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감정의 필연성

3장. 무엇을 남겨야 하는가

by 아키비스트J

기록 평가에서 감정의 작동


감정의 기록화

최근 눈길이 가는 개념이 바로 감정의 기록화(affective archiving)입니다. 이는 기록의 선별과 평가 과정에서 감정이 객관적으로 측정 불가능한 요소가 아니라 기록의 의미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라는 인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기록을 평가하는 주체도 인간이며, 따라서 감정적으로 유의미한 기록일수록 본능적으로 더 중요하게 남기고 싶어집니다. 똑같이 중요한 사건이라도 감정적 임팩트가 큰 사건일수록 더 오래 기억되고 더 중요하게 기록되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적 심리 현상이 아니라 기록 평가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작동하는 메커니즘입니다.


세월호 참사와 기록의 가치

예를 들어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기록의 보존 문제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세월호 참사 직후 전국 각지에서 시민들은 노란 리본과 포스트잇 메모글로 애도를 표현했습니다. 이들 기록은 행정적 가치나 법적 증거성 면에서 본다면 매우 낮은 평가를 받을 것이 자명합니다. 그들은 일반인이 남긴 감정적 표현일 뿐 공식적 행정 기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크린샷 2025-11-18 20.56.30.png 4.16 기록저장소 홈페이지 http://www.416memory.org/collection/memoryProject


하지만 4.16 기억저장소는 이러한 기록들을 보존함으로써 질문을 던집니다. '기록의 가치는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이 기록들이 담고 있는 것은 분노와 슬픔과 애도라는 사회적·정치적 정동입니다. 그리고 이 정동들이 향후 사회적 변화를 만드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유가족과 시민들의 애도 행위는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라 사회적 공감대 형성과 기억 공동체 구성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감정이 기록 평가에 필연적으로 개입되는 이유입니다. 감정은 기록을 왜곡시키는 변수가 아니라 인간이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아카이브의 역설


객관성을 거부하는 방식

공동체 아카이브는 기존의 기록 관리 방식이 갖는 한계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냅니다. 공동체 아카이브는 특정 공동체가 그 역사와 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압축해 담은 자료의 집합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록의 객관적 가치가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의 주관적 경험과 기억입니다.


미국과 영국의 공동체 아카이브 사례를 보면 이러한 기관들은 기존의 기록관리 패러다임 속에서 바라보는 민간 기록은 여전히 불완전하고 신뢰할 수 없는 부차적인 기록이라는 인식에 도전했습니다. 민간 기록은 항상 공공 기록과의 비교를 통해 그 가치를 평가받았기 때문에 민간기록 자체의 고유의 가치를 제대로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공동체 아카이브의 가장 중요한 통찰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억 공동체는 자신들의 기억을 담보하는 기록을 생산해 내거나 보관하는 데 많은 관심을 쏟습니다. 이는 기록이 단순한 역사적 증거가 아니라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수단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공동체 아카이브에서 기록을 선별하는 기준은 객관적 역사적 가치가 아니라 '우리 공동체에게 무엇이 의미 있는가'라는 주관적 판단이 우선됩니다.


마이너리티 아카이브와 감정의 윤리

마이너리티 아카이브(소수자 아카이브)는 감정과 기록 평가의 관계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한국 퀴어 아카이브 '퀴어락'이나 동물권 운동 아카이브 같은 사례들은 지배 사회에 의해 배제되고 침묵당했던 목소리를 기록합니다.


이러한 아카이브에서 기록 선별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학술적 가치? 역사적 중요성? 당연히 아니겠죠. 공동체 구성원들의 생존과 저항의 기록이라는 점 자체가 선별 기준입니다. 성소수자 공동체의 일상적 기록. 차별에 대한 저항의 기록. 정체성을 확인하는 개인적 기록들. 이것들은 국가 기록원의 기준으로는 절대 보존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기록들이 없다면 소수자 공동체는 역사 속에서 완전히 지워집니다.


이 과정에서 아키비스트의 역할은 순수한 기술자의 역할이 아니라 윤리적 주체로서의 역할을 합니다. 공동체 아카이브 운영에서 지속적으로 강조되는 것이 바로 지속적 자율성(ongoing autonomy)과 '공동체와의 파트너십 속에서의 지속적 평가'입니다. 이는 기록 선별 과정이 일회적 결정이 아니라 공동체와 아카이브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 과정임을 의미합니다.




AI와 감정의 반사성


AI는 감정을 비춘다

그렇다면 AI는 이런 감정을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요? 감정 컴퓨팅은 기계가 인간의 정서를 탐지·표현하도록 설계된 기술입니다. 이때 생성되는 감정 데이터는 사회 전체가 어떤 사건에 감정적으로 반응했는지를 보여주는 정서적 지도(emotional cartography)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지도는 더 이상 위에서 내려다보는 거대한 지도가 아닙니다. AI가 만들어내는 지도는 각 개인의 마이크로 메모리얼로서 짧은 문장과 표정과 클릭과 해시태그와 같은 감정의 미시적 단위들이 서로 겹쳐 생성되는 모자이크입니다. 기억은 중앙집중적 보존의 대상이 아니라 분산된 네트워크 속에서 감정 레이블로 묶여 계속 갱신되고 재해석되는 동적 데이터로 변모합니다.


AI는 수많은 마이크로 메모리얼이 남긴 흔적을 기록합니다. 이 작은 감정의 단위들이 모여 사회적 감정의 집합적 초상(collective portrait)을 형성합니다. 이때 AI의 역할은 기록 행위의 주체라기보다는 감정의 잔향을 반사적으로 재현하는 감정의 메타기록자(meta-recorder)에 가깝습니다. 즉 AI는 감정의 인식론적 주체가 아닌 감정의 반사적 매개체로서 우리가 무엇을 느끼며 기록했는가를 비추는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감정 데이터의 윤리

한편 AI가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해 지식을 구성할 때 그 결과에 내재된 의미 왜곡과 가치 판단의 책임은 알고리즘을 설계하고 활용하는 인간에게 귀속됩니다. 특히 감정을 데이터로 환원하는 과정에서 감정이 지닌 서사적 맥락과 관계적 의미가 제거될 위험이 큽니다. AI가 감정을 수치화하는 순간 감정의 다층적 현실은 단일 지표로 단순화되고 인간의 경험은 통계적 사실로 축소되기 쉽습니다.


따라서 AI는 감정의 복잡성을 비추어 드러내는 반사체(reflective surface)로 기능해야 합니다. 윤리적 AI는 감정을 대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흔적을 책임 있게 재현함으로써 인간의 감정을 다시금 성찰하게 합니다.


결국 AI의 감정윤리는 'AI가 인간의 감정을 대체할 수 있는가?' 나아가 'AI가 감정 기반의 기록 평가를 대체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AI가 인간의 감정을 어떻게 책임 있게 반사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됩니다.

Gemini_Generated_Image_sowe9bsowe9bsowe.png



keyword
화, 수, 목,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