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취통증의학과 의사라서 4 화
마취과 의사들은 마취약제를 직접 처방하고 위험한 약제들을 보관하고 관리한다. 또한 다른 과 의사와는 다르게 마취 간호사가 없거나 간호사가 다른 보조업무가 있는 경우 혹은 전공의 시절에는 약제들을 직접 주사기에 준비하거나 수액, 혈액들을 직접 투여한다. 그러다 보니 하루에도 수많은 약제의 앰플, 혹은 약병들과 씨름을 하게 된다.
약제들은 모두 유리 제품에 보관되기 때문에 약제들을 준비할 때 전공의 1년 차 때는 미숙함으로 이러한 유리에 매일 손가락이 베이고 찔려 하루도 손이 성할 날이 없었다. 마취과 내에서 특히 관리되는 약제들은 향정신성 약물들과 아편 제제들이다. 이 약제들은 다른 약제들보다도 관리를 철저히 하여 보통 금고에 보관하게 되고 환자에게 처방된 후 회복실 간호사를 통해 약제를 꺼내서 환자에게 투여하고 있다. 이러한 특별 관리되는 약제들은 의료진들조차도 본인 맘대로 꺼내서 쓸 수 없게 철저히 관리되어야 하는 것이 원칙이고 현재 그런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불과 10년 전만 해도 이런 약제들이 철저하게 관리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다 보니 의료진들이 이러한 향정신성 약제들이나 아편 제제들에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이를 제재할 중간 관리자도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에 마취과 전공의들은 근무와 교육 과정이 힘들었고 또한 청춘으로 인해 발생하는 다양한 사건들로 인해 지치고 힘들 때 이러한 약제들을 습관적으로 사용했던 전공의들을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경험한 적이 있다.
대학 병원의 전임의 시절이었으니 지금으로부터 약 25년 전쯤, 토요일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토요일에도 근무를 하였지만 정규 수술은 없었고 아침부터 과 회의실에서 증례 발표 회의가 열렸다. 오전 9시 시작인지라 8시 50분쯤 회의실에 앉아서 오늘은 어떤 열띤 토론들이 있을까 기대에 부풀어 앉아 있었다.
토요일 증례발표회에서는 각 교수님들과 교수님께서 맡은 파트를 돌고 있는 전공의들이 돌아가면서 특이한 증례들을 한 가지씩 들고 나와 발표하고 이에 대해 다른 파트의 교수님들이나 전공의들이 질문하는 식이었다. 증례 발표에서의 토론이 그야말로 아테네 학당처럼 뜨거웠다고나 할까? 싸움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각각의 의견에 불꽃 튀는 교수님들의 논쟁들에 지켜보는 전공의들은 늘 재미있고 유용한 지식도 배울 수 있는 흥미로운 시간이었기에 늘 전공의들이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그러나 그날은 회의가 시작되어야 하는 시점이 한참 지났는데도 교수님들께서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30분이 지난 시점에서도 전공의들 일부도 참석하지 않았고 회의실에 있던 전공의와 전임의들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였다. 당직인 전공의 1년 차가 수술실 가운을 입은 채로 회의실에 울면서 들어왔다. 우리는 모두 무슨 일인지 놀랐는데 그 전공의가 울면서
"오늘 회의는 취소되었어요.
ㅇㅇ 선생님이 당직실에서 방금 사망해서요.
교수님 들깨서 모두 그 선생님 CPR(심폐소생술)하시느라....
오늘은 의국 회의 없다고 전하라고 해서요.. “
하고 울먹거렸다.
ㅇㅇ선생님은 당시 전공의 4년 차 선생님으로 내가 전임의 초반에 소아 병원에서 근무할 때 취프 선생님(chief resident, 보통 4년 차 전공의를 지칭)이었기에 마취과 사무실에서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농담도 잘하던 유쾌한 총각 선생님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의국원 모두가 서로 부여잡고 울었던 기억이 난다.
사연을 들어 보니 ㅇㅇ선생님이 당직실 침대에 누워 있었고 회의 시간이 다 되도록 일어나지 않아 3년 차 선생님이 깨우려고 보니 입술이 파란 것이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취과 교수실에 연락하고 교수님들이 모두 모여 심폐소생술을 하고 난리가 났지만 결국은 소생을 못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평소에 그 선생님이 불면증이 있어 가끔 바륨이라는 수면제를 먹는 것은 동료 전공의들도 알고 있었는데 그 날의 사인은 '펜타닐'이라는 마약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후문으로는 그 당시 선생님이 여자 친구와 헤어진 후 심적으로 괴로운 상태였다고 했다.
그 후 흉부외과 파트를 근무할 때였다. 흉부외과 수술 중 특히 심장 수술의 경우 심장 수술을 하는 중간에는 흡입마취제를 사용하지 못하고 수면제와 과량의 아편 제제를 심폐 회로에 투여하여 마취를 하게 된다. 그 심폐 회로에 투여되는 아편 제제의 용량이 매우 고량이라 보통 수십 앰플의 펜타닐이라는 아편 제재가 한 번에 사용되었다. 그러다 보니 아편 제재가 한 개쯤 분실되거나 소실된다고 해도 아무도 모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파트를 돌던 전공의가 징계를 맞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유는 펜타닐을 습관적으로 빼돌리고 본인이 사용하던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당시 부인이 무척 미인이었고 어린 아들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 전공의였는데 그때 당시는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후 아편 제재를 습관적으로 맞던 또 다른 마취과 의사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고등학교, 대학 후배였고 마취과 전공의 때도 뛰어난 전공의였다고 들었는데 어쩌다 그리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내가 한 중소 병원에서 마취과 전문의로 일을 하다가 지금의 병원으로 급하게 옮기면서 그 병원에서는 나의 후임자를 아직 구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병원에서 그 후배와 연락이 되어 그 후배가 내 자리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하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근무 첫날 열심히 근무하던 후배가 갑자기 사라져서 다른 선생님들께서 찾다가 당직실에 쓰러져 있는 후배를 발견하였다. 이번에도 원인은 펜타닐 과다 복용. 후배는 펜타닐을 습관적으로 사용하던 참이었고 약을 구하기 위해 병원에 취직한 것이었다. 이 소식을 나중에 전해 듣고 전 근무지에 어찌나 미안하던지... 후임자를 구해 놓지 못하고 급하게 떠나게 된 것도 죄송한데 후배가 그런 일까지 일으키자 정말 뭐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죄송했다.
이번 이야기는 정말 내가 직접 겪은 일인지라 지금도 생각하면 무섭기도 하고 가슴이 떨린다. 아침 출근하여 내 연구실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당시는 아마도 6시 반 정도면 출근했던 것 같은데 그 시간에 수술실이나 마취과는 미화 담당하시는 아저씨나 여사님들밖에는 없으셨다. 갑자기 누군가 내 연구실 문을 급하게 두드리시는 것이었다. 문을 열어보니 수술실의 미화 담당 아저씨셨다.
"과장님. 저기 남자 전공의 화장실이 문이 안 열리기에 자세히 보니 화장실 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 같아요"라고 다급하게 말씀하셨다.
" 네? 그럴 리가... 제가 같이 가 볼까요?"
나는 걱정 반, 두려움 반인 심정을 안고 아저씨를 따라 남자 전공의 탈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로 어떤 남성이 화장실 안에 쓰러져 주저앉아 있는 모습이 문틈으로 조금 보였는데 문제는 화장실 문이 안으로 밀고 들어가야 하는 문인데 남자가 문과 세면대 사이에 앉아 있어 아저씨와 나의 힘으로는 어찌 문을 열 방법이 없었다. 더구나 억지로 문을 열다가 남자가 다칠 수도 있을 것 같았고..
아저씨와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마침 외과 인턴 선생님이 탈의실에 들어왔다. 나는 그 인턴 선생님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어찌어찌하여 문을 열고 화장실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들어가 보니 우리 과 전공의 2년 차 선생님이었다. 얼굴은 이미 푸른빛이었고 시반도 보이는 상태였다. 몸은 굳은 채로 덩그러니 손을 앞으로 하고 무릎은 굽히고 벽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숙인 모습... 그리고 그의 푸른 수술실 가운 앞주머니에 주사기 하나, 후두경 하나가 꽂혀 있었다.
인턴 선생님, 아저씨, 나 셋이서 그 전공의 선생님을 화장실에서 탈의실로 옮겨 눕히니 굳어 있던 몸들이 그래도 펴지면서 똑바로 누운 자세가 되었다. 그때 마침 당시 마취과 주임 과장님이 오시고 다른 선생님들도 모여 심폐소생술을 시행하였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미 시반이 있었고 사후 강직도 보이는 상태였기에 의미 없는 심폐소생술인 것 같았고 너무나 큰 충격에 손가락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선생님을 회복실로 옮기고 심전도 측정을 하여 사망한 것을 확인하고 하얀 포를 구해와 선생님의 몸에 덮어 드렸다. 그리고 모든 수술실과 회복실은 울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아침 첫 수술이 진행되어야 할 8시 30분이 되어가고 있었다. 진료에 임해야 할 우리들은 터져 나오는 눈물을 막으려고 턱에 힘을 주고는 각자가 맡은 소임을 하기 위해 각 수술방으로 흩어졌다. 회복실 간호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금 후 경찰관들과 가족들이 도착하고 사인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듯했다. 나는 내가 맡고 있는 업무를 하느라 그 후 경찰관들과 가족들의 대화나 기타 진행 사항은 잘 알 수 없었고 많은 부분은 기억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그 전공의 선생님의 사인도 펜타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취과를 꼭 하고 싶다고 했던 선생님. 그 전공의 선생님이 펜타닐을 습관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연세에도 곱디고운 전공의 선생님의 어머님을 나중에 장례식장에서 뵈었을 때 자식을 하루아침에 잃은 그 슬픔을 어찌 견디실지 참으로 가슴 아파 드릴 말씀이 없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이 젊은 마취과 선생님들이 왜 이런 안타까운 상황으로 자신을 몰고 가고 그 가족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과에 직면하게 하였을까 가끔 생각해 본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선택을 하였을까? 자식을 키우는 부모가 되고 보니 안타까움이 배가 된다.
삶이란 험난한 파도 속에서 중심을 잡고 헤엄쳐가며 앞으로 조금씩 전진하기란 참으로 힘들다. 나 또한 가끔은 이 삶 속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가만히 잠수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이 있었다. 전공의 시절부터 지금까지 진료하면서 받은 스트레스, 가정일로부터의 고통들, 인간관계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많은 고통들이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어느덧 반평생 넘게 살아 보니, 이제는 전진에 목표를 두기보다는 파도에 몸을 맡기고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나의 몸을 지켜보고 있게 되었다. 이리저리 세상 파도에 휩쓸리다가 보면 언젠가는 어딘가에 닿아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면서...
마취과를 하고 싶어 하는 인턴 선생님들이 과거보다는 늘어난 추세이다. 우리 때는 비인기과여서 하고 싶은 마음만 있으면 지원이 가능한 과였는데 이제는 병원마다 지원 시 경쟁이라고 하니 세상이 많이 바뀌긴 했나 보다. 나는 마취과로 들어오시는 전공의 선생님들께 다른 것보다도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선생님들, 아무리 힘드시더라도 약물에는 의존하지 마세요. 당신과 당신의 가족이 불행해집니다. “
마약의 위험성을 알리고 교훈을 전달하고자 화가 자신이 각종 마약과 환각제를 복용한 후 자신의 자화상을 그린 브라이언 루이스 사운더스의 그림을 보면 약 8000점 이상의 자화상이 모두 다르고 괴기하기까지 하다. 그의 그림들의 제목들을 보면 마취과 의사인 나 자신도 모르는 다양한 마약 성분과 약제들이 나와 경악을 금치 못하는데 참으로 예술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정말로 모르겠다.
제목: Morphine (모르핀, 브라이언 루이스 사운더스 작품)
작가는 1995년부터 다양한 종류의 마약을 복용한 후 환각 상태에서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캔버스에 그리기 시작해 약 8000점의 자화상을 그렸다고 한다. 각각의 약물마다 다르게 보이는 자신을 발견하고 이를 작품화하였다. 출처: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