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의 역사 읽기 III 조선사

셋.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비운의 왕, 광해 03

by Architect Y

유배후 일어난 비통함과 복권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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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년 3월 14일 새벽 황해도 평산부사 이귀와 경기도 장단부사 이서가 몰고 온 군사에게 기습당해서

1623년 5월 圍籬安置 위리안치(유배를 보낸 상태에서 가시 울타리를 친 집안에 가두어 둔다는 것)된 폐세자는 외부인들과 연계해서 탈출을 기획하고 다리미와 큰 가위를 이용해서 울타리 밑에 땅굴을 파고 도주를 시도하다가 발각되었다.

탱자나무나 찔레등의 가시나무로 아무리 두껍게 울타리를 만들어도 땅굴을 뚫지 않고도 울타리에 구멍을 내고 탈출할 수가 있어서 위리안치는 현실적으로 파괴가 극히 힘든 통나무나 돌담으로 둘러 싼 집안에 구금했었다.

그래 땅굴을 통해서 밖으로 나간 것은 성공했는데 순찰도는 포졸에게 발각이 된 것이다.

보고를 받은 인조는 한달 뒤 사촌 동생인 폐세자에게 自盡자진을 명했고 폐세자는 지시대로 목을 매고 자살했다.

폐세자 빈은 폐세자가 탈출할 때 나무에 올라가 집밖의 동정을 살폈는데 집 밖으로 나간 폐세자가 몇 걸음 못가서 체포되는 장면을 보자 충격을 받고 나무에서 떨어져서 기절을 했다.

그녀는 식음을 전폐하고 몸져누워 있다가 사흘 뒤 스스로 목을 매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하직하였다.


아들 부부를 잃은 충격으로 광해군의 아내 폐후는 얼마 못살고 다음 해 1623년 10월 세상을 하직하게 했다.

아내와 자식 내외를 잃은 광해군에게는 출가한 딸을 빼놓고는 혈혈단신의 외로운 신세가 되었다.

이미 땅에 떨어졌을만큼 떨어져서 불행의 밑바닥을 맛보고 있는 그에게 부인과 대를 이을 자식과의 이별은 쓰라린 고통을 주었지만 광해는 자신도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숨 막히는 하루하루를 그저 모질게 살아갔다.


광해군은 15년간의 재위기간보다 더 긴 19년간의 유배 세월을 그렇게 굴욕 속에서 살다가 쓸쓸히 죽었다.

본인의 실책이라하기에도 석연찮은 결과들과 함께 치적은 더욱 많았던 그를 반명 친청과 폐모 살제라는 명분으로 내쫓은 인조와 그의 일당인 서인 그룹들은 그만한 치적은 커녕 병자호란의 대 참변으로 조선을 몰아넣은 실수를 비롯해서 형편없었던 통치를 해서 광해군을 내쫓은 명분이 말이 안 되게 만들고 있다.

있어봤자 이미 모두 광해군의 몰락과 함께 운명을 같이했던 무리들이었지만 그래도 그가 暗君암군이 아니었던 탓에 세력 기반은 조금 남아 이들 중 광해군을 모시고 재기를 꾀한 인물들도 있었다.


광해군이 폐위 된 뒤에 제주에서 죽은 왕비에게 큰 오빠되는 유 희견이 있었고 그의 조카 유 효립이 모반을 꾀하다가 체포된 일이 있었다.

이들의 쿠데타 계획에 의하면 반정이 성공하면 그들은 일단 광해군을 복위 시켰다가 다시 그 왕위를 왕족인 인성군에게 물려주고 광해는 상왕이 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쿠데타 그룹에게도 광해군보다 다루기 쉬운 허수아비 역할을 잘 해줄 순진한 왕족이 더 필요 했던 것 같았다.

쿠데타가 성공했어도 광해군의 세월은 오지 않았을 것이었다.

유배 5년쯤 또 다른 모반이 있었다.

그 모반은 발각이 나서 금부도사가 반란 음모 조직과 내통한 광해군을 모시는 나인[내인-궁녀]들을 잡으러 오자 광해군은 문을 막아서며 슬피 울었다.

체포 대상이었던 愛英애영이라는 나인은 칼로 목을 찌르고 자결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이 사건 뒤 광해군은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철저히 식물인간처럼 지냈던것 같다.

폐위 뒤 무슨 말을 했는지 여러모로 알아보았지만 찾아 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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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십년의 세월을 강화도에서 살다가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반정 주동자 김 류의 아들 김 경징(강화도 방어 사령관격의 위치에 있다 청군의 강화도침공때 도주했다가 처형된 인물)에 의해서 교동도로 이동 구금 되었다.

광해군이 몰락후 굴욕과 고통의 유배 생활에서 탈출할 기회는 이때 딱 한번 있었다.

인조의 반명 친청책에 불만을 가진 청나라의 태종이 대군을 몰고 조선을 침공 했을 때였다.

그의 몰락을 가져온 친청책을 취해왔던 광해군이 어떻게 해서라도 친히 출병한 청의 태종에게연락을 넣어 구원을 요청했더라면 그 고통스런 유배생활에서 벗어났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 일이 없었던 것을 보면 실각 10여 년 동안 광해군 주변인의 철저한 숙청과 감시로 그런 헌신적인 일을 해줄 존재마저 소멸되어 버린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광해군에게 어떤 배려를 해줄만한 청측의 인간들도 보이지 않았다.

광해군 집권 시는 청의 누루하치의 시대였다.

이미 그는 죽었고 아들인 홍타이치[청태종]대로 권력이 세습되었으니 광해군과의 연계를 담당했던 청측 인사들도 모두 물러났을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아니 유폐형 유배 생활을 불안과 인내로서 버티는 동안 아들과 추종자들의 처참한 죽음을 몸서리게 겪었던 그는 거의 식물인간과 같은 심리상태가 되어 목숨을 걸어야하는 모험을 감히 생각지도 않았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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