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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급자에서 이용자로, 시각의 전환

2장. 아카이브의 현행화

by 아키비스트J

기록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모두 기록을 하며 살아갑니다.

아침에 일어나 스마트폰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SNS에 사진을 올리고,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고, 업무 문서를 작성하고, 일기를 쓰는 순간까지. 문자, 이미지, 데이터로 이루어진 정보를 발자국처럼 남겨온 개인과 집단의 본능적 행위가 바로 기록하기입니다. 그렇다면 기록의 개념은 무엇일까요?


학문적 정의와 일상적 의미의 간극

새로운 기록학 교과서 『기록관리의 세계』(한울, 2023)에 따르면, 학문적 관점에서 기록은 활동의 증거입니다. 조직활동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뒷받침하는 권위 있는 정보원이며, 개인과 집단의 기억을 보존함으로써 인류의 지식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죠.


그런데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기록의 뜻을 찾아보면 어떨까요?

주로 후일에 남길 목적으로 어떤 사실을 적음. 또는 그런 글.
운동 경기 따위에서 세운 성적이나 결과를 수치로 나타냄.
특히, 그 성적이나 결과의 가장 높은 수준을 이름.
네이버 국어사전 '기록' 검색 결과


일상에서 기록은 이렇게 단순합니다. 무언가를 적는 행위, 또는 그 결과물. 네이버 사전 시소러스가 말해주는 유의어는 설명책임성이나 조직의 투명성 같은 거창한 개념어가 아니라 마크, 기입, 노트, 글, 메모, 문서, 서류와 같이 기록물의 하위 개념이거나 기록하는 행위에 관한 단어들입니다.

KakaoTalk_Photo_2025-11-12-10-27-43.png 네이버 국어사전 '기록' 검색 결과 유의어/반의어


관리의 대상인가, 행위의 결과물인가

기록학에서 기록은 관리의 대상이 됩니다. 쉘렌버그(Theodore R. Schellenberg)의 숲 속에서 선별과 통제가 필요한 대상으로 존재하죠. 그러나 일반 사람들에게 기록은 생산자 관점의 행위 결과물입니다. 어떤 내용을 어떤 구조에 담을지 고민하며, 어떤 목적으로 자신의 정보를 기록할지 결정합니다.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 찍든, 새로운 구성원 영입 공고에 낼 이력서를 쓰든 말입니다. 이 간극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요?


위로부터의 기록학

한국 사회에서 기록학은 법률 제정과 제도를 통해 위로부터 시작된 학문이었습니다. 공공기록물관리법을 중심으로 조직적, 사회적, 거시적 관점에서 기록관리의 중요성에 집중해 온 것이죠. 물론 기록의 사회적 의미와 가치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잘 관리된 기록을 통해 행위를 증거하고 사회문화적 가치를 후대에 남기는 것은 역사적으로 기록이 가진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봅니다. 우리는 정말 '관리자 관점'에서만 기록을 바라봐야 할까요?




디지털 시대, 기록의 새로운 특성


디지털 시대의 기록은 종이 시대와 근본적으로 다른 특성을 가집니다.


쉬운 생산, 복제, 변형, 삭제

디지털 환경에서 데이터와 정보는 쉽게 생산됩니다. 클릭 몇 번이면 문서가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쉽게 복제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원본과 사본의 구분이 무의미해집니다. 또한 쉽게 변형됩니다. 그렇기에 버전 관리가 복잡해집니다. 실수든 의도했든 삭제하기도 쉽습니다. 그리고 앞선 세 가지 특징(쉬운 생산, 복제, 변형) 때문에 완전한 삭제도 어렵습니다. 이런 특성들은 전통적인 기록관리 패러다임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복잡성을 만들어 냅니다.


행위와 결과물의 동시성

더 중요한 변화는 기록이 행위이자 동시에 결과물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카카오톡으로 대화를 나누는 순간, 그것은 커뮤니케이션 행위이면서 동시에 대화 기록이 됩니다. 노션에 회의록을 작성하는 과정 자체가 팀의 지식 축적 과정입니다. 유튜브에 영상을 업로드하는 것은 콘텐츠 제작 행위이자 즉시 아카이빙입니다. 기록은 더 이상 '사후에 정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 서사의 시대


나만의 이야기가 경쟁력이 되는 시대

스마일게이트 퓨처랩 재단의 송길영 이사는 저서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경쟁력 있는 상품은 '서사(narrative)'입니다. 성장과 좌절이 진실하게 누적된 나의 기록은 유일무이한 나만의 서사입니다." 나의 기록은 나의 고유성을 보장함과 동시에, 축적되어 갈수록 진정성을 발휘한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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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를 만드는 사람들

이미 다양한 영역에서 사람들은 자신만의 서사를 만들고 있습니다. 디자이너의 포트폴리오는 작업 과정과 결과를 담은 시각적 서사입니다. 창업가의 사업화 메모는 아이디어에서 실행까지의 여정이며, 개발자의 GitHub 커밋 그래프는 코드로 쓴 성장의 기록입니다. 예술가의 작업 노트는 창작 과정과 고민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환자의 투병 일기가 그려진 V-log는 하루하루 변화하는 몸과 마음의 기록입니다. 부모의 육아 앱 속에는 아이의 성장이 데이터로 담겨 있는 사랑의 기록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기록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록들은 조직의 설명책임성이나 사회적 가치라기보다는, 개인의 정체성과 고유성을 증명하는 서사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전문가의 역할 재정의


이런 변화의 흐름 가운데 기록 전문가는 무슨 일을 해야 할까요? 힌트를 얻기 위해 '플레이어'들의 사례를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개항로프로젝트 '족장' 이창길의 조언

인천 개항로프로젝트의 '족장' 이창길 대표는 로컬에서 성공을 꿈꾸는 청년들에게 이렇게 조언했습니다. "기록이 쌓여 서사가 되고 팬덤이 된다. 자료를 남기고 기록을 정리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비플의 그림과 인도네시아 대학생의 사진처럼 시간이 축적된 아카이빙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로컬에서 공간을 운영하고 싶은데 가진 것도 보여줄 것도 없다면 오픈 과정을 소소하게 사진으로 찍어 인스타그램 계정에 공유해 보자. 동영상 편집을 다룰 줄 안다면 유튜브 채널에 브이로그 형식으로 기록하는 것도 좋다. 서사를 만들고 팬덤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창길, 『로컬의 신: 서울을 따라 하지 않는다』(몽스북, 2023)에서 발췌) 이런 인식이 저변에 있는 개항로 프로젝트에서는 '개항로 정신'을 밝히고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제1조는 '자신(팀)만의 고유한 브랜드여야 한다'입니다.

KakaoTalk_Photo_2025-11-12-10-33-21.png 마계인천 개항로프로젝트 소개 페이지에서 갈무리 https://magaeincheon.com/about_gaehangro_project


관리자에서 조력자로

전통적으로 아키비스트는 '기록의 사원' 속에서 기록의 선별, 평가, 폐기, 접근통제에 대한 권력을 가진 관리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개인과 집단이 자신의 서사를 만들어가도록 돕는 조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전문성의 영역은 우리가 기존에 '기록'이라고 불렀던 관리의 대상이 무엇과 차이가 있는지 확인하고, 현실에 맞게 현행화하는 작업을 거쳐야 합니다. 그를 위해서 현재에 이루어지고 있는 기록 행위와 패턴을 귀납적으로 읽어내고 해석해야 합니다. 그에 따라 대중이 가진 기록에 대한 의미와 인식 체계를 이해하고, 효용가치를 새롭게 발견해야 합니다.


그 효용가치를 발견하는 과정에 거시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Top-Down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초개인화 사회를 맞이하고 있는 AI 시대에 개개인의 활동에서 얻을 수 있는 공통의 감정, 즉 공감대와 공명을 찾아내는 Bottom-Up 체계를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합니다. 그리고 난 후 한 사람의 데이터 간 맥락을 연결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도구를 제공해야 합니다.




시각을 전환해야 할 때


법률이 보여주는 시각

공공기록물관리법을 비롯해 기록과 비슷한 영역에 있는 여러 법률의 제1조(목적)만을 모아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 제1조(목적)
이 법은 박물관과 미술관의 설립과 운영에 필요한 사항을 규정하여 박물관과 미술관을 건전하게 육성함으로써 문화·예술·학문의 발전과 일반 공중의 문화향유 및 평생교육 증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도서관법] 제1조(목적)
이 법은 도서관 지식정보에 관한 국민의 알 권리 보장과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의 책임 등을 정하고 도서관의 운영과 서비스, 사회적 역할에 관한 기본적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국가 및 사회의 문화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공공데이터의 제공 및 이용 활성화에 관한 법률] 제1조(목적)
이 법은 공공기관이 보유·관리하는 데이터의 제공 및 그 이용 활성화에 관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국민의 공공데이터에 대한 이용권을 보장하고, 공공데이터의 민간 활용을 통한 삶의 질 향상과 국민경제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제1조(목적)
이 법은 공공기관의 투명하고 책임 있는 행정 구현과 공공기록물의 안전한 보존 및 효율적 활용을 위하여 공공기록물 관리에 필요한 사항을 정함을 목적으로 한다.


박물관, 도서관, 공공데이터는 모두 국민의 향유, 이용권 보장, 활용을 말하는데, 유독 공공기록물만 조직의 투명성과 보존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물론 제도가 모든 것을 이야기해주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기록계의 특성상 우리는 공공기록물법에 우리의 사명을 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공급자 중심에서 이용자 중심으로

전통적 기록관리는 공급자(생산기관, 관리기관) 중심이었습니다. 기록을 만들고, 분류하고, 보존하고, 제공하는 주체의 관점에서 모든 것이 설계되었죠. 그러나 디지털 시대의 기록은 이용자(생산자이자 활용자) 중심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실제로 기록하는 방식, 기록을 활용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그에 맞는 도구와 시스템을 제공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보존 중심의 사고에서 활용과 연결 중심의 사고로 전환해야 합니다. 기록은 안전하게 쌓아두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맥락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다른 정보와 연결되고,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는 데 활용되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관리자가 모든 것을 통제하는 시스템에서, 개인과 집단이 스스로 기록할 수 있는 역량을 강화하는 시스템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기록의 현행화를 향하여

결론적으로 기록의 개념을 현행화한다는 것은 기록을 관리의 대상이 아닌 행위의 결과물로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조직 중심이 아닌 데이터 생산자 중심으로 시각을 전환하고, 보존이 아닌 활용을 최우선 가치로 두며, 통제가 아닌 기록 생산자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을 지원하는 데 아카이브가 제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자신만의 서사를 보여주는 것은 AI가 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그야말로 창의적 활동 그 자체이기에, 평범성과 일반적 지식을 갖춘 AI가 기술적으로 창조해내지 못하는 일입니다. 남들과는 다른 차별성이자 경쟁력 그 자체입니다. 자신만이 생산하는 자신만의 기록에 대한 니즈가 곳곳에 존재함을 우리는 이미 확인해 오고 있습니다.


기록을 보유한 개인이나 집단이, 기록을 보유하지 않은 곳보다 자신의 정체성, 고유성, 대체불가능한 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과정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기록의 내용과 맥락을 개인이나 집단이 스스로 오랜 시간 쌓아나가고, 그걸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돕는다면, 그것이 바로 기록 전문가의 역량이 아닐까요? 개개인이 각자 다른 채도와 광도를 가진 보석으로 빛나는 반짝반짝한 모자이크화 같은 사회를 꿈꿔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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