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술실이라는 극장 (Operative theatre) 5 화
우리나라 과거 미술 작품들을 보면 풍경화, 정물화가 대부분이고 간혹 유명인의 초상화는 있으나 자화상은 매우 드물다. 모델비가 부족하다 보니 자화상을 많이 그리게 되었던 서양화가들과는 극명하게 대조된다고 하겠다.
18, 19 세기에 이르러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하니 서양에 비하여 많이 늦은 셈인데 이 또한 문화적인 차이와 관련 있다고 나름대로 추측해본다. 18세기의 자화상으로 단연코 손꼽이는 작품은 윤두서의 자화상이다. 섬세한 표현과 자신의 내면을 강하고 위험 있게 표현한 이 작품은 용맹한 호랑이를 연상시킨다. 얼굴을 화면 위쪽으로 배치하여 중량감을 주고 수염을 포함한 묘사가 그야말로 섬세하고 치밀하며 전체적으로 중후한 자신의 용모를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상대방을 압도하는 윤두서의 눈초리를 보고 있자면 지금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으나 치열한 삶을 살다 가신 한 의사분이 떠오른다.
환자를 열성적으로 진료하시듯 본인의 병도 그렇게 열심히 보살피시고 끝까지 치료의 끈을 놓지 않으셨으나 안타깝게도 젊고 한참 진료하실 나이에 이 세상을 떠나신 선생님. 정열적으로 진료하시고 정열적으로 운동하시고 매사에 정열이 넘치셨던 선생님. 지금은 가신지 몇 년이 흘렀건만 가끔씩 그 큰 키의 멋졌던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 병원의 흉부외과 수술이 암과 관련한 수술을 주로 하다 보니 심장 수술은 없고 폐암, 식도암, 폐로 전이된 암 수술이 대부분이지만 마취과 의사가 볼 때는 조마조마 한 마음이 들 때가 많다. 수술 부위의 혈관이 다 주요 혈관들이고 폐동맥이나 정맥이 손상되면 빨리 손상 부위를 막지 않는 한 순간적으로 심장으로 들어가는 혈액이 감소하기 때문에 다른 혈관 손상보다 저혈압이 심각하게 온다. 요즘은 흉관경으로 대부분을 수술하다 보니 과거에 비해 마취과 의사도 같이 수술시야를 보게 되는데 대동맥은 말할 것도 없고 때로는 펄떡거리고 뛰는 심장도 보이니 더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그런 어려운 수술을 담당하시는 흉부외과 전문의 선생님이셨다.
키도 크고 운동도 열심히 하셔서 매일 새벽 병원 근처의 헬스장에서 2시간씩 러닝머신에서 달리기를 하셨다. 그러나 수술 집도의와 마취통증의학과 의사는 개와 고양이처럼 환자에 대해 같은 견해를 갖지 못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수년간을 같이 근무하다 보니 환자의 고유한 문제들로 인해 서로 의견을 달리하면서 언성을 높이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 마취과 전문의 선생님과 그 선생님 사이에 환자 문제로 부딪히지 않았던 선생님이 없었으니 선생님 고집도 참 대단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인지 그 선생님과 마취과 전문의들 간에 수술장에서는 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 그러나 그 선생님께서는 사적으로는 자상한 부분이 많으셔서 장기 해외 연수를 떠나는 마취과 전문의의 송별회를 꼭 챙겨 주셨다.
선생님의 이런 자상한 면에 나도 놀란 적이 있었는데 내가 하루에도 스무 번씩 소독약으로 손을 씻으면서 핸드크림은 하루에 한 번 바를까 말까 하는 성격인지라 젊었을 때부터 손등이 할머니 손등처럼 거칠었는데 한 번은 핸드크림을 주시면서 손이 너무 늙었다고 관리 좀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 간암이라는 소문이 수술 방에서 들려왔다. 설마 그렇게 건장하고 열정적인 분이 아플까 싶었는데 한국에서는 간이식 대상이 안 되어 간이식받기 위해 중국에 가셨다는 소문을 얼마 후 듣게 되었다. 그리고 몇 달 후 선생님께서는 예전의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셔서 다시 진료를 보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한 1, 2년이 지난 어느 날 흉부외과 수술 스케줄에 선생님의 성함이 올라와 있었다.
간암이 폐로 전이되어 전이성 폐암을 제거하는 수술이 예정된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도 수차례 폐로의 전이가 발견되고 그때마다 흉부외과 수술을 받으셨다.
어느 날인가 퇴근하려고 하는데 앞에 선생님으로 보이는 키 큰 남성이 지팡이를 짚고 쩔뚝거리면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설마 했는데 앞에 가서 보니 그 흉부외과 선생님이셨다. 나중에 알아보니 요부 척추 내 척수액 쪽으로 전이가 되어 방사선 치료를 받는 중이고 그 합병증 때문에 다리가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니 반갑게 인사를 하시면서 주차장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지금은 무슨 이야기였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내가 나이 듦에 관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선생님께서 '그래도 오늘이 남은 내 인생 중 가장 젊은 시절이다'라는 내용의 이야기를 해주셨던 것 같다.
그 후에도 선생님께서는 꽤 여러 번의 수술을 받으셨고 뇌로도 암이 전이되어 방사선 치료도 받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생님은 수술 중간중간 항암제나 방사선 치료에 대해 본인이 직접 처방과 타과 의뢰를 하시는 등 평소 자신이 돌보던 환자를 돌보듯 자신을 그렇게 치료하셨다. 그리고 수술도 선생님의 밑에서 일하고 있는 흉부외과의 후배 전문의에게 부탁하셔서 집도하게끔 하셨다.
선생님이 치르신 많은 수술 중 50%는 내가 마취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매번 마취를 담당하면서 점차 그 건장하셨던 선생님의 체력이 약해짐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나중에는 전신마취 약제를 잘 견디지 못하시고 금방 혈압이 떨어져 혈압상승 제제를 계속 투여해야 할 정도였다. 그 와중에 장에도 문제가 생겨서 결국은 식사도 잘 못하시게 되었다. 그러나 수술실에 입실하실 때는 그 늠름하던 목소리가 여전하였고 나중에는 너무 자주 수술실에 오시는 것에 대해 미안해하셨다.
어느 출근길, 로비에서 키 큰 환자분이 수액 걸이에 수많은 수액을 걸고 코에는 위액 배액 관을 꼽고 운동을 열심히 하고 계시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뒷모습만 봐도 그 흉부외과 선생님임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장의 문제가 심각해져 금식 상태로 장 유착과 폐쇄를 해결하기 위해 열심히 운동하시는 듯했다. 차마 아는 척할 수가 없어 선생님께서 가시는 길이 아닌 다른 길로 향하였다.
얼마 후 선생님의 부고를 알리는 핸드폰 문자가 왔다. 병원 장례식장 1호실. 주말로 기억되는데 보통 주말에는 쉬고 외출하기 싫은 것이 직장인들의 생리여서 부고가 와도 가능한 주중에 가게 되는데 이번 부고는 알게 되자마자 가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많은 병원 직원들이 문상을 하기 위해 모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장례식장에 가면 보통 조의금을 내고 고인에게 절하고 상주들에게 인사를 드리는 것이 관례인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상주들, 특히 사모님 뵐 자신이 없었다. 선생님께서 병실에 입원해 계실 때 문병을 가서 뵌 적이 있었지만 기억을 못 하실 것 같기도 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릴 적당한 말도 떠오르지 않아 그냥 조의금만 내고 슬그머니 장례식장을 빠져나왔다.
얼마 후 수술실 입구의 신발장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선생님의 수술실용 신발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원래는 하얀 수술실용 신발인데 색이 좀 바래 있었으나 신발에 새겨진 선생님 성함만큼은 선생님의 성격을 보여주듯 또렷이 남아 있었다. 주인 잃은 신발을 보자 마음이 많이 아파왔다. 그 후 그 신발이 보이지 않았는데 혹시 누군가가 그냥 버린 것이 아니길 빈다. 한동안은 흉부외과 수술의 마취를 담당하러 그 수술실에 들어갈 때마다 선생님 생각이 나서 눈 주변이 시큰거렸다
선생님. 떠나시기 전에도, 떠나시고 나서도 인사를 제대로 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선생님과 언성을 높이고 논쟁했던 기억, 또 동료로서 자상히 챙겨주시던 일들이 이제는 선생님과의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가시는 날까지 보여주신 삶과 직업에 대한 정열에 깊이 존경을 표하며 부디 편안히 잠드시길 기원합니다.
제목: 윤두서의 자화상 (윤두서 작품, 1710. 후손이 녹우당에 소장)
동양 최고의 자화상으로 꼽히는 작품으로 가는 선으로 묘사된 수염으로 인해 안면이 강조되어 예리하고 날카로운 눈동자와 더불어 강한 힘과 생기를 느끼게 하고 거짓 없는 그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대한민국 국보 240호로 지정되어 있다. 목탄으로 그려진 의복 부분은 퇴색되어 잘 보이지 않는다.
출처: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