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아카이브의 현행화
아침에 눈뜨자마자 확인한 카카오톡 메시지, 출근길 지하철에서 저장한 인스타그램 게시물, 업무 중 작성한 슬랙 메시지와 구글 독스 문서, 점심시간 유튜브에 추가한 나중에 볼 동영상, 퇴근 후 노션에 정리하려다 미룬 회의록, 자기 전 핀터레스트에 저장한 인테리어 이미지. 우리는 이미 매일 수십, 수백 건의 기록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록들은 전통적인 의미의 완결된 문서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명확한 시작과 끝이 있는 종이 문서, 기안-검토-결재-보존의 생애주기를 거치는 공문서, 물리적 서류철에 정리된 맥락을 가진 자료들과 달리, 디지털 시대의 기록은 끊임없이 업데이트되는 정보 조각들입니다.
플랫폼마다 흩어진 데이터는 서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어제 저장한 PDF 파일, 일주일 전 북마크한 웹페이지, 한 달 전 메모장에 적어둔 아이디어. 이것들은 각자의 공간에 고립되어 있습니다. 왜 이것을 저장했는지, 어떤 맥락에서 필요했는지, 다른 정보와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정보는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연구자의 PDF 폴더에는 200개의 논문이 저장되어 있지만, 실제로 읽은 것은 10개 남짓입니다. 유튜브 나중에 볼 동영상 재생목록은 계속 쌓여가지만 영원히 보지 않습니다. 브런치나 Medium에 저장한 글들, 에버노트나 노션에 클리핑한 메모들, 인스타그램에 저장한 게시물들. 모두 언젠가 보겠다는 의도로 저장했지만, 결국 다시 찾아보지 않습니다.
저장 버튼을 누르는 순간, 우리는 안도합니다. 이 정보를 확보했다는 심리적 만족을 얻습니다. 하지만 저장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어야 합니다. 정보는 저장되는 순간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맥락을 잃은 채 데이터 더미 속에 묻힙니다. '언젠가 보겠지'는 결국 '영원히 안 봄'이 되어 버리지요.
정보가 풍요로울수록 관심은 희소해집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정보를 저장하지만, 그 정보들을 다시 돌아볼 시간도, 에너지도 부족합니다. 소비를 조장하는 알고리즘이든, 지식에 대한 갈망이든, 저장은 쉽지만 활용은 어렵습니다.
맥락이 없는 정보는 기억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억되지 않는 정보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정보를 찾고 저장하는 데 쓴 시간, 그 정보가 내 지식자산이 될 수 있었던 가능성, 활용했더라면 발휘했을 잠재력, 놓쳐버린 기회비용. 이 모든 것이 맥락의 상실과 함께 사라집니다.
1절에서 살펴본 허버트 사이먼의 통찰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정보가 소비하는 것은 수신자의 주목입니다. 정보가 넘쳐날수록 주목은 더욱 희소해지고, 그 결과 정보의 가치는 하락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더 많은 정보를 저장하면서 동시에 더 적은 지식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정보는 넘쳐나지만, 의미 있는 지식으로 연결되지 못합니다. 저장만 하고 활용하지 못하는 정보는 오히려 인지적 부담만 가중시킵니다. 언젠가 정리해야 한다는 압박, 쌓여가는 미처리 항목들, 점점 복잡해지는 폴더 구조. 이것이 현대인이 마주한 디지털 기록의 현실입니다.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흥미로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효율보다 의미가, 자동화보다 참여가, 데이터보다 맥락이 강조되는 추세입니다. 최근 5년간 주요 기술 담론을 살펴보면 공통된 키워드들이 발견됩니다.
IEEE와 UNESCO의 AI 윤리 프레임워크, World Economic Forum의 인간 중심 AI, MIT Media Lab의 연구들은 모두 인간 중심 설계, 인간의 개입, 인간 존엄성, 의미 창출, 공감, 관심의 경제학을 강조합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기술과 인간의 관계가 핵심 의제로 부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 감정 중심성으로의 전환입니다. 기술이 효율을 담당하는 영역이 확대될수록, 인간은 감정과 의미를 다루는 영역에 집중하게 됩니다. 공감과 감정 인식은 여전히 인간 고유의 역량으로 남아 있습니다.
둘째, 맥락적 판단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습니다. 데이터의 정확함보다 맥락의 타당성이 중요해집니다. 같은 정보라도 누가, 언제, 왜, 어떤 상황에서 사용하는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해석과 판단은 여전히 인간의 몫입니다.
셋째, 윤리적 책임의 문제입니다. 자동화가 진행될수록 오히려 인간이 책임 주체로서 더욱 명확히 드러납니다. 알고리즘이 결정을 내리더라도, 그 알고리즘을 설계하고 운영하는 것은 인간입니다. 책임과 투명성은 기술적 효율성만큼이나 중요한 가치가 되었습니다.
넷째, 창의적 표현 능력의 가치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생성형 AI 시대에 역설적이게도 이야기하는 능력이 희소 자원이 되었습니다. AI가 무엇이든 생성할 수 있을 때, 진정성 있는 개인의 서사는 대체 불가능한 가치를 갖습니다.
다섯째, 관계적 가치로의 전환입니다. 인간과 기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 모두 돌봄의 구조로 재편되고 있습니다. 단순히 효율적으로 연결되는 것을 넘어, 의미 있게 관계 맺는 것이 중요해졌습니다.
정보가 넘칠수록 관심이 희소해지고, AI가 모든 것을 생성할수록 진정성이 가치가 되며, 기계가 판단할수록 윤리와 책임이 인간의 영역으로 남습니다. 이것은 효율성의 경제에서 의미의 경제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기술이 인간의 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할수록, 사회는 인간적인 것을 더 갈망하게 됩니다.
전통적으로 기록 전문가는 지식의 깊이와 시간의 축적으로 정의되었습니다. 관리 최소 단위인 철, 권, 건에 집중하고, 표준과 규칙을 아카이브에 적용하는 요원이었습니다. 방법론 중심의 문제 해결사로서 OCR, 데이터 추출, 입력, 등록과 같은 반복 작업을 수행하고, 연간 일정과 계획에 따라 업무를 실행했습니다.
그러나 AI 기술의 도입은 이러한 반복 작업의 구조를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국가기록원 연구에 따르면 AI OCR 기반 한글 필기체 인식 성능이 89.92%에 도달했으며, 오토라벨링 적용으로 단위 시간당 작업량을 75% 향상시켰습니다(출처: 국가기록원). 동시에 단순 기록정리, 데이터 입력 등 초급 단계의 업무 수요는 급속히 감소하고 있습니다. 반복적이고 구조화된 업무는 AI가 빠르게 대체하는 추세가 분명합니다.
이러한 역할이 무의미해진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중요하고 필요한 영역입니다. 그러나 디지털 전환과 AI 시대는 새로운 전문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기록 전문가는 기술을 활용한 적용력과 민첩한 연결력으로 정의됩니다. 해석과 의사결정에 집중하고, 아카이브를 정의하고 설계하는 기획자가 되어야 합니다. 비즈니스 임팩트 중심의 문제 해결사로서 자동화 프로세스를 설계하고 실행하며, 빠른 프로토타입으로 의사결정에 기여합니다. 멀티플레이어로서의 민첩성이 요구됩니다.
미국의 LinkedIn 데이터 1억 8천만 건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AI 환경에서 반복적이고 구조화된 창작·기록·관리 등 일부 역할이 뚜렷하게 감소하는 반면, 전략과 기획을 담당하는 리더십형 직무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입니다(출처: 2025년 AI가 대체한 직업 변화, 1억 8천만 건 데이터로 확인한 최신 트렌드). 기록물관리전문요원 직무에도 이 패턴이 적용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단순 분류, 입력, 정리 업무는 감소하고, 기록의 가치 평가 및 해석, 정책 기획 및 기록관리 전략 수립, 기록 윤리 관리, 이용자 서비스 및 상담 등은 유지·강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출처: 전자기록관리 업무 및 기록정보서비스에서의 생성형 AI 기술)
그러나 기술적 역량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집단과 개인, 인류와 소수에게 이타적인 마음으로 어떻게 자신의 영역에서 기여할 것인가를 항상 생각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기술이 수단일 뿐, 목적은 여전히 사람입니다.
파편화된 정보에 맥락을 부여하고, 개인과 집단이 스스로 자신의 서사를 구성할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 이것이 새로운 시대 기록 전문가의 모습입니다.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하게 하고 연결하는 것입니다. 표준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이 전환을 쉽게 허용하지 않습니다. 한국 기록 현장의 대다수가 1인 배치로 운영되고 있으며, 직무만족도는 5점 만점 기준 평균 3.2점에 그칩니다. 기록관리 외 다른 업무를 25~100% 수준까지 병행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 본연의 전문성을 발휘하기 어려운 구조입니다(출처). 이러한 구조적 어려움 속에서 고도화된 역할로 전환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새로운 전문성의 실현을 위해서는 단순히 개인의 역량 강화만이 아니라 구조적 개편과 정책 전환이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혁신이 가속화하는 흐름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고, 플랫폼이 변하고, 사람들의 기록 방식이 진화합니다. 이 변화를 외면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습니다. 변화를 이해하고, 그 속에서 기회를 발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인간으로서, 그리고 사회와 집단을 이루는 지성체로서 기록으로부터 무엇을 얻어낼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 또한 기록 전문가의 영역입니다. 기술이 답을 주지 않습니다. 기술은 가능성을 제공할 뿐, 어떤 가능성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는 여전히 인간의 선택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카이브의 현행화입니다. 과거의 틀에 갇혀 있지 않고, 현재의 현실을 직시하며,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가는 것. 기술을 활용하되 기술에 종속되지 않고, 효율을 추구하되 의미를 잃지 않으며, 변화를 받아들이되 인간을 중심에 두는 것. 이것이 우리가 매일 기록하는 이 시대에, 기록 전문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