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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May 19. 2018

일반인문 C 제사, 4대봉사?

;  퇴색되어버린 한국적 유학의 허식

祭祀제사.

어느 집안을 막론하고 고조부모까지 지내는것을 자연스럽게 여겨왔다.

자연스레 사대봉사라는 말이 나왔고 집안을 이야기 할때는 의례 이것이 집안을 가늠하는 척도로 여겨져 왔다.

정작 어디부터 시작되었는지도 생각지 않고 당연히 그래 왔던 일로 치부한다.


조선의 예법의 중심이된 서적은 고전의 禮記예기와 국책으로 정한 經國大典경국대전, 그리고 근거가 아무래도 앞의 2권에 비하면 희미한 朱子家禮주자가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유학자들은 자신들의 지역을 鄒魯之鄕추로지향(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라는 뜻으로, 예절을 알고 학문이 왕성한 곳)이라 하여 공자와 맹자의 사상을 지향한다.

어처구니 없게도 그 자웅을 겨루는 척도를 제례에 두고 있다.

한국에서 본향이라하는 지역들이 앞다투어 self 신분 상승을 목적으로 과도하게 제례를 발전시킨것이다.

빈곤한 서민은 위패에 절하는것으로 족했고, 祭需제수는 형편에 따랐다.


禮記예기와  經國大典경국대전

유학에서 중심으로 여기는 서적은 4서3경(論語논어, 孟子맹자, 中庸중용, 大學대학

詩經시경, 書經서경, 周易주역), 더 가서 4서5경(+禮記예기, 春秋춘추), 13경(易經역경, 書經서경, 詩經시경, 周禮주례, 儀禮의례, 禮記예기, 春秋左氏傳춘추좌씨전, 春秋公羊傳춘추공양전, 春秋穀梁傳춘추곡량전, 孝經효경, 論語논어, 爾雅이아, 孟子맹자)에서조차 士사의 사대 봉사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

단지 大夫대부는 3대, 士사는 1대에 한해서만 제사를 올릴 수 있다고 예기는 적고 있다.

(大夫대부는 왕실과 제후를 섬긴 귀족을 이야기 한다.)


그렇다면 조선의 법전인 經國大典경국대전은 어떠한가.

이곳에도 제사에 관한 규칙을 정해 놓고 있다.


6품 이상은 3대 봉사, 7품 이하는 2대, 서민은 부모 제사만 지낸다


구분 없는 4대봉사를 이야기한 朱子家禮주자가례
朱熹주희, 丘濬구준
주자가례

지금의 성균관은 朱子家禮주자가례를 기준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조선의 조정에서 이어진 성균관이라면 경국대전을 따라야 하고 유학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유가 5경중 하나인, 주자가례보다 1,500년이 앞선 예기(BCE 551~419)에 따라야 맞는데 왜 明명의 丘濬구준이 家禮가례에 관한 주자의 학설을 수집하여 만든 주자가례를 따르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


조금 더 이야기 하자면 유학의 사상의 최고 위치인 공자인데 정작 공자는 제사의 중요성에 관해 이야기 하지 않았다.

논어에는 공자가 제사에 관해 중요하게 여긴다는 부분을 예로 드는 이도 있지만 그 내용은 공자의 제자가 이야기한 내용들이다.


曾參증삼은 죽은 조상을 잘 모시는 것이 백성의 덕을 두텁게 하는 것이라 하였으나, 공자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직후의 喪禮상례는 중시하지만 먼 조상을 섬기는 제사는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


曾子曰 증자왈

愼終追遠 民德 歸厚矣 신종추원 민덕 귀후의

-  論語 學而 논어 학이

증자가 말하기를 부모의 상에는 예를 다하고, 조상의 제사에는 공경함을 다하면 백성들의 덕이 두터워질 것이다


공자가 제사에 별 관심이 없던것은 제사가 가문의 위업을 자랑하면서 백성을 착취하는 구실로 삼기 때문이다.

다만 八佾팔일편과 鄕黨향당편을 통해 당시 위정자들에게는 전례대로 제사를 지낼 것을 요구하고 있다.


공자는 죽음에 대해서 알고 싶다는 자로의 질문에 대해 사람을 섬기지 못하며 귀신을 섬길 수 없고 삶을 모르는데 죽음도 알 수 없다고 이야기 한다

未能事人 焉能事鬼 미능사인 언능사귀

未知生 焉知死 미지생 언지사

- 論語 先進 논어 선진


맹의자(노나라의 권세가)가 효에 대하여 공자에게 묻자, 살아 계실 때에는 예를 다해 섬기고, 돌아가셔도 예를 다해 장사를 지내며, 제사 지낼 때도 예를 다해야 한다(生事之以禮생사지이례 死葬之以禮사장지이례 祭之以禮제지이례/論語爲政논어위정)고 하는데 이 부분도 부모에 대한 효를 이야기를 하고 있다.

八佾舞 팔일무

論語八佾 논어팔일편에서는 佾舞일무(제례의식 때 공연된 의식무용)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데 이곳에서도 제례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

天子천자는 64명이 서는 八佾舞팔일무를, 大夫대부는 四佾舞사일무를, 士사는 二佾舞이일무를 지키라고 하고 季氏계씨의 팔일무를 이것을 참고 용서한다면 무엇인들 참지 못하겠냐고 꾸짖기도 했다.


가문과 문벌의 위세 경쟁이 격화됐던 조선 후기 제사는 문중 대사, 가족의 최대 행사로 변질됐다.

1년 20회 정도 제사를 행하지 않으면 양반이 아니었던 당시의 풍조에서 신분 향상을 열망했던 서민들도 제례 경쟁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제사 문화가 원조라 할 수 있는 예기를 좇아 아버지까지만 제사 지내는 1대 봉사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회적 가치로 환원 돼, 이 시대에 걸맞는 문화적 종법으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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