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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Sep 17. 2021

건축 이야기 XXIV 아파트 Apartment 02

; 아파트 이야기 두번째, 일제침략기에서 1970년 초기 아파트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19년 현재, 대한민국의 아파트 주거 비율이 1,000만가구를 넘어 62.3% 에 이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반 이상이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어쩌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일까요?


앞에 올린 Prologue격의 첫번째 이야기에 이어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대한민국의 아파트 건설 이유와 한국인들의 아파트에 대한 열망을 늘어놔 봅니다.


왜 아파트가 서울의 지배적인 주거형태가 됐으며, 한국의 중산층은 왜 아파트에 집착하느냐에 대한 질문에 땅이 좁고, 인구밀도가 높아서 아파트라는 거주형태의 선택이 불가피하다는 한결 같은 답을 할것입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지난 70년간 대한민국의 주거형태는 지역간 불균형 개발의 결과인 수도권 집중화에 따른 수급 불균형과 공급시차, 경제성장에 따른 소득향상과 과잉 유동성, 건설경기 부양 유혹, 부동산 투기심리에 무력했던 제도, 정책 미비 등의 요인들에 의해 변동을 겪었고 지금도 그 중심에 있지만 민간자본에 크게 기댄 주택시장 구조는 주택을 투기대상으로 보는 심리를 키우며 주택부족 문제를 구조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은 미흡합니다.

결국 아파트는 돈이나 주식과 비슷한 환금성을 가진 재화인 동시에 현대화의 매개체 또는 수단으로 현대사회의 모습을 압축된 형태(compressed modernity)로 보이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70~80년대 산업화를 담당한 ‘권위주의 정권+철저한 자본주의 기업+상위 계급화 욕망의 중산층’의 깨지지 않는 구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파트 공화국으로 가는 trigger인 ‘1972년 250만호 건설계획’이 시행되기 대한민국의 아파트의 시작점은 일제 침략기로, 일제가 회현동에 3층짜리 공동주택(미쿠니아파트)을 1930년에 지은 데 이어 1932년 충정로에 지하 1층, 지상 4층짜리 충정아파트(도요타아파트)를 지음으로 사람들에게 아파트의 형태가 알려지게 됩니다.

출처 : 중앙일보

최초의 미쿠니 아파트가 공동화장실과 식당, 오락실 등 각종 부대시설을 갖춘 `관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면 지금의 아파트의 개념으로 지어진 건물이 충정아파트입니다.

당시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8층짜리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이었으니 충정아파트는 바로 도시의 랜드마크로 떠올랐습니다. 

‘아파트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랑스의 건축가이자 도시계획가 르 코르뷔지에가 주창한 미래주택 개념에 따른 획기적 건축물이었습니다.

건물 중앙이 비어있는 중앙정원형 5층 아파트인 충정아파트는 일본인 건축가 도요타 다네오가 지은 건물로, 한국전쟁 당시에는 유엔(UN)군의 임시숙소로 쓰였다가 1960년대에는 관광호텔로 운영되기도 했습니다.

이 아파트는 현재도 계속 남아서 실제 거주하는 사람이 있는 아파트로 기능을 하고 있는데, 서울시에서는 이를 ‘미래유산’으로 지정하고 있습니다.

현재 가구수는 총 50가구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충정 아파트

작년(2020년) 넷플릭스의 10부작 웹드라마인 ‘스위트홈’에서 아파트, 그린홈의 모티브가 충정아파트와 회현아파트였습니다.

스위트홈 드라마 촬영이 일부 이뤄지기도 했던, 1970년 5월 준공된 회현제2시민아파트는 무허가 건물을 정비하기 위해 총 447동의 시민아파트를 건립했는데, 현재는 모두 철거되고 유일하게 남아있는 곳으로 재건축이 아닌 리모델링 사업으로 명맥을 유지할 전망입니다.

영화 스위트홈 중

광복 후 우리 손으로 지은 최초의 민간아파트는 1958년 중앙산업이 성북구 종암동에 세운 종암아파트(정식명; 종암 아파트먼트 하우스)로 17평짜리 4층 건물에 152가구가 살았습니다.

잘나가는 기업인, 정치인, 예술가들이 입주했으며 최초의 옥내 수세식 화장실과 입식 부엌이 장안의 화제였는데, 특히 양변기로 대변되는 화장실 문화의 대혁명을 알린 옥내 좌식화장실은 지금이야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같은 변기에 앉아 일을 보는 해괴망측한 서양문화의 무분별한 도입’이라는 비판이 쏟아지기도 했습니다.

이후 1995년 종암선경아파트로 재건축되었습니다.

종암 아파트

1962년 안양으로 이전한 마포형무소 자리에 대한주택공사가 최고급 마포아파트(도화동 삼성아파트)를 건립합니다. 

당시 마포아파트 단지는 애초에는 10층짜리 고층아파트로 계획하였지만, 당시 전기 부족으로 엘리베이터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이 생기자 설계 층수를 낮추어 6층, 10개동 642세대로 전국 아파트 중에서는 최고로 많은 가구 수를 보유하였습니다.

이는 당시 서울의 진보성향의 중산층사이에 일약 선망의 대상이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입주 초기 연탄보일러 중독사고가 연발하고 부유층 범죄의 표적이 되기도 했지만, 아파트주변에 담장을 쌓아 외부와 격리시키는 ‘자폐적 공간’을 조성하자 분위기가 반전되었고 세계 유일의 ‘한국형 아파트 단지’의 시작을 알리는 런칭이 되었습니다.

서울로의 폭발적인 인구유입은 주택난을 부채질하자, 김현옥 시장(1966~70년 재임)은 도심과 가까운 지역의 산비탈과 국공유지변 하천부지를 꽉 메운 토막집과 판잣집을 밀어내고 본래 철거민 수용용이었던 시민아파트를 지었지만 1968~69년에 지은 시민아파트는 전시행정의 표본으로 어김없이 산허리 또는 산등성이에 지어졌기때문에 당시 지은 낙산 시민아파트 등 대부분 시민아파트는 경관훼손 사례로 낙인 찍혀 1990년대 철거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 90년대 후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주상복합아파트의 원조격인 세운상가*와 낙원상가, 청량리 대왕코너(롯데백화점 청량리점)는 도심재개발 차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세운상가 아파트는 1960년 후반부터 동부이촌동 한강맨션이 들어서는 1970년대 초까지 상한가를 쳤습니다.

18~25평의 작은 평수였지만 대규모 상가와 엘리베이터를 갖춘 이 아파트에 사회 저명인사들이 앞다퉈 입주했고 사대문 안에 밀집된 직장에 걸어서 출퇴근할 수 있는 상류층 집결지였습니다.

세운상가는 세계 최대 규모의 집창촌으로 알려졌던 ‘종삼’과 무허가 판자촌 철거로 얻어진 1만 3000평의 공지 위에 종로~청계천~을지로~퇴계로까지 무려 1km를 8개의 건물이 남북으로 관통하는 도심의 괴물이었습니다.

아파트의 고급화의 시작은 동부이촌동 한강맨션에으로 대한주택공사가 1970년에 중앙집중식 난방을 채택한 첫 호화 아파트로 그 명칭도 시민아파트의 싸구려 이미지를 벗으려고 ‘아파트’ 대신 ‘맨션’이라고 붙였고 탤런트 강부자, 고은아, 문정숙, 패티 김 등 연예인들이 줄지어 입주했습니다.

이러한 아파트의 고급화는 현대를 비롯한 대형 건설업체들이 아파트사업에 뛰어드는 터닝포인트가 되어 대한민국은 아파트 공화국으로의 길로 들어서는 흐름은 1970년 4월8일 마포구 창전동 와우아파트의 붕괴로 맞은 위기에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다음에 이어 갑니다.


*세운상가

https://brunch.co.kr/@architect-shlee/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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