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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Mar 10. 2016

건축가의 주유천하 IV 서울 경복궁 1/4

열하나. 조선의 제1법궁 경복궁 1

조선의 제1法宮법궁, 경복궁 첫번째이야기

19세기 후반(1895년) 서쪽에서 본 경복궁과 궁성 앞의 모습

역성혁명으로 고려의 무신이었던 이성계는 1392년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옛 수도이던 개성의 수창궁에서 조선 제1대 왕에 오르게 된다.

이제, 새롭게 출발하려니, 새 수도가 필요하다.

새로운 수도를 찾아 보게된다.

1393년 이성계는 충청남도 계룡산으로 간다.

형세 좋은 계룡산이지만 공물수송이 어려워 이를 포기하고 조선에서 가장 큰 강인 한강에 터를 잡아 수도로 정하고 물류수송은 선박으로 하게 된다.

1394년 무학대사와 함께 왕십리 근처에 도착한다.

뒤에는 청계천, 앞에는 한강...명당.

지나가던 도사가 10리만 더 가라고 한마디.

그래서 10리를 더 간곳이 지금의 경복궁인것이죠. 10리를 더 가라고 해서 갈'왕'자 써서 지어진 이름 '왕십리'

경복궁은 조선 왕조가 세워지고 3년이 지난 후 완공되었다.

1396년 경복궁이 완공되고 개성에서 경복궁으로 이사를 오게 된다.

완공된 지 며칠 후에 개국공신 정도전은 태조의 명에 따라 경복궁이라는 궁궐 이름을 비롯해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등 주요 전각의 이름을 지었다.


景福宮경복궁이라는 이름에는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시경>의 ‘君子萬年 介爾景福 군자만년 개이경복’에서 끝의 두자만 베낀다.  


궁궐은 왕실의 법도에 따라 왕궁을 남향으로 하고 周禮考工記 주례고공기에 따라 左廟右社 좌묘우사(궁을 중앙에 두고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를 두고 方里制 방리제를 적용하여 도심을 격자형으로 짜게된다.

경복궁은 前朝後寢 전조후침(앞에는 조정, 뒤에는 침전)양식으로 배치되어있다.

前朝전조란 앞에 있는 朝殿조전으로 사정문과 근정문과 근정전이 일직선상에 있고

後寢후침이란 뒤에 있는 寢殿침전으로 다시 前三堂後一殿전삼당후일전으로 사정전 3당과 교태전 一殿일전이다.

이제 나라의 중심 골격을 다지게된 것이다.

1399년 광화문을 창건하는데 첨에는 정도전이 思政門사정문(사방에서 어진 이가 오가는 정문)으로 명명한다.  


정문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천자와 제후가 그 권세는 비록 다르다 하나, 그 남쪽을 향해 앉아서 정치하는 것은 모두 정(正)을 근본으로 함이니, 대체로 그 이치는 한가지입니다.

문을 닫아서 이상한 말과 기이하고 사특한 백성을 끊게 하시고, 열어서 사방의 어진 이를 오도록 하는 것이 정(正)의 큰 것입니다.

- 정도전


1425년 집현전 학사들이 「光化門광화문-빛이 사방을 덮고 교화가 만방에 미친다」으로 개명한다.

홍예문이 3개로 가운데 좀 큰 문은 왕만 다니는 문이고 좌우는 신하들이 임금의 명령과 교지는 반드시 광화문을 통해서 나가고 현명한 선비들도 다 광화문을 통해 드나 든다.

바른 정치가 드나드는 문.

근정전 안마당에 두 줄로 돌이 12개씩 꽂혀있는데, 이 돌을 품계비라고 하한.

자기 직급의 높고 낮음을 알려주는 돌로 만든 공무원신분증이 저 품계비다.

왜 두 줄이냐면 우측에는 선비들이 좌측에는 군인들이 죽 줄을 서는.

그래서 우측의 선비인 文班문반과 좌측의 군인인 武班무반을 합쳐 양반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참고로

영화 관상에 등장하는 수양대군의 대항마 김종서를 북방경계 6진을 개척했다고 해서 학식높은 무관으로 알고 있는데...이분은 무예가 뛰어난 문관이다.


매달 4번씩 모든 벼슬아치가 함께 모여 임금에게 문안드리고 정사를 아뢰는 朝會조회가 이 안마당에서 열렸는데 많게는 수백명의 사람이 모이니까 선비와 군인을 포함한 모든 벼슬아치를 文武百회문무백관이라고 하는것이고 국민에 대한 존경의 표현으로 문무백관의 형제자매라는 뜻으로 국민을 백성이라고 부르게 된것이다.

1890년 경 광화문
1900년대 초
구한말 동편(측면)에서 본 경복궁 모습

이제, 역사속 경복궁의 훼철과 중건, 복원과정을 본다.

1592년에 임진왜란으로 인해 전소되고 말았다.

그 후 경복궁은 270여 년간 복구되지 못하고 방치되다가

1867년에 이르러서야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되었다.

중건한 경복궁은 500여 동의 건물들이 미로같이 빼곡히 들어선 웅장한 모습이었다.

궁궐 안에는 왕과 관리들이 정무를 보던 외전과 관청들, 왕족과 궁인들의 생활을 위한 내전과 건물들, 휴식을 위한 정원 시설들을 조성했다.

또한 왕비의 중궁, 세자의 동궁, 고종이 세운 건청궁 등 크고 작은 궁들이 복잡하게 들어선 궁궐 복합체이기도 했다.

구한말의 광화문과 육조거리
높은 단(壇)위에 월대(月臺)의 궁궐 정문

1910년 이후 경복궁 내의 많은 건물을 헐고 민간에 팔던 일제는

1911년에 경복궁 부지의 소유권은 조선총독부로 넘어갔으며,

1915년에는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한다는 명목으로 주요 전각 몇 채를 제외하고 90% 이상의 전각이 헐렸다.

1917년 창덕궁 침전 일곽에 불이 나자  창덕궁 침전을 복원한다는 명목으로 경복궁의 침전인 강녕전, 교태전 등을 1918년부터 1920년 사이에 헐어서 창덕궁의 침전을 복구하였고,

1916년부터는 근정문 앞에 있던 흥례문과 영제교 등을 헐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1926년 완공하고, 광화문은 건춘문 북쪽으로 이전하였다. (지금의 국립 민속박물관 앞이다)

그리고 한국전쟁당시 소실된다.

1904년의 경복궁 경회루
근정문과 영제교
경복궁(景福宮)의 정전(正殿)인 근정전(勤政殿) 모습. 1900년대
완공단계에 있는 총독부 건물

일제에 의해서만 훼철된것이 아니다.

광복 이후 1950년대 후반 경회루 연못을 겨울 스케이트장으로 개방 했고,

1961년 5.16 쿠테타 당시 30사단 1개 병력이 6월 경복궁 서북쪽을 병영기지로 삼았다.

1963년엔 정부가 앞서서 경복궁 안에 골프장을 건립하겠다고 했으나 강력한 여론의 힘으로 무산되기도 했다.

1968년 대충 걸었던 현판 글씨는 박통이 걸어놓은걸 새로 걸었다.

흰 바탕에 검은 글씨의 한문. 논란이 많았다.

고종 때 훈련대장 임태영이 「門化光」이라 쓴 한자현판 사진을 일본에서 구해 와서 디지털 복제한 뒤 「쌍구모본(글씨를 그대로 베낄 때 그 획과 자형의 윤곽을 가는 선으로 그린 뒤 그 공간을 색칠하는 방식)」 방식으로 그려서 달았으나 광복절에 맞추느라 덜 건조된 육송을 사용해 터져 3달 만에 크랙이 간다.  

계속해서 경복궁 내에는 국립중앙박물관(현 국립민속박물관), 후생관(용산으로 이전하기 전의 국립중앙박물관), 제2별관(옛 문화재연구소) 등이 건립되었고,

1975년 국립민속박물관이 선원전터에 지어지는등 궁궐족보에도 없는 현대식 건물이 궐내에 속속 자리 잡았다.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수백년 군자의 자태를 보인 경회루연못과 향원정 연못의 연꽃이 1990년 전반 문민정부시절, 불교의 꽃이라는 엉뚱한 이유로 발본색원당했다.

또한 정조때 유득공이 쓴 <춘성유기>에서 庭多垂楊 落絮可掃 정다수양 낙서가소 라고 씌였던 버드나무 고목들도 꽃가루가 날린다는 이유로 잘려나갔다.

뽑히고 잘려나간건 연꽃이나 버드나무에서 그친것은 아니다.

멀쩡하던 근정전 회랑도 군데군데 벽이 뚫리고 자려 만신창이가 되었다.

원래 근정전은 사방이 회랑으로 둘러 쌓여있고 남쪽의 근정문과 북쪽 사정문 밖에 없었다.

그런데 1970년대에 영제교를 근정전 동쪽으로 옮겨 놓으면서 동편회랑 북쪽부분을 뚫었다.

그 후 사정전, 자선당 등 근정전에 인접한 건물을 수리, 복원할 때 근정전 진입로가 막히게 되자 또 근정전 회랑을 뚫어 관광객을 통행 시켰다. 그 결과 동쪽 회랑에 두곳, 서쪽의 세 곳의 임시 통로가 생긴거였다.  


훼손 자체가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복원이라는 대역사하는 과정에서 고증 소홀로 원본에도 없는 엉뚱한 건물이 생기기도 했다.

복원대상 건물의 기준시점을 고종대로 잡았다.

이 기준에 따르면 흥례문 일곽은 闕內各司궐내각사가 촘촘히 있는 형태로 복원되어야 하나, 행각구조대신 일제가 전시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개조한 행랑구조로 되어 있다.

2010년 복원된 광화문의 공사비는 280억.

1990년 부터 시작된 1차 경복궁 복원 사업으로 현재 30%정도 복원되었다.

2차 복원은 54000억 투입해 2030년 마칠 예정으로 그럼 76% 완성되는 것이다.

더이상 복원은 불가능하다.

청와대 등 불가한 건물들이 주저앉아 있는터라.

400여 동의 경복궁 전각 중 왜놈들이 390동 철거되어 10동 남았었다 복원하며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것이다.  

근정전의 어좌
1927년 광화문 해체
1929년 10월 총독부와 옮겨진 광화문
1930년대 경복궁과 그 일대
해방 후 하늘에서 본 경복궁과 조선총독부(중앙청) 모습
한국전쟁 직후에 촬영된 사진

* 참고로

중국인들이 소위 말하는 경복궁은 자금성의 아류라든지, 무식한 관광객들이 자금성의 화장실만하다는건 결코 정답이 아니다.

두 궁 모두 [주례고공기]라는 서적에 따라 배치되어, 착공도 1394년과 1406년으로 경복궁이 앞섰고, 준공도 1395년과 1420년으로 25년이나 앞서 있다.

면적 또한 430,000sm : 720,000sm으로 자금성의 60%에나 이르니, 국가크기를 따져보면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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