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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Feb 13. 2017

건축가의 주유천하 VI 충청 이동녕생가

스물하나. 李東寧先生 生家 이동녕선생 생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맏형이자 수호자,  李東寧先生 이동녕선생


석오 이동녕선생은 1869년 천안에서 태어나 1896년 독립협회에 참여했으며 1904년 상동청년회에서 활동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 이상설 등과 만주 북간도 용정촌으로 망명해 瑞甸書塾 서전서숙(서전평야가 있어서)을 설립하고 민족 교육을 통해 독립운동가를 양성했다.

1907년 귀국해 안창호, 김구 등과 함께 新民會신민회를 조직하고, 1910년 만주로 건너가 이시영, 이강영 등과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광복군 창설에 진력하며 무장 독립투쟁에도 기여했지만 민족의식 교육과 계몽을 통해 힘을 기르는 장기적 차원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3·1운동 직후 1913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권업회를 조직했고, 1919년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원장, 외무총장을 지내는 등 임시정부 탄생의 산파역을 했으며 국무총리를 지냈다.

그뒤 국무위원주석을 겸무하다가 1928년 한국독립당을 결성, 이사장이 됐으며, 1935년 한국국민당 간부로 활약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난 뒤 1939년 김구와 함께 전시 내각을 구성하고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싸우다가 염원하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0년 중국 쓰촨성에서 눈을 감은 이동녕 선생.

1948년 김구선생이 이동녕선생 유해 봉환하고 효창원에 안치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1등급 대한민국장. 2등급 대통령장. 3등급 독립장. 4등급 애국장. 5등급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동녕선생 생가는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동리에 있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동녕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2005년 천안시는 이동녕선생 생가터 780평 11억 4천만 원에 매입하고 추가로 13억 6천만 원 투입해 성역화 작업하여 12월 생가지 보수 및 정비가 완료했다.

생가에는 안방, 사랑채 등 옛가구 및 인물모형이 전시되어 있으며, 주변에는 우물, 이동녕선생 좌상이 설치되어 있다.

이동녕선생 기념관은 2010년 개관됐으며 생가와 마주하고 있다.

기념관 앞에는 선생이 생전에 자주 인용한 山溜穿石산류천석(산에서 흐르는 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뜻으로, 물방울이라도 끊임없이 떨어지면 종내엔 돌에 구멍을 뚫듯이 작은 노력이라도 끈기 있게 계속하면 큰일을 이룰 수 있음)을 새긴 가로 3m, 세로 5m 규모의 휘호석이 세워져 있다.

기념관 입구에는 선생의 흉상과 태극기를 배치했고, 안에는 선생의 유품과 함께 연보, 가계도, 삶과 사상 등을 소개하는 ‘석오 이야기’와 독립운동 및 임시정부 활동을 소개하는 ‘구국의 일정’ 등 6개의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

독립기념관에서 2km 거리


李東寧 이동녕(1869-1940).

본관 연안延安. 호 석오石吾.

충청남도 천안 생. 부친은 의성군수를 지낸 이병옥.

건물의 배치 구조는 ㅁ자형의 안채와 조금 떨어져 있는 일자형의 대문간채가 어울려 ㄷ자형을 이룬다.

안채는 각주를 사용한 납도리의 5량가구 구조이며,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3 칸은 대청마루를 깔았고 양쪽으로 한 칸씩의 방이 있는데, 안채의 좌우로 3칸씩을 내어 방과 부 엌으로 사용하고 있다.

 대문간채는 서향으로 3량가구 구조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모두 5칸인데, 가운데 2칸은 마루를 깔았고 양쪽으로 한 칸씩의 방을 두었다.

안채에서 보아 북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 대문이 있다.

사랑채가 있었으나 많이 변형되어 원형을 알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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