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아카이브의 현행화
2절에서 우리는 기록의 개념을 현행화하고, 공급자 중심에서 생산자 중심으로의 시각 전환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그렇게 축적된 기록이 서사(narrative)로 구성되는 과정과, 그 서사가 실제로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구체적 사례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튀르키예 이스탄불 베이오을루 지역에 위치한 순수박물관(Masumiyet Müzesi)은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묵이 동명의 소설과 함께 구상한 박물관입니다. 소설 『순수박물관』(2008)의 주인공 케말이 사랑했던 퓌순을 기억하기 위해 수집한 물건들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박물관은 3개 층에 걸쳐 70여 개의 유리 진열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진열장은 소설의 한 장(章)에 대응하며, 해당 장면에 등장하는 물건들을 담고 있습니다. 퓌순이 피운 담배꽁초 4,213개, 그녀가 사용한 일상용품, 1970~80년대 이스탄불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수집물들이 체계적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 박물관의 특징은 철저히 개인의 주관적 시선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파묵은 인터뷰에서 "공공성, 민족성, 공익성을 표방하는 박물관이 아닌 개인 삶의 고통, 슬픔, 인내, 즐거움, 불안과 같이 인간이 겪은 감정과 경험을 표현하는 박물관"을 지향한다고 밝혔습니다.
전통적인 박물관이 객관성과 중립성을 추구한다면, 순수박물관은 한 개인(케말)의 극도로 주관적인 애정과 집착을 전시합니다. 4,213개의 담배꽁초를 수집하는 행위는 객관적으로는 비합리적이지만, 바로 그 비합리성이 사랑의 강도를 증명합니다.
중국계 미국인 인문지리학자 이 푸 투안은 『공간과 장소』에서 "공간은 장소보다 추상적이며, 우리가 그곳을 더 잘 알게 되고 가치를 부여하면서 장소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순수박물관은 이 개념을 구현한 사례입니다. 평범한 주거용 건물이었던 공간은 케말과 퓌순의 서사가 입혀지면서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파묵이 2002년부터 10년 넘게 수집한 물건들은 단순한 골동품이 아니라, 서사를 구성하는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2014년 유럽 박물관 어워드 수상은 개인의 주관적 서사가 문화적 가치로 인정받았음을 보여줍니다.
뉴욕 맨해튼 다운타운, 옛 세계무역센터 자리에 위치한 9/11 Memorial & Museum은 2001년 9월 11일 테러로 희생된 2,977명을 추모하는 공간입니다. 지상층에는 북쪽 타워와 남쪽 타워 자리에 사각 수조가 설치되어 있으며, 난간에는 희생자 전원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박물관은 단순한 추모 시설이 아닌 종합적인 아카이브로 기능합니다. 생존자들의 구술사 자료, 당시 영상과 사진, 희생자들의 개인 물품, 구조 활동 기록 등이 체계적으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레베카 솔닛은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생존자들의 증언을 분석합니다. 한 생존자는 "어떻게 하면 이 남자를 도울 수 있을까? 죽어가는 이 사람과 소통할 방법이 없을까?"라고 회상하며, 다른 생존자는 "나는 우리가 서로 잃어버리지 않도록 잠시 멈춰 서서 속도를 조금 늦추고 그들을 기다려야 했다"고 증언합니다.이러한 증언들은 객관적 사실 나열이 아닌, 극한 상황에서의 인간 심리와 행동을 기록합니다. 공포와 혼란 속에서도 발현된 이타주의와 연대의식이 드러납니다.
찰스 E. 프리츠와 해리 B. 윌리엄스는 1957년 연구 인류와 재난에서 집결현상(convergence phenomenon)을 설명합니다. '재난이 발생하면 몇 분 안에 수천 명이 재난 지역과 응급처치소, 병원, 구호센터에 모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곧이어 부탁하지도 않은 장비와 의류, 식품, 침구 같은 물품들이 재난 지역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9/11 당시에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솔닛은 "내가 우리 동네로 돌아갔을 때 몇몇 이웃들이 길모퉁이에서 돈을 모금하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뭔가 필요할 거라고 생각해서 돈을 모으기 시작한 거였다"는 증언을 인용합니다.
미국 의회도서관은 테러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9/11 웹 아카이브 구축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컬렉션 총괄 디렉터 다이앤 크래시는 20년 후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상합니다. "전문적인 관점에서는 이 컬렉션을 나중에 어떻게 제공할지 검토하고 세부사항을 처리해야 하는 게 맞지만, 그 당시에는 순간순간을 그냥 처리하고 나중에 세부 조정하도록 넘겨야 했습니다. 우리가 그 일에 뛰어들어서 컬렉션을 수집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자료는 사라졌을 테고, 그건 역사에 큰 손실을 남겼을 겁니다." 현재 이 아카이브에는 당시의 추모 사이트, 실종자 찾기 게시물, 헌혈과 기부 정보, 개인의 이야기와 사진 등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공식 기록이 아닌 개인들의 날것의 감정과 대응이 담긴 자료들입니다.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은 트라우마 사건을 겪은 이후 전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삶을 재건하는 심리적 변화를 의미합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위기를 계기로 개인이나 공동체가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현상을 설명합니다. 아카이브는 외상 후 성장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어쩌면 아주 당연한 말이겠지만, 아카이브는 증거를 보존합니다. 과거에 발생한 문제적 상황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여, 사건의 실체를 왜곡 없이 전승합니다.
그리고, 맥락을 재구성합니다. 사건 전개 과정에서 나타난 인간의 행동과 가치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어떤 원칙이 작동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이에 따라 아카이브는 성찰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아카이브를 통해 개인과 사회가 자신들의 대응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모색할 수 있습니다. 솔닛은 9/11 직후 몇 주간을 '사랑의 공동체'라고 표현하며, 이타주의와 연대의식이 발현된 시기로 평가합니다. 이러한 경험이 기록되고 공유됨으로써, 재난 대응 방식과 공동체 의식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순수박물관과 9/11 메모리얼은 모두 물리적 공간을 기반으로 한 아카이브입니다. 문서나 디지털 아카이브와 구별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공간 아카이브는 관람객에게 총체적 경험을 제공합니다. 시각 정보뿐 아니라 공간의 배치, 동선, 조명, 음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몰입을 유도합니다. 9/11 박물관의 경우 지하로 내려가는 동선 자체가 감정적 경험의 일부가 됩니다.
시간도 많이 필요합니다. 문서는 빠르게 읽을 수 있지만, 공간은 이동과 관찰에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시간은 관람객이 서사를 내면화하는 과정으로 작용합니다. 순수박물관을 충분히 감상하려면 최소 2시간이 소요되며, 그 시간 동안 관람객은 케말과 퓌순의 이야기에 몰입하게 됩니다.
전시되어 있는 개별 수집물은 공간 전체의 맥락 속에서 의미를 획득합니다. 예를 들면 퓌순의 담배꽁초 한 개는 단순한 쓰레기이지만, 4,213개가 케말의 수집 체계 안에 배치될 때 집착과 사랑의 증거가 됩니다.
전통적인 기록관리는 객관성(Objectivity)을 핵심 가치로 삼았습니다. 기록자의 주관을 배제하고, 사실을 중립적으로 기록하며, 편견 없는 관점을 유지하는 것이 전문성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순수박물관과 9/11 메모리얼의 사례는 다른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저는 기록관리에서 반사성(Reflexivity)이 새로운 가치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반사성은 기록자 자신의 위치, 관점, 편견을 투명하게 드러내고, 그것이 기록에 미치는 영향을 성찰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순수박물관과 9/11 메모리얼은 모두 감정을 적극적으로 기록합니다. 케말의 집착, 생존자들의 공포와 연대, 유족들의 슬픔이 아카이브의 핵심 내용입니다. 파묵이 말했듯이 "개인 삶의 고통, 슬픔, 인내, 즐거움, 불안"과 같은 감정이 오히려 보편적 공감을 이끌어냅니다. 객관적 사실만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인간 경험의 깊이를 감정이 담아냅니다.
이는 객관성을 포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기록은 특정 관점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중립적 기록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누구의 시선으로 무엇을 기록했는지 명확히 하는 것이 더 정직한 태도입니다.
기록 전문가는 이제 감정을 읽어내고 보존하고 전달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남긴 SNS 게시물, 이메일, 사진에는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감정이 담겨 있습니다. 그 감정을 해석하고, 맥락 속에 배치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새로운 전문성입니다.
아키비스트는 흩어진 개인의 기록을 하나의 일관된 서사로 엮는 작업을 기획하거나, 돕거나, 그에 필요한 기술을 적용해야 합니다. 시간순 정렬, 주제별 분류, 관계 파악 등의 기술적 작업뿐 아니라, 어떤 서사가 의미 있는지 판단하고 제안하는 역할이 필요합니다. 감정을 다루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윤리적 책임과 섬세한 케어가 동반됩니다. 누구의 감정을 어떻게 내보일 것인가, 개인정보와 사생활은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유족의 동의는 어떻게 구할 것인가 등의 문제를 세심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매일 출근길에 건너는 한강철교, 우리 동네 골목의 작은 가게, 학창시절을 보낸 학교. 공간에 개인의 기억과 감정이 쌓이면 그곳은 장소가 됩니다. 여러 사람의 기억이 모이면 장소성은 더욱 강해집니다. 한 사람에게는 단순한 정미소가, 50년간 그곳을 이용한 동네 주민들에게는 공동체의 중심이 됩니다.
장소성은 위에서 정의하고 아래가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개개인이 부여한 의미가 모여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런 장소의 파편들이 모여 지역이라는 모자이크를 만들고, 그 속에서 다양성에 기반한 지역의 색깔이 드러납니다.
감정이나 키워드, 가치관 체계, 밈(Meme)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사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서사는 상실을 극복하게 하거나, 의미를 창출하거나 미래를 안내하기도 합니다. 케말은 퓌순을 잃었지만, 수집과 기록을 통해 그녀를 영원히 기억합니다. 9/11 유족들은 희생자를 잃었지만 아카이브를 통해 추모하고 그들의 존재와 희생된 의미를 계승합니다. 평범한 담배꽁초가 사랑의 증거가 되고, 재난 속 작은 친절이 인류애의 상징이 됩니다. 개인의 기억이 공유되면서 집단의 정체성이 됩니다. 과거의 경험이 교훈이 되어 더 나은 선택을 가능하게 합니다. 기록이 쌓여 서사가 되고, 서사는 개인과 공동체를 성장시킵니다. 이것이 바로 서사의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