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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주와 마취

 - 마취통증의학과 의사라서 5 화

 전공의 시절에는 이틀에 한 번씩 당직을 하여 밤에도 병원에서 대기 상태로 있고 다음날 저녁은 오프를 받아 집에 갈 수 있었는데 그 당시 집이 병원과 멀어 평일에는 그냥 병원 당직실에서 숙식을 해결하고는 하였다. 그러다 보니 일 년에 집에 가는 날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고 주로 병원을 집처럼 여기고 살았던 것 같다.


 내가 전공의 할 때 동기가 한 명 있었는데 공대를 나오시고 다시 의대를 들어가신 나이가 좀 있으신 남자 선생님이셨다. 결혼도 하시고 아이도 있으시니 나같이 미혼에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동료와 같이 일하기 불편한 점이 꽤 있으셨을 것이다. 거기다 이 동료가 열정은 남달라서 집에도 잘 안 가고 본인이 일하는데 참견도 많이 하였으니 얼마나 보기 싫으셨을까?


 전공의 시절에는 가족보다는 수술실 식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더 많다 보니 그야말로 고운 정 미운 정이 들 수밖에 없고 그만큼 그들과의 추억도 많았다. 전공의 수련이 끝난 뒤에도 의국 선생님들과는 관계들이 좋아 초기에는 매년 모여 얼굴들도 보고 수련시켜주신 스승님도 모시고 식사도 하는 기회가 있었는데 요즘에는 그런 모임이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그 선생님과 이런 모임에서 만나면 그래도 동기였다고 반갑고 수련 시 있었던 이야기들을 하면 감회가 새로웠다.


 그 선생님께서는 수련이 끝나고 지방에 내려가셔서 통증클리닉을 운영하시면서 돈을 많이 버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련 시에는 전공의 월급에 자녀도 있으셨으니 경제적으로 어려워 응급실 아르바이트도 하셔서 간혹 본인 아르바이트 시간에 일을 못하는 사정이 생기면 나에게 부탁하셔서 응급실 야간 아르바이트를 대신한 적도 있었던 것 같다.     


 그 날은 과 회식이 있어서 모두 저녁 식사와 음주를 하고 과장님들과 다른 전공의 선생님들께서는 귀가하시고 그 동기 남자 선생님은 당직이었던 날이라 응급 수술에 대한 연락을 받기 위해 의국에 남아 있었다. 나도 맥주를 한두 잔을 마신 상태였으나 논문 작성 문제로 의국으로 돌아와 일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의국 전화기가 울려 당직인 그 동기 선생님이 전화를 받았다.


"마취과 의국입니다, 뭔 일입니꺼?" 그 선생님은 마산 출신이셨는데 그때까지도 사투리를 사용하셨다.


"뭐라고요? 우야노! 아토니 블리딩이라꼬요(atony bleeding, 자궁근육무력증으로 인한 출혈)?" 


 환자는 인근 산부인과에서 자연 분만으로 아기를 출산하였는데 출산 후에도 자궁의 수축이 일어나지 않고 계속 출혈이 일어나 그 개인 병원에서 감당할 수가 없어 우리 병원으로 앰뷸런스를 타고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궁근육무력증으로 인한 출혈은 산모의 생사가 걸린 위급한 질환으로 보통 무리한 자연 분만이나 전치태반과 같은 태반의 질환이 동반된 출산인 경우 잘 발생하는 질환이다. 보통 분만이 이루어진 후에는 자궁이 자연적으로 수축을 하면서 출산 시 노출된 혈관의 출혈이 줄어들게 된다, 하지만, 출산 후에 자궁근육의 무력증이 발생하면 수축이 되지 않아 과다한 자궁 출혈이 발생하게 되는 질환이다. 요즘에는 거의 볼 수 없는 질환이다. 분만 자체가 거의 없으니... 그러나 그 당시만 해도 출산율이 유지되고 있었는지 자궁근육무력증 환자가 인근 산부인과에서 한 달에 한 번 혹은 두 번 정도 급하게 우리 병원에 왔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궁근육무력증의 경우 자궁수축제를 투여하여도 반응이 없고 출혈이 심해 환자의 혈압이 유지가 되지 않는 상황까지 도달하게 되면 결국 어쩔 수 없이 젊은 산모들의 자궁을 적출하는 수밖에 없다. 연령이 2-30 대인 산모들의 자궁을 적출하는 일이 간단한 일이 아닐 터이지만 산모의 목숨이 위태로우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우리 1년 차 둘은 급히 당직 과장님께 전화를 드렸는데 연락이 되질 않았다. 그 날이 의국 행사로 모두 과하게 음주를 하셨던 것으로 기억하며 아마도 전화 소리를 듣지 못하셨던 것 같다. 당직인 그 선생님은 다급하였고 윗년 차 전공의 선생님께 연락드릴 수 있었을 텐데 그 수술에 윗년 차 선생님은 오시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되며 이유는 생각나지 않는다. 그 당시 윗년 차라고 해보아야 2년 차 전공의 선생님이셨고 그 위로는 아무도 없었고 우리가 의국 2기였으니 위급한 상황에 연락할 곳이 없었다. 그 선생님께서는


"이 선생. 나 좀 도와도... 나 혼자는 안 될 것 같으니..."라고 말씀하셨다.


 1년 차 혼자서 자궁근육무력증 환자의 자궁 적출술 마취를 감당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당시에는 마취를 보조해주는 마취과 간호사도 없던 시절이었다. 30 년 넘게 마취를 담당한 전문의인 지금의 나도 혼자서는 역부족인 마취 케이스이다. 사실 그 날 논문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아 바쁜 상황이었으나 젊은 산모를 생각하니 모르는 척할 수가 없어 결국 그 응급 수술에 참여하기로 하였다.     


 전공의 둘이 간호사들에게 연락하고 수술실 문을 열고 환자에게 수술 중 수혈에 필요한 정맥로 확보를 위한 준비를 하고 약제를 준비하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둘의 마음도 이리저리 어지러웠다. 우리 둘이서 이 환자를 살릴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고서...    


 자궁 근무력증 환자는 응급실을 거칠 시간의 여유도 없을 만큼 대부분 다급한 상황이라 바로 앰뷸런스로 병원에 도착하면 바로 수술실로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 환자의 경우도 그 환자가 분만을 했던 병원의 산부인과 선생님께서 수혈하고 있는 혈액을 손으로 짜면서 수술실 입구까지 환자를 따라오셨다. 초짜 전공의 둘이 환자를 인계받고 이동 카를 밀고 수술실로 들어갔는데 뒤에서 그 산부인과 전문의 선생님의 다급하고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들. 잘 부탁드립니다" 하는...


 환자의 얼굴은 이미 핏기가 없이 창백한 백지장 같은 모습이었고 얼굴에는 공포감이 역력했다. 평소 같으면 이동 카 안에 계신 환자의 긴장감을 덜어주기 위해 이런 말, 저런 말을 건네는 게 나의 습관이었으나 우리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비장한 가슴을 품은 채 환자의 카를 끌고 수술실로 이동하였다    


 수술실에는 벌써 산부인과 수술을 집도하실 전문의 선생님께서 기다리고 계셨다. 나는 마취 유도 전에 먼저 혈액을 투여할 정맥로를 확보하기 위해 환자의 양쪽 외경 정맥(목에 있는 혈관으로 대량 수혈이 가능한 혈관)에 가장 두꺼운 주사를 삽입하고 최소한의 마취 약제만을 투여한 채 마취를 시작하였다. 산부인과 집도의 선생님은 바로 환자의 배를 메스로 가르고 우리는 그야말로 침묵과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조용히 수술을 진행하였다. 이미 출혈이 많이 있었던 상황이라 가능한 짧은 시간에 자궁을 적출해 내는 것이 환자의 목숨을 살리는 길이었다. 


 나와 동기 선생님은 그야말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냥 환자의 몸에 혈액만 짜 넣고 있었다. 혈압도 그 당시에는 자동 혈압계가 없었던 시절이라 우리가 직접 혈압의 압력계를 올려서 천천히 압력을 낮추면서 나오는 혈관의 진동이 크게 보이는 시점을 수축기 혈압으로 보는 방식으로 혈압을 재었는데 그 혈압을 잴 시간조차도 없었다. 단지 환자의 심전도에서 환자의 심장 박동이 강하게 리듬을 보이는 것에 의지할 뿐 환자의 적혈구 수치나 산소포화도 등을 측정하기 위한 혈액 검사를 할 시간도 역시 없었다. 혈액은행에서 보내온 혈액을 타러 한 명은 주기적으로 뛰어가고 한 명은 혈액을 짜고 얼마쯤 흘렀을까? 


 마침내 출혈이 있는 자궁을 적출하고 나자 석션(수술 시야의 혈액, 기타 액체를 압력을 통해 제거하는 도구)을 통해 계속 배출되었던 환자의 혈액이 급격하게 감소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우리는 환자의 수축기 혈압을 잴 수 있었고 다행히 100 mmHg 이상은 되는 것으로 보였다. 우리는 모두 한시름 놓았고 초짜 전공의 둘은 신이 나서 수술이 끝나서 환자를 중환자실로 이송할 때까지 으쓱한 마음으로 환자를 돌보았다.


 다음날 우리 마취과는 초짜들이 한 그 날의 마취에 대해 말이 많았는데... 1년 차 둘이서 겁도 없이 과장님께 연락도 드리지 않고 마취를 했다는 둥, 그나마 환자가 살아 다행이라는 둥... 집도하신 산부인과 과장님께서는 둘이 마취를 잘했다고 칭찬해 주셨다고 했다.    


 나는 지금도 한 달에 6번 이상 응급 수술을 담당하는 당직을 선다. 그러나 당직인 날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좋아하는 맥주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으며 핸드폰을 항상 나의 주변에 둔다. 그리고 요즘은 병원과 집이 먼 관계로 응급 콜 당직 날에는 교통이 막히는 저녁이 지나서 교통이 원활할 때 즈음 귀가를 한다. 혹시나 있을 응급 수술에 대한 대비로...     


 몇 년 전 당직 전공의가 그 날 전공의들끼리의 모임이 있어 과하게 술을 마시고 응급 수술에 관한 전화를 받지 못해 신경외과 응급 수술의 진행에 차질을 주었던 일이 발생한 적이 있다. 나는 웬만하면 전공의들에게 화를 내지 않지만, 그때는 정말 화를 많이 냈던 것 같다. 


 응급 수술은 정규 수술보다 위험도가 높은 것으로 되어있다. 갑자기 정해진 수술일수록 환자의 상태는 수술을 위한 준비가 덜 되어있는 경우가 많으니 합병증이나 문제가 더 쉽게 발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응급 수술에 적어도 의료진들은 맑은 정신으로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부부는 둘 다 맥주 마니아여서 둘이 토닥거리고 싸우다가도 맥주를 마시면서 화해를 한다. 그래서 나에게 한 달에 당직이 그나마 6번 정도인 걸 감사해한다.    


 술의 신인 ‘바쿠스’를 그린 카라바조 역시 살아생전 술을 좋아하고 술을 마신 후 사고도 많이 일으켰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그린 바쿠스는 자신의 친구를 모델로 삼아 그렸다고 하는데 전통적인 신의 모습이라기보다는 너무나 인간적인 술에 취한 젊은이를 그려 넣었다. 때가 낀 손톱, 술에 취한 붉은 얼굴과 손, 관능적인 입술과 초점을 잃은 듯한 눈동자로 보아 술의 신도 술을 먹으면 취하는 가 보다.        



     

제목: Bacchus (바쿠스,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1596, 이탈리아 우피치 미술관 소장)    


카라바조는 바로크 미술의 개척자로 바로크 미술의 특징인 배경은 어둠이 강조되었고 인물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처럼 밝고 화려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술의 신인 바커스가 매우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으며 로마 시대의 향락적인 사회에 대한 관조적 표현이라고 한다. 출처: Wiki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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