가 아닌 국어연구학회였다.

1935년 표준어 사정 제1차 회의에 참석한 위원들(왼쪽) 한글학회 창립터에서 1959년 기념사진을 찍은 한글학회 회원들(오른쪽)- 국가기록원

이후 1911년 배달말글몯음 朝鮮言文會, 1912년 한글모, 1919년 조선어연구회, 1931년 조선어학회란 이름을 거쳐 1949년 지금의 한글학회로 명칭을 바꿨다. 

이때의 개명은 남쪽의 한국과 북한이 ‘대한’과 ‘조선’으로 말을 달리 사용하는 분단 현실도 한 원인이었다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한글 새소식’ 552호.


영화 말모이는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을 중심으로 우리에게도 사전이 생기는 이야기를 열고 있다.

조선어학회 사건은우리 민족의 질곡의 역사 중에도 한글과 우리 글자, 우리말, 국어의 수난사중  우리말을 절체절명의 위기로 몰아갔던 사건이었다.


그 발단은 다소 엉뚱한 곳에서 시작됐다.

그해 여름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한 청년이 조선총독부의 지령인 단발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붙잡혔고 불순분자 혐의로 청년의 집을 수색하던 일제 경찰은 그의 조카가 2년 전에 쓴 일기장에서 글귀를 찾아낸다.

 “오늘 국어를 사용하다가 벌을 받았다”

일제강점기였던 당시는 일본어가 곧 국어.

일제 경찰로서는 ‘국어인 일본어를 썼다’고 해서 벌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오자 담임교사를 내사했지만 조사 결과 실제론 일본어가 아니라 조선어를 사용했다고 해서 벌을 받은 것이었다.

일제는 ‘조선어를 국어라 가르쳤다’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 핍박했고 대상자로 지목된 교사는 1년 전 경성으로 옮겨 조선어학회 일을 보고 있었다는것에 집중했고 이를 빌미로 일제는 조선어학회를 대대적으로 수색해 관계자 검거에 나선다.

이때 이윤재,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장지영, 안재홍, 이은상 선생 등 당대의 우국지사들이 대거 투옥되었다

1941년 무렵의 사전편찬실 모습(왼쪽),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연행해 재판을 진행하는 일제(오른쪽) - 국가기록원
조선어학회사건 판결문. - 국가기록원
우리말 대사전


1947년 제1권을 펴낸 뒤 순차적으로 1957년 10월9일 마지막 제6권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큰사전의 출발이 일제 강점기이던 1929년 10월 조선어사전편찬회를 구성하면서 비롯됐으니 28년에 걸친 대장정이었죠.

영화 말모이에서는 서울역 창고에서 찾은 사전의 원고를 극대화된 영화적 요소로 사용하기 위해 원고를 일제 경찰에게 빼앗기기 전 숨긴것으로 그리고 있는데 확인된 바는 아닙니다


조선어학회에서 ‘한글마춤법 통일안’을 발표한것이 1933년 10월로, 이어 1936년 10월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펴냈습니다.

어떠한 과정으로 허가를 받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명목상 1940 조선총독부로부터 조선어사전(나중의 조선말 큰사전)의 출판을 허락을 받았습니다.

일제의 감시와 간섭 속에 어렵사리 꾸려오던 편찬작업은 위에서 언급한 1942년 부터 심각하고 노골적인 탄압을 받았다.


10월 들어서부터 노골적인 탄압을 받았다.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진 것이다. 학자·후원자 등 30여 명이 체포, 구금되고 사전 원고는 압수됐다. 당시 원고는 16만여 어휘를 풀이까지 마쳐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었다. 

일제는 이 원고에서 ‘조선’ ‘임진왜란’ ‘무궁화’ 같은 우리 민족성을 드러내는 말의 설명을 놓고 꼬투리를 잡았다. 

또 ‘경성’은 풀이가 긴데 ‘동경’은 왜 짧으냐 등을 따지며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핍박했다.

-우리시대의 언어게임, 고길섶


광복을 맞아 편찬작업 재개에 나선 조선어학회는 또 다른 시련 앞에서 망연자실했다. 

사라진 원고.

조선어학회 사건 때 증거물로 압수돼 이리저리 이송되는 과정에서 분실한 것. 

천신만고 끝에 1945년 9월 서울역 화물창고 구석에서 잠자고 있던 원고뭉치를 찾아 이를 토대로 하고 일부 자료를 보완해 1947년 한글날을 맞아 ‘조선말 큰사전’ 제1권이 드디어 세상에 나왔다. 

 1945년 10월 6일 서울역 화물창고에서 찾은 원고 기사 -자유신문(왼쪽) 1941∼42년에 작성한 원고 수정본 제3권- 국가기록원(오른쪽)

이어 해를 거듭하며 제2권(이때부터 ‘큰사전’으로 이름을 바꿨다), 제3권이 순차적으로 나왔으나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큰사전 편찬은 또다시 기약없는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조선어학회에서 이름을 바꾼(앞에서 이야기한 내용) 한글학회는 휴전협정 뒤 사전편찬 재개에 나서지만 복병을 만나게 된것이다. 

1953년 ‘한글맞춤법 간소화 안’- 「국무총리 훈령」 제8호(1953. 04. 27. )

그동안 써오던 맞춤법을 버리고 소리 나는 대로 적는다는것이 핵심이다. 

가령 ‘꽃이 예쁘다’는 ‘꼬치 예쁘다’로, ‘옳다’는 ‘올타’라고 적는식이다

‘한글파동’으로 부르게 된 이 사태는 거센 국민적 논란과 저항 끝에 1955년 이승만 대통령의 포기 담화 발표로 가라앉았다. 


이후 한글학회는 사전 편찬 마무리에 박차를 가해 1957년 제4, 5권을 잇달아 낸 뒤 그해 한글날에 제6권을 펴냄으로써 비로소 큰사전 완간을 보았아 그 기념식을 겸하여  세종대왕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511돌 한글날 기념식을 시공관에서 가졌다.

한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것은 당시 한글학회 이사장이던 최현배 선생은 완간본 발간사에서 록펠러재단이 최대 원조자였다고 밝혔는데 록펠러재단은 8·15 광복 뒤 한국의 재건을 돕기 위해 한글학회의 사업을 선택해 지원했을 뿐, <큰사전>이 나오기까지 그 ‘작업’은 우리 손으로 만든 우리 노력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1∼12월에 베껴 쓴 제6권 원고의 일부(왼쪽), 1953년 전주에서 수정한 제5권 원고의 일부(오른쪽)  - 국가기록원
<우리말 큰 사전> 제1권∼제6권 전권(1957년) -국가기록원

이번 주말은 시간을 내어 2012년 조성된 서촌(사직로와 신문로 사이에는 정부종합청사와 세종문화회관)의 한글 가온길을 돌아보려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일반인문 CXVI 도량형 度量衡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