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유의 풍경이 될 수 없는 Landmark DDP
하디드의 건축은 동대문 주변 환경과 어울리지 않고 역사를 고민하지 않은 '파괴적 건설'이다.
자본과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건설'은 인간을 위한 '건축'과 다르다.
- 정기용
동대문운동장 터는 원래 조선시대에 축조된 서울성곽이 이어지던 곳으로, 군사훈련과 치안을 담당하던 관청인 하도감과 훈련원이 있던 곳이다.
하도감은 임진왜란 중인 선조 27년(1594년)에 도체찰사 유성룡의 제청으로 창설되었고 갑신정변 때는 고종이 이곳에서 3일간 머물며 새로운 정부를 구성한곳이다.
別技軍별기군은 마보군과 대년군 중 나이가 어리고 건장한 자를 가려 뽑아 교관을 붙여 십팔기를 연마하는데 2월부터 9월까지는 비파정에서, 10월부터 정월까지는 下都監하도감에서 훈련한다
- 훈국 총요
일본의 지원을 받는 신식군대 별기군의 훈련 장소로 활용되다 1882년 차별대우에 불만을 품은 구식 관군이 폭동을 일으켜 일본인 교관 등 13명을 살해하는 임오군란의 최초 발생지이기도 하다.
일제가 조선침략을 본격화 하던 1925년 일본은 동대문운동장부지의 성곽을 허물고 일본 왕세자의 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경성운동장을 건립했다.
이것이 동대문운동장의 효시로 해방후, 경성운동장은 1984년 잠실종합운동장이 건립되기 전까지 서울운동장으로 사용되다 대문운동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최초의 종합경기대회인 제10회 전조선경기대회가 1929년에 개최되었고 여러 차례의 개•보수 끝에 야간 조명 시설을 설치했고 트랙은 화학 포장을, 축구 경기장은 자연 잔디를 깔며 수많은 국내•국제 육상 및 축구 경기가 벌어졌던, 현대 스포츠의 메카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노후된 육상경기장은 77년 만에 2003년 3월부터 폐쇄되어 임시 주차장 및 풍물시장으로 사용되었다.
2006년 오세훈 서울시장이 당선됐다.
그는 ‘디자인 서울’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많은 사업을 진행했다.
2007년 시장 취임 1주년만에 중요한 업적이 될만한 대규모 사업이 시작된다.
동대문운동장을 월드디자인플라자로 교체하는 지명현상설계.
2006년 말까지 일반인을 대상으로 아이디어를 공모했고 이때부터 공원과 시설(Design Complex)로 프로그램을 나눴다.
다목적 공원은 이간수문을 통과하는 하천과 이곳을 지나는 성곽 250m를 복원해 역사공원으로 조성하고, 디자인콤플렉스는 서울 디자인산업의 메카로, 지하공간은 상가로 개발해 상업시설로 활용한다는 계획이었다.
지명초청이란 설계 공모 참여자를 미리 지목한 뒤 이들만을 대상으로 공모를 실시하는 방식이다.
승효상,유 걸, 최문규,조성룡 등 4명의 국내건축가와 해외건축가로는 이라크 출신의 영국 여성 건축가 Zaha Hadid 자하 하디드, 미국의 Steven Holl 스티븐 홀, 스페인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하는 건축가 그룹 F.O.A, 네덜란드의 MVRDV 등 4팀이다.
심사위원장은 Professor Jonathan Barnett조나단 바넷(University of Pennsylvania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도시 및 지역계획)이었고, 심사위원은 Diana Balmori 다이애나 발모리(미국 도시 및 조경계획 전문가), Jean-Marie Charpentier 장마리 샤팡티에(프랑스 건축사), 김종성, 조성중, 김영섭이었다.
대지면적 1만 8,600평(6만 1,858sm)
연면적 26000평
처음 예산은 강남의 코엑스에 맞서는 패션몰이 목표로 2,270억원이었다.
Metonymic Landscape 환유의 풍경
'환유'는 주변의 사물을 참조하기 위해 특정의 사물을 간접적으로 묘사하는 수사학적 표현을 의미하며, 또한 여기서 '풍경'은 인간과 그 환경 사이의 관계를 물질적으로 재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이 작품은 동대문 Project가 가지는 다양한 역사적, 문화적, 도시적, 사회적, 경제적 요소들을 환유적으로 통합하여 하나의 풍경을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 당선작가 Zaha Hadid 자하 하디드
처음부터 디자인 결정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주창한 Landmark랜드마크로서의 디자인이었다.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도시의 맥락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소위 좋은 건축과 무관했다.
그러니 국내건축가의 동대문과의 조화로운 건축은 처음부터 랜드 마크ㆍ랜드스케이프 건축이자 물이 흐르는 것 같은 유연한 공간적 문화적 대응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한 zaha Hadid 자하 하디드의 계획을 넘어 설 수 없었던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보행자의 시야에 랜드마크 요소로서 강력한 디자인을 표현하고 있고, 이는 도시의 중요한 존재로 부각하는 데 적합하다는 이유로 그녀의 개념이 선정되었던 것이다
한양의 보물인 흥인지문 앞에 방을 얻어 놓고 어떻게 하면 흥인지문과 어울리는 디자인을 해야 하는지 고민한 디자인을 냈지만 흥인지문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자하 하디드의 디자인이 당선 되었다
- 지명현상설계 참여 2위 건축가 조성룡
2008년 운동장을 들어낸 뒤 지하에 묻혔던 많은 유구遺構(옛날 토목건축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ㆍ유물이 나오면서 터파기공사가 중단됐다.
사라진 것으로 생각했던 123m에 달하는 동대문~광희문 구간의 성벽이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나왔던 것이다.
역설적으로 일제가 경성운동장을 지으며 콘크리트를 쏟아 부은 덕분이었다.
성곽 아래론 성 밖으로 물을 내보내는 二間水門이간수문과 축구장 부지 아래는 군사부속시설 건물지, 집수시설, 우물지 등이 나왔다.
하도감 터가 있던 야구장 부지엔 염초청과 훈련원 유적이 발견됐다.
1년간 DDP공사를 멈추고 진행한 발굴을 통해 문화재 이전 복원을 결정했다.
DDP는 상업건물이 아니라 막대한 혈세가 들어간 공공건축으로 시민의 이익에 들어맞느냐 하는 공공성이 중요하다.
그러나 유구 발굴과 프로그램 변경이라는 이유로 2차례나 공사가 연기됨에 따라 공사비와 설계비가 크게 늘었다.
자하의 가장 중요한 Concept(개념)는 랜드스케이프 건축이었으나 안전ㆍ구조ㆍ시공상의 문제로 상부까지 공원으로 확장하지 못했다.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 실현되지 못해 Landscape 랜드스케이프로서의 건축이 아닌 거대한 덩어리로 남았고 자하 측은 우리뿐 아니라 시공사, 서울시 모두에게 의미 없는 시도였다고 답했다.
더욱이 Landscape 랜드스케이프 건축이라는 개념과 Landmark 랜드마크로서의 건축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공사 중에 유구가 발견됐지만 애초부터 동대문의 역사성이 중요한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멈출 수 없었다.
결국 설계가 일부 변경됐다.
최종 공사금액은 4,200억원이 되었다.
이후 공사가 거의 마무리된 2011년 10월 새로 당선된 박원순 시장은 DDP 활용 방안에 대해 급제동을 걸었다.
태생적으로 적자 구조를 가진 DDP의 프로그램을 대대적으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세금을 투입하는 디자인 메카에서 스스로 수익을 내는 창조지식공간으로 바꾸라는 것이다.
일부 언론들은 전임 시장 흔적 지우기라고 하는데요, 저는 전임 시장이 한 것을 잘 받아들여야 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서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그것도 5000억원 들인 거잖아요.
저 같으면 안 했겠지만, 이미 공사 다 끝나가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걸 잘 좀 꾸며서 정말 활용을 잘하고, 그 공간뿐만 아니라 일대의 동대문과 봉제공장 많은 창신동, 그 다음에 성북동까지 봉제공장이 있어요.
그쪽하고 광장 원단시장, 이렇게 해서 패션의 도시로 만드는 전체적 그림을 그리고 있거든요.
- 박원순 서울시장
우여곡절끝에 개장하게된 DDP는 이제 3돌을 지나보냈다.
앞으로 해결해야할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
조경개념도 사라져 버렸고 500년 역사의 복원도, 80년의 세월의 의미도 어느것 하나 바로 서질 못한 어마어마한 덩어리의 Landmark랜드마크를 바라보며 DDP competition의 concept인 Landmark에대한 거장의 말을 떠올려본다.
랜드마크가 반드시 클 필요는 없다.
작은 건축물도 얼마든지 랜드마크가 될 수 있다.
뉴욕에도 작은 공원들이 랜드마크 역할을 한다.
랜드마크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사람들이 도심 속에서 얼마나 그것을 즐기느냐, 얼마나 특별한 것으로 인정하느냐이다.
어쩌면 적절한 장소에 심은 나무 한 그루도 랜드마크가 될 수 있다.
결국 도시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 Richard George Rogers 리차드 로져스(1991 대영제국 명예기사 작위, 2007년 프리츠커 상 수상 영국 건축가)
* 자하 하디드는 1950년 이라크의 바그다드에서 태어났다.
런던의 AA스쿨에서 건축 공부를 마친 후 스승이었던 Remment Koolhaas 렘 쿨하스, Elia Zenghelis 엘리아 젱겔리스를 도와 OMA(Office for Metropolitan Architecture)에서 함께 일했으며, 1977년 파트너가 됐다.
파격적 디자인으로 인해 그녀의 작품이 실현되기에는 시스템 구조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는데, 쿨하스와 작업 중 만난 유명 구조 엔지니어 Peter Rice피터 라이스로부터 일찍이 많은 조언과 도움을 받았다.
1980년 OMA에서 독립해 런던에 Zaha Hadid Architects 자하 하디드 설계사무실을 열었으며 현재 350명이 넘는 직원을 보유하고 있다.
이와 함께 AA스쿨에서의 강의를 시작으로 하버드대, 일리노이대, 오하이오 주립대, 컬럼비아대, 예일대 등 세계 유명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론적으로 영향력 있을 뿐만 아니라 획기적인 디자인을 통하여 홍콩 Peak Club픽 클럽(1983)과 Cardiff Bay Opera House 웨일즈 카디프 베이 오페라 하우스(1994) 등과 같은 많은 국제 설계경기에서 우승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들 프로젝트는 실현되지 못했다.
2004년 여성 건축가로는 최초로 건축계의 노벨상이라고 할 수 있는 Pritzker Architecture Prize 프리츠커상을 수상했다.
이전에도 건축분야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CBE대영제국훈작사(; Commander of the British Empire)를, 2010년에는 로마현대미술관 Maxxi막시 프로젝트로 영국왕립건축가협회(RIBA)의 Stirling Prize 스털링상을 수상했다.
그녀는 2008년 Forbes포브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00인 중 69위에 올랐다.
2010년 Times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 100인에도 이름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