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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성이라는 거짓말

3장. 무엇을 남겨야 하는가

by 아키비스트J

매 순간 우리는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은 동시에 다른 것들을 배제합니다. 예를 들면 아침에 입을 옷을 고르고 점심 메뉴를 정하고 오늘 할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듯이 말이죠. 이 옷을 입으면 저 옷은 입지 않게 되고 이 메뉴를 선택하면 저 메뉴는 포기하게 됩니다.


아카이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동시에 무엇을 버릴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우리는 이 선택이 "객관적"이고 "불편부당"하다고 믿어왔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젠킨슨의 꿈: 완벽한 객관성


아카이브의 불편부당성

20세기 초 영국의 기록학자 힐러리 젠킨슨(Hilary Jenkinson)은 아카이브 이론의 기초를 세웠습니다. 그는 아카이브의 존재 이유를 두 가지로 정의했습니다. 불편부당성(impartiality)과 진본성(authenticity)이었죠.


젠킨슨의 논리는 이랬습니다. 기록은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산된 것입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특정 메시지를 전하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 일을 하다 보니 저절로 생긴 산물이라는 거죠. 따라서 기록에는 인간의 주관적 의도가 개입될 수 없고 그 자체로 "객관적"이라고 봤습니다.


이것은 매우 매력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아키비스트는 중립적인 관찰자 역할만 하면 되고 기록은 스스로 말하는 증거가 되는 것이니까요. 복잡한 판단과 선택의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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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은 배제를 의미한다

그런데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1994년 『아카이브 열병(Archive Fever)』이라는 책에서 아카이브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데리다가 주목한 것은 아카이브(archive)라는 단어의 어원이었습니다. 그리스어 "아르케(Arkhe)"는 "시작"과 "명령"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가집니다. 이는 아카이브가 단순한 저장소가 아니라 권력이 시작되는 곳이며 무엇을 보존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지배력 자체라는 의미입니다.


데리다의 관점에서 아카이브는 이중의 욕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보존의 욕망이고 다른 하나는 파괴의 욕망입니다. 기록을 보존하려는 강박은 동시에 어떤 기록을 폐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행위를 포함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어떤 기록을 남기기로 결정하는 순간 다른 기록들은 배제됩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남겨지면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는 지워지고 특정 사건이 기록되면 다른 사건들은 역사에서 침묵당합니다. 이 과정에 객관성이나 불편부당성은 존재하기가 어렵습니다.


현대 학자들의 비판

젠킨슨의 이론은 시간이 지나면서 비판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루치아나 듀란티(Luciana Duranti)를 중심으로 한 현대 학자들은 젠킨슨주의를 다르게 해석했습니다. 듀란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카이브의 불편부당성은 절대적 공정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에 담긴 생산자의 성향이나 편견이 충실하게 반영된 상대적 공정성을 의미한다."


쉽게 말하면 기록은 이미 만들어진 순간부터 그 기록을 만든 사람이나 기관의 입장과 관점이 깊숙이 녹아있다는 뜻입니다. 객관적이지 않다는 거죠.


미국의 기록학자 테오도르 쉘렌버그(Theodore Schellenberg)는 더 적극적으로 비판했습니다. 그는 기록의 불편부당성 개념 자체를 거부하면서 "아키비스트의 주관적 판단이 사회적 기록화를 더욱 충실하게 실현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기록학의 근본적 패러다임 전환이었습니다. 더 이상 아카이브는 중립적 관찰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 선택의 행위자로서의 정체성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기억은 동적 - 시간에 따라 바뀐다


바뀌는 기억에 따라 기록도 바뀐다

21세기 기록학계에서 가장 큰 전환은 기억(memory) 개념의 도입이었습니다. 기존의 기록 이론이 기록을 "과거의 객관적 증거"로 이해했다면 기억 담론은 기록 자체가 현재의 필요에 따라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사회적 과정이라고 봅니다. 역사 철학자 헤이든 화이트(Hayden White)의 표현을 빌리면 역사는 "사건의 재현이 아니라 의미 부여의 서사적 행위"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건을 "중요하다"고 느끼는 감정적 반응은 그 의미 부여의 방향을 설정합니다.


심리학과 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감정이 강한 경험일수록 장기 기억으로 더욱 강화됩니다. 대뇌 깊숙한 곳에 자리한 편도체(amygdala)라는 부위가 감정적으로 유의미한 경험을 장기 기억으로 만드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적 심리 현상이 아닙니다. 기록 평가 과정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합니다. 기록 전문가들도 인간이고 따라서 감정적으로 유의미한 기록일수록 더 중요하게 남기고 싶어집니다. 객관적으로 똑같이 중요한 사건이라도 감정적 임팩트가 큰 사건일수록 더 오래 기억되고 더 중요하게 기록되려고 하는 것이죠.


아카이브는 권력의 현장이다

데리다가 말한 것처럼, 아카이브는 권력이 작용하는 공간입니다. 어떤 것을 보존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가장 정치적인 결정입니다. 이것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이 사실을 인정할 때 더 정직한 아카이브를 만들 수 있습니다. 자신의 선택이 어떤 목소리를 보존하고 어떤 목소리를 배제할 것인지에 대해 투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카이브는 불편부당할 수 없다"는 명제는 더 이상 학술적 담론이 아닙니다. 이는 현장의 기록 관리자들이 매일 직면하는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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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성의 거짓말에서 벗어나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제도적 평가의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효율성과 정량화와 속도라는 장점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감정과 기억과 주관성이라는 측정 불가능한 가치들을 포함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둘째, 공동체와의 협력적 선별 과정을 구축해야 합니다. 아키비스트가 모든 기록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다는 신화에서 벗어나 기록 생산 공동체와 이해관계자들과의 지속적인 대화와 협상 과정을 통해 선별을 진행해야 합니다.


셋째, 기록의 다양한 가치 기준을 인정해야 합니다. 행정적 가치와 법적 증거성과 역사적 중요성뿐만 아니라 감정적 가치와 정체성 형성 가치와 저항과 치유의 가치 등 다층적 가치 기준을 포용해야 합니다.


넷째, 아키비스트의 윤리적 책임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아키비스트는 기술자가 아니라 사회적 행위자이며 자신들의 선택이 어떤 목소리를 보존하고 어떤 목소리를 배제할 것인지에 대해 윤리적 책임을 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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