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비운의 왕, 광해 04
유배후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들
광해군은 인조에게 쫓겨난 뒤 그가 역사의 기록에 남은 몇 마디 말 중에 한마디가 그래도 조카에게 왕위를 넘겨주어서 다행이라는 것이었다.
인조와의 혈연을 강조해서 구명을 시도하는 광해군의 애처러운 몸부림이 보인다.
그러나 죽음은 계속 그의 뒤를 쫓아 다녔다.
그를 끝까지 죽이려고 했던 사람은 아홉살의 어린 나이에 서럽게 죽은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였다.
어린 나이에 늙은 선조에게 시집을 와서 운 좋게 얻은 영창에 대한 애정은 부부 공히 각별하였다.
그런 핏덩어리를 어미의 품에서 떼어내 홀로 강화에 내쳤다가 끔찍한 죽음을 맞게 했으니 그 사실만 가지고도 충천된 원한을 가질 만한데 더해서 자신의 아버지 김제남을 역모로 몰아 죽였고 그리고 명색이 대비인 자신을 강등시켜서 궁중 밖으로 내 쫓아서 피눈물의 세월을 보내게 했으니 원한이 사무칠 수 밖애 없었다.
광해군에 대한 원한이 충천한 인목대비는 인조이하 반정세력에 광해군을 죽이도록 무섭게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광해군을 폐위시킨 명분이 광해군의 혈족 살해인 폐모살제 였는데 인조의 숙부인 광해군을 죽이면 명분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인목대비가 휘두르는 원한의 위협에서 겨우 살아났다고 느낄 무렵 반정공신의 중신인 신경진이 그를 암살하려고 시도했다.
신경진은 탄금대에서 죽은 신립장군의 아들로 1624년(인조2) 李适이괄의 난 때는 훈련대장으로 御駕어가를 호위하였던 인물이다.
모의를 주도한 김 류가 신립과 같이 죽은 김 여물 장군의 아들이니까 두 사람들은 뜻을 같이 할 정도로 사이가 좋았을 것이다.
그는 宣傳官선전관(전망인 戰亡人의 아들이라 기용)으로 기용되었고 반정 직후 왕의 특명으로 공조참의·병조참지, 곧 병조참판이 되어 訓鍊都監훈련도감·扈衛廳호위청·포도청의 대장을 겸하여 왕실 안전의 책임을 맡았으며 1642년 청나라의 요구로 최명길이 파직되자 그 뒤를 이어 영의정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는 광해군에게 특별한 원한이 있었던 것 같았다.
살해를 시도했을뿐더러 광해가 죽었을 때도장례의 예우 문제로 조정이 시끄러웠을 때도 냉담한 강경책을 주장했다.
병자호란이 한창 일 때 그는 무신인 구굉과 함께 연서로 함께 경기 수사에게 광해군을 善處선처하라고 밀명을 내렸지만 경기 수사는 이를 거부했다.
선처는 물론 죽이라는 말이었다.
이 이첨 일당의 사주를 받고 영창을 죽였던 전 강화부사 정항의 말로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뜻대로 안되자 신경진은 병자호란후 황익이라는 자객을 보냈으나 실패했다.
병자호란속에 교동도로 移配이배된 광해군은 삼전도의 치욕을 겪고 피해의식이 충만했던 인조에게 병자호란이 끝나고 불과 얼마 지나지 않은 1637년(인조 15) 5월 다시 먼 제주도로 移配이배당했다.
죽을 자리로 보내 진 것이다.
강화도와 교동도에서 15년 이상의 세월을 보낸 뒤에 남은 여생을 보낼 광해군을 실은 이송선은 교동도의 포구에서 제주로 떠났다.
中使중사·別將별장·內官내관·都事도사·大殿別監대전별감 나인,서리,나장들도 승선해서 광해군을 감시 호송했다.
교동에서 제주까지 압송해온 호송 수행원 조직의 규모가 상당했던 규모로 보아 광해군이 아직 중요 감시 대상인의 존재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유배 생활이라지만 거의 형무소와 같은 유폐 생활이었다.
광해군은 집 밖으로의 외출은 물론 방 밖으로의 외출도 제한을 받았다
그가 있던 집에는 감시 포졸만 30명이 넘었다.
하루 세 교대한다고보더라도 열 명의 포졸이 광해군에게서 항상 감시의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고 하겠다.
말이 유배지이지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다.
광해군에게 어디로 간다는 행선지를 알려 주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의 선실을 장막으로 다 가려서 밖을 내다 볼 수도 없도록 했다.
인조는 쌀쌀한 바다 날씨에 먼 곳을 가는 광해군에게 솜옷 한 벌을 보내주어 약간의 성의 표시를 했다.
째째해 보이는 성의 표시였지만 광해군은 적어도 자기가 죽임을 당하는 운명으로 보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고 한 가닥 위안을 받았을 것이다.
1637년 6월 6일.
광해군의 유배선은 제주 어등포(구좌읍 행원리)로 입항하여 포구에서 하루를 보낸 광해는 제주로 들어와 처소에 안치되었다.
최후를 마친 집에 대한 기술은 조선인이 아니라 외국인에 의해서 부분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멜은 1653년 무역선 스페르베르 호를 타고 자카르타를 떠나 나가사키로 가다가 폭풍을 만나 제주도로 표류하였다.
선원 63 명중에 단지 36명만이 살아남았지만 이들은 효종에 의해 출국을 금지 당하고 억지 타국 생활을 하게 된다.
13년 뒤 하멜을 포함해서 8명이 일본 나가사키로 탈출해서 하멜 표류기라는 글을 남긴다.
광해군이 쓸쓸히 죽은 때는 하멜이 표류해오기 12년 전이다.
하멜이 표류했을 때 인조도 세상을 떠났고 그 아들이 효종이 재위에 있을 때였다.
그때 제주 목사 이 원진이었는데 표류 선원들에게 인도적인 처우를 해주었다.
하멜 일행은 큰 집에 수용되었다.
하멜은 수용된 집의 규모와 시설을 보고 조선이 자기들을 나쁘게 대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인조의 아들 효종 5년 때니까 이 말은 조금 맞지않지만 이 집이 왕의 숙부가 유배와서 머물러 있었던 장소라고 그의 책에서 썼었다.
하멜에게 이 사실을 알려준 것은 하멜 일행을 영접하러 제주까지 온 역시 같은 네델란드 사람 박 연이었다.
보건데 보초도 30명이나 수용했었고 하멜 일행 36명을 수용한 사실을 보면 광해는 상당히 큰 집에서 마지막 세월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