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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Jan 31. 2017

건축가의 주유천하 IV 서울 종친부

스물다섯. 국왕 친척들에게 품계와 벼슬을 관장하던 宗親府종친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위치한 종로구 소격동 165번지.

경복궁 바로 길 건너편인 이곳에는 조선시대 왕실가의 사무를 총괄하는 宗親府종친부가 있었다.

해방 후에는 국군수도병원이 들어섰다가 국군보안사령부(기무사령부)로 바뀌면서 한국 현대사의 다양한 사건이 이곳에서 벌어졌다.

현재 경복궁 우측에 도로에 둘러 쌓여있는 동십자각은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처음 건립한 이후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것을 1865년 대원군이 새로 만든 거다.

동십자각에서 우회전하면 사간동, 사간동 지나면 연이어 소격동이다.

왕의 잘못을 간언하던 지금의 언론 역할을 했던 곳이 司諫院사간원, 사간원이 있던곳이 사간동이고 노자를 추종하는 도교의 성제단인 昭格署소격서(얼마전 드라마 옥중화의 옥녀의 근무지)가 있던 동네가 소격동이다.

소격동에 왕세자가 드나들던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건너편,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자리가 종친부의 원래 위치다.

소격동 165번지.

1907년 왕족을 돌보는 업무가 규장각으로 넘어가면서 이곳에는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박길룡 디자인)이 들어서고 한옥의 종친부는 방치된다.

1937년 경성육군위수병원이 되고 해방 후 국군서울지구병원이 된다.

종친부는 1969년 서울 유형문화재 9호로 지정된다.

서울 시내 중심부의 요지인 탓인지 병원 뒤편은 국군기무사령부가 차지했는데 얼토당토않게 1981년 테니스장을 짓겠다며 멀쩡한 종친부 건물을 정독도서관 마당으로 옮겨 세운다.

미술인들의 소망대로 정부는 2010년 이 자리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짓겠다는 계획을 밝힌다.

이어 2011년 기무사터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신축 확정된다.

그렇지만 땅 파니 경근당과 옥첩당 기단이 그대로.

그래 종친부는 다시 소격동으로 이전하기로 합의한다.

이렇듯 우여곡절을 겪은 종친부 건물의 이전복원 공사가 마침내 마무리됐다.

종친부는 조선시대 10동 남짓한 규모였다고 하는데 남은 건물은 敬近堂경근당과 玉牒堂옥첩당뿐이다.

미술관 착공과 동시에 이루어진 발굴조사 결과 건물 지하의 옛 구조물이 그대로 남아 있음을 확인해 그 자리에 복원할 수 있었다.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던 경근당과 옥첩당의 현판도 다시 걸었다.

경근당 현판은 고종의 친필이라고 한다.

종친부 건물규모를 보면 중심되는 큰 건물인 중당과 그 오른쪽에 딸린 날개집인 익사가 있다.

우측 날개가 옥첩당.

옥첩은 왕실 족보 말한다.

왼쪽에도 오른쪽과 같은 날개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종친부는 조선 역대 왕들의 어보와 어진을 보관하고 왕과 왕의 의복을 관리하며 종실제군의 봉작승습, 관혼상제 등 모든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이다.

대를 거듭하며 그 수가 늘어날 왕족을 무한대로 관리할 수는 없으므로 왕의 정부인에게서 난 자손은 4대손까지 후궁에게서 난 자손은 3대손까지를 종친으로 대우했다.

좌측 경근당은 위의 사무를 처리하던 전각이며, 옥첩당은 고위 관리들의 집무처로 사용되었다.

기존에는 경근당과 옥첩당 이외에도 경근당 좌측에 이승당이 복도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중앙에 중심이 되는 건물이 있고 좌우에 익사가 배치된 형태가 주요한 도시에 위치했던 객사의 형태를 연상하게 한다.

물론 연결의 방법이 익랑(복도)으로 되어있는 점에는 차이가 있지만 길이방향으로 연결된 형태에는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현재 서울에는 조선시대 관아건물이 거의 파손되어 조선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건물외에 삼청공원으로 옯겨진 삼군부 총무당과 육군사관학교내의 삼군부 청헌당 건물 정도가 남아 있다.

종친부 복원이 반갑지만 여전히 모든 사람의 축복을 받는 것 같지는 않다.

실제로 서울관이 개관한 이후에도 종친부는 썰렁한 분위기 속에 공사 중이었다.

미술인들에게는 여전히 ‘눈엣가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개관 기념전에 종친부 건물을 활용한 작품 하나 보이지 않았던 것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다.

늦었지만 미술과 문화재가 화해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미술인들은 종친부 건물을 예술적 자원의 하나로 활용하고 문화재 관계자들은 종친부 건물이 역사적 의미를 넘어선 새로운 문화 자산으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열린 자세를 가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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