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의 역사 읽기 IV 근현대사

네번째. 한국전쟁 3/7 중국의 참전

by Architect Y
중국의 참전


일반적으로 중국의 개입으로 통일을 목전에 두고 전쟁을 멈춰야 했다고 현대 역사를 배워 왔다.

당연히 구 소련과의 대 한국의 기득권 싸움으로 중국은 많은 수의 군대를 파견하여 그 위치를 확고이 해야 했다는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들리기까지 한다.

앞에서 설명한것처럼 중국은 미국이나 구 소련처럼 분단통치를 결코 찬성하지도 않았고 승전국으로의 대우를 인정했다.

1950년 10월 19일 중국은 정규군인 「중국인민해방군」이 아닌 「중국인민지원군」의 이름으로 중국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의 백전노장 임표를 사령관으로 「抗米援朝保家爲國 항미원조보가위국」을 명분으로 압록강을 건너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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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당국은 중국군의 한국전쟁 참전을 한동안 믿으려 하지 않았다.

중국군 대부대의 출현에 관한 한국군 장교의 거듭된 보고는 미군 사령부에 의해 계속 무시되었다.

미군의 중국에 대한 편견(중국은 아직 체제가 정비되지 않았고 군 전력상 미군에 대적하여 한국전쟁에 파병을 할 수 없다는 확신)과 잘못된 정보로 인하여 포로로 잡힌 중국군을 보고서도 계급장이 없는 중국군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중국군의 참전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계급장도 없고 화포도 없다 그런 정규군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 미 제 10 군단장 Edward M. Almond아몬드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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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가운데 맥아더는 중국군의 참전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서부전선 13개 사단, 동부전선 5개 사단의 미군과 한국군에 대하여 1950년 11월 24일 총공세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중국군과 북한군은 미군과 한국군에 대한 포위 작전을 완벽하게 준비한 후 공격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11월 26일 전전선의 중국군과 북한군은 사면팔방에서 미군과 한국군을 포위 공격해 들어갔다.

음산한 피리소리와 천지를 진동시키는 꽹가리 소리와 함성과 함께....!

예기치 않은 시간에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마치 귀신인양 불쑥불쑥 나타나는 북한군과 중국군의 신출귀몰하는 모습은 미군과 한국군으로서는 난생 처음 겪는 불가사의였고 공포 그 자체였다.

이렇게 북한군과 중국군의 총 반격에 미군과 한국군은 혼을 빼앗긴 것 마냥 모든 전투력을 잃고 일대 참패를 겪은후 각 전선에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모든 퇴로를 예상하고 잠복하고 있었던 북한군과 중국군에의하여 대부분의 미군과 한국군은 궤멸되고 말았으며 이런 대혼란의 과정에서 피아간의 구분도 제대로 못하고 아군끼리의 교전도 숱하게 발생하였다.

특히 동부전선의 상황은 극도로 좋지 않았다.

북한군과 중국군은 미군과 한국군을 완전히 포위한 뒤 후방보급로를 차단시키고 서부전선과의 연락마저 완전히 차단하여 버렸다.

결국 미 제10군단과 한국군 제1군은 병력의 반 이상을 잃어야만하는 많은 희생을 치른뒤 가까스로 흥남과 성진을 통해 바다로 도망칠 수 있었다.

이른바 12월 총 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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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미군과 한국군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채 1951년 1월 24일 서울을 다시 내주고 평택에서 안성을 거쳐 삼척에 이르는 경계선까지 밀려나고 말았다.

그것도 더 이상의 남진과 확전을 반대하는 중국군의 전략 덕분으로...!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을 주력으로 조직된 중국인민지원군 즉 중국의용군은 오랜 기간에 걸친 항일 투쟁과 반국민당 투쟁을 통해 훈련된 독특한 인민전쟁 전술에 익숙해져 있었다.

특히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군의 북한에서의 행동은 남한에서의 미군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조심스러웠는데 이는 모택동의 특별한 지시와 오랜 유격투쟁의 결과 현지 인민의 지지와 지원이 없이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없다는 진리를 너무 잘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중국인민지원군은 조선 국경 안으로 들어간 뒤 조선인민군, 조선민주정부, 조선노동당과 기타 민주적 당파 및 조선인민의 수령 김일성 동지에게 우애와 존경을 보이고 군사기율과 정치기율을 엄격히 보여야 한다.

.... 또 중국인민지원군은 조선의 산 하나, 물 한 방울,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라도 애호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중국인민지원군은 전쟁 전기간을 통해서 북한유격대를 고리로하여 북한민중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중국군만의 독특한 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으며 북한민중들 또한 이러한 관계속에서 상당히 적극적으로 항미투쟁을 벌여 나갔다.

북한 유격대와 민중들은 중국군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장비 운반과 길 안내를 도맡아 처리하였죠.

중국군의 눈이 되고 귀가 되고 손발이 되어준 것이다.

이러한 적극적인 협력으로 중국군의 전투력은 배가가 되었고 그저 맨손으로 뛰기만 하면 되는 이동능력은 어떠한 제한도 받지않고 미군과 한국군의 눈을 속이며 극비리 이동을 할 수 있었고 미군과의 전투에서 소수의 병력만으로도 적에게는 대병력이 포위 공격하여 온 것으로 착각하게 하는 마법과 같은 위장된 인해전술로 공포와 불안감을 주어 큰 승리를 이끌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북한의 험준한 산악으로 이루어진 특수한 지형 구조는 중국군의 유격전 기본 전술인 기습과 포위를 전법으로 하는 작전을 수행하는데 천혜의 조건이었다.

야간에만 이루어지는 병력이동은 미군이나 한국군이 중국군의 위치나 규모를 전혀 가늠할 수 없게 하였고 구슬프게 어두운 밤을 뒤흔드는 중국 피리인 차르멜라 소리는 공포 그 자체였다.

야간에만 극비로 움직여 미군과 한국군을 완전히 포위한 뒤 낮 동안 꼼짝 않고 있다가 한밤중에 구슬픈 피리 소리와 북과 꽹가리를 치며 사방에서 몰려드는 중국군을 맞은 미군과 한국군은 기겁을 하고 공포에 빠져 혼비백산하여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고 막강한 화력과 최신장비를 내팽게친 채 도주할 뿐이었다.

사실 북과 꽹가리는 현지 북한 주민들이 동원되어 병력의 수를 과장하기 위한 허장성세일 뿐 실제의 병력수는 그리 많은 병력이 동원된 적이 별로 없다.

그러나 어둠속에 갑자기 나타난 북한군과 중국군은 미군과 한국군에겐 엄청난 대병력으로 느껴졌고 두려움과 공포는 전의를 상실하고 그저 도망치기에 급급 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중국군의 인해전술의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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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군의 한국전쟁 참전 배경과 원인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요인은 미군의 중국 국경부근으로의 진격으로 인한 자국 안보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다.

중국은 서서히 증가하는 미국의 침략위협에 대응하여 사회주의국가 건설기의 산적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 참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은 당시 미군과 장개석 군대의 양면공격위협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었으며 (맥아더는 실제로 장개석 군대의 본토투입을 검토하였고 추진하였다) 최후의 순간까지도 미군과 한국군이 38선을 넘지 않는다면 참전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공식적으로 표명할 정도로 자제하다가 국가수호를 위한 최후의 결단으로 참전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여기에 북한과 함께한 항일투쟁의 연장이고 사회주의 연대성의 원칙이다.

중국은 항일투쟁과 국공내전과정에서 입은 조선인으로부터의 도움을 위기에 처한 북한을 지원함으로써 갚으려 했던 것이다.

또한 이것은 제국주의 침략에 공동으로 대응한다는 국제사회주의 연대성의 원칙을 견지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은 지원 이상을 시도한 것 같지는 않다.

당시 중국 지도층은

조선의 통일 목표는 장래에 실현될 수 있는 것이지 이 전쟁에서 성취될 수는 없는 것

이라며 전조선의 해방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중국은 자국의 군대가 북한 지역을 회복하고 38도 이남으로 진격하여 더이상 자국의 안보와 북한의 존폐가 위협받지 않게 되자 갑자기 진격정지 명령을 내려 소련의 진격요청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더이상의 진격을 중지했다.


마지막으로 당시 중국은 비록 혁명이 성공은 하였으나 아직 대륙 곳곳에는 국민당의 잔당들을 비롯하여 반혁명세력들이 잔존하고 있었다.

이들의 저항은 결코 무시될 수 없었으며 중국 공산당의 중앙통제력은 중국국토의 일부에 한정되고 있었으며 중국의 정규군인 중국인민해방군의 군벌적, 파벌적 성격으로 인하여 전중국군을 모택동이 장악하고 있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모택동으로서는 이러한 대내적 상황을 한국전쟁에 참여함으로써 일거에 극복하고 혁명을 촉진시키려 하였고, 또 한국전에 참전하면서 모택동은 토지개혁, 반혁명세력 제거, 중앙정부의 통제력 강화, 3반三反, 5반五反 운동 등 대중운동의 전개를 통해 대내적 통합력의 제고와 사회주의 건설을 급속히 성공적으로 추진시켜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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