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비운의 왕, 광해 02
光海君 광해군 1575~1641 재위 1608~1623
조선의 제14대 왕 선조의 정후 의인왕후가 아들을 못 낳는다.
후궁 공빈 김씨는 임해군과 광해군 아들 둘을 출산한다.
뒤늦게 계비 인목왕후는 영창대군 출산하게되는데 적자지만 너무 늦었다.
서자이면서 차자인 광해군을 세자로 옹립한다.
당시 북인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적자인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로 분당한다.
갑자기 선조 승하하는 바람에 1608년 광해군 얼떨결에 제 15대 왕에 오른다.
대북파의 영수 이이첨(본관 광주, 1608년 중시문과 장원, 대제학).
이 이첨은 유능했었는지는 몰라도 극히 잔인한 성격을 가졌다.
그들 일당은 정권을 잡자마자 광해군의 등극을 반대하던 전 영의정 유 영경부터 잡아 죽이며 소북파를 숙청한다.
이 이첨, 유 희분을 필두로 한 대북파가 장기 집권하면서 다른 정파는 일체 용납도 안 했을뿐더러 철저히 탄압해서 타 정파의 원한을 극대화하기 시작한다.
대북파의 독주는 결국 광해군에게 이이첨과 대북파들에게 권태감를 가져오게 했고 전횡을 일삼는 이 이첨에게 염증을 느낀 광해군은 사돈이며 이 이첨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던 박 승종에게 영의정직을 넘겨주고 이 이첨을 견제했다.
소북파 거두 박 승종은 원만해서 이이첨과 같은 강경책을 배격하고 광해군의 뜻을 따라 여러 당파를 서서히 기용해 나갔다
중앙의 요직이 아니라변방의 원님같은 외직이지만 몇몇 서인들이 광해군 왕조에 발을 들여 놓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며 서인들도 서서히 급을 높여 가며 이 이첨의 대북파를 견제할 세력으로 성장해 나갔다.
하지만서인들중에 이 귀, 김 류, 이 서등은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불만을 품고 광해군을 타도하고 권력을 장악하자는 음모를 꾸몄다.
군사를 일으킨 평산부사 이 귀는 평산에 부임한 이래 호랑이를 잡는다는 이유로 자주 군사를 동원해서 훈련을 했다.
이귀는 눈이 부리부리하고 턱이 뾰족하여 성질이 매우 급했다고 전해오는 기록이 정확함을 보여준다.
부인이 죽은 상중에도 모반을 도모하러 부지런히 바깥 나들이를 했었다.
여기에 1608년 세자봉작에 대한 현장실사를 위해 파견된 명의 사신을 회유한 광해 지지자들은 임해군을 진도에 유배보내고 다시 강화 교동으로 이배되었다가 다음해 돌연 의문사한다.
1613년 대북파에의해 유도된 7서의옥(서양갑을 위시한 7인의 서출이 영창대군을 옹립하고자 역모를 꾸민 사건)에 의해 영창대군은 서인으로 강등되어 강화에 위리안치되었다가 대북파에의해 살해된다. 이 사건과 연류시켜 인목대비 마저 서궁에 유폐된다.
일련의 이어지는 사건으로 광해는 정치적 존립이 어려워진다.
정조 치세 24년간 모반의 무고가 24년간 105건이었으나 광해군 재위 15년간 무려 443건의 역모 고발이 있었다.
절대 권력을 잡은 대북파가 정적을 처치하기 위해서 해댔고 또 대북파를 타도하기 위해서 반대파가 해댔던 모반의 무고가 극성을 떤 것이다
이렇게 모반의 밀고가 많았으니 나중에는 광해군이나 집권 대북파가 모반 보고에 둔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루머가 무성해졌지만 이 귀는 음모를 추진하면서도 대담하게 한수 더 떠서 나는 억울합니다라는 역상소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1623년 3월 무시할 수 없는 모반의 정확한 정보가 입수되었다.
3월 13일 밤 광해군은 박 승종, 임 연, 윤 휘등과 어전회의를 열고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판단하고 다음 날 금부도사를 황해도 평산의 이 귀에게 보내 체포 압송하기로 결정하고 그 날의 회의를 끝냈다.
그러나 쿠데타 음모가 샌 낌새를 이 귀가 먼저 알아채고 선수를 쳤다.
이 귀와 장단부사 이 서가 호랑이 사냥을 핑계로 임지에서 각각 끝고 온 1,000명의 군사가 이 어전 회의가 있던 시각에 이미 한양 근교 연서역에 집결해서 진입을 준비하고 있었다.
연서역은 지금의 예일 여고 근처로서 여기에 정원군 시절부터 소유하고있던 능양군의 별장이 있었다.
능양군의 부친은 광해군의 배다른 동생인 정원군(임해군과 순화군등과 함께 세간에 악평과 원성이 자자했던 선조의 불량 왕자 3인방의 한 명)이다.
능양군과 반정의 핵심 인물 최 명길을 비롯한 여러 명이 이 귀를 이곳에서 맞아 밤이 깊어 갈 때까지 대기했었다.
밤이 늦어 움직인 병력은 뒤 늦게 홍제원(弘濟院 중국의 사신들이 성안에 들어오기 전에 임시로 머물던 여관)에서 함류한 이 서의 부대와 함께 그대로 도성안으로 진격했다.
그날 자정 한양 북방 창의문을 통과해서 밀려 들어온 반정군의 1,000명 병력이 한양 창덕궁에 쇄도하여 미리 내통하고 있던 궁궐 호위대장 이 흥립이 열어주는 궁궐문으로 몰려 들어가서 조선의 정권을 탈취했다.
쿠테타가 성공한 결정적 원인이 된거다.
반정군이 창덕궁으로 밀려오자 광해군은 내시의 등에 업혀 창덕궁 북쪽 담을 넘어 탈출했다.
야밤에 궁을 나선 광해군은 창졸간에 호위 내시의 등에 업혀 사복시 개천 부근(지금의 종로 구청과 한국일보 사이)醫官의관 安國臣안국신의 집으로 피신했다.
사복시 위치는 오늘날 종로 구청과 한국일보 중간이다.
그러나 며칠 뒤 광해군 은안국선의 고발로 궁으로 끌려 와서 독이 파랗게 오른 영창 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가 퍼붓는 갖은 모욕과 저주를 당했다.
반정군은 그래도 廢母殺弟폐모살제(仁穆大妃인목대비를 폐하고, 永昌大君영창대군을 죽인 것)라는 광해군의 패륜적 결함 문제를 반정의 명분으로 삼았기에 인조의 숙부인 광해군을 죽이지는 않았다.
대신 폐위 당한 광해군과 왕비,그의 아들 왕세자 부부는 강화도로 유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