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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와 객관성의 한계

3장. 무엇을 남겨야 하는가

by 아키비스트J

법제화된 객관성의 모순


보존기간 분류 체계의 현실

한국의 현행 공공기록물관리법은 기록의 보존기간을 명확한 기준에 따라 영구·준영구·10년·5년·3년·1년으로 분류합니다. 표면적으로 이는 매우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시스템처럼 보입니다. 숫자로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고 기준이 법령에 명시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나 현장의 기록 관리자들이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이러한 분류 체계의 근본적 모호함입니다. 예를 들어 '대규모 개발사업의 기록은 10년 보존'이라는 규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규정은 행정 절차의 편의와 행정 행위에 대한 증거적 가치는 보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규정이 적용되는 일련의 과정은 감정, 문화, 기억의 층위는 배제된 채, 법적 기준에 의한 효율과 증빙이 우선시 되는 것 같습니다. 그 개발사업으로 인해 주민들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 그 공간이 개인의 감정에 미친 영향, 공동체의 기억이 어떻게 단절되었는지는 반영하지 못합니다.


절차적 정당성과 실질적 공정성의 괴리

더욱 안타까운 것은 기록 평가의 절차적 정당성과 실질적 공정성 사이의 괴리입니다. 평가 업무를 수행하는 아키비스트는 법령에 명시된 "행정업무 수행의 참고"와 "사실의 증명 필요성" 같은 추상적 기준을 구체적인 기록물에 적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장에서는 그 기준이 얼마나 모호한지를 이미 체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록은 법의 언어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법이 담아내지 못한 감정의 증거가 기록을 존속시키는 진정한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결국 기록의 객관성은 완결된 체계가 아니라 사회적·감정적 합의의 산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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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평가와 미시평가의 불일치


효율성의 대가

기록 평가의 영역에서 오랫동안 논쟁이 되어온 것이 거시평가(macroappraisal)와 미시평가(microappraisal) 간의 긴장입니다. 거시평가는 사회의 기능과 문화 전체 맥락에서 기록을 평가하려는 관점이고 미시평가는 개별 기록의 내용과 맥락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입니다.


거시평가는 효율성과 정량화와 속도와 획일화라는 장점이 있습니다. 수백만 건의 기록물을 체계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국가 기록원 같은 대규모 기관에서는 이러한 제도적 평가 방식이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거시평가의 이 같은 장점은 동시에 그것의 치명적 한계가 됩니다. 왜냐하면 이 접근법은 측정 불가능한 가치들을 배제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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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정할 수 없는 가치들

예를 들어 공동체 아카이브나 민간 아카이브에서는 기록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한국의 퀴어 아카이브 '퀴어락'은 동성애자 공동체의 기록을 보존합니다. 이 기록들의 행정적 가치와 법적 가치는 매우 낮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록들이 성소수자 공동체의 정체성 형성에 존재의 증거로 갖는 가치는 무엇일까요?


마찬가지로 병역거부 아카이브에 보존된 기록들은 양심적 저항의 역사를 담고 있으며 사회적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합니다. 이러한 기록들의 가치는 정량화될 수 없습니다. 숫자로 측정할 수 없는 가치, 그것이 바로 제도적 평가가 놓치고 있는 부분입니다.


현장의 기록 관리자들이 직면하는 딜레마는 다음과 같습니다. '기록 평가 기준을 명확하게 정할수록 감정과 문화와 기억의 층위는 더욱 배제된다.' 역으로 이러한 층위들을 포함하려고 하면 평가의 절차가 주관적이 되고 일관성이 흔들린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도와 객관성의 한계가 노출되는 지점입니다.




AI가 드러내는 제도의 한계


패턴 인식과 맥락 해석

그렇다면 AI는 이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AI는 방대한 양의 기록을 빠르게 분석하고 패턴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AI도 제도와 마찬가지로 정량화 가능한 데이터에 의존합니다. AI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숫자와 키워드와 빈도수 같은 측정 가능한 지표들입니다.


그런데 기록의 진정한 가치는 이런 정량적 지표에 있지 않습니다. 한 기록이 공동체에게 갖는 의미. 개인의 감정에 미치는 영향. 역사적 맥락 속에서의 역할. 이런 것들은 AI가 쉽게 파악하기 어려운 영역입니다. AI는 패턴을 찾아내는 데 뛰어나지만 그 패턴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왜 중요한지,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지는 인간이 판단해야 합니다.


감정 데이터와 정량화의 한계

최근 감정 컴퓨팅(affective computing) 기술이 발전하면서 AI가 감정을 인식하고 분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AI가 인식하는 것은 감정의 표면적 징후일 뿐입니다. 댓글의 감정 분석과 SNS 언급량과 시기별 공감도 같은 데이터는 사회적 반응의 일부를 보여줄 수 있지만 그 감정이 어떤 맥락에서 생겨났는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지는 담아내지 못합니다.


AI가 모든 것을 정량화할 수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측정 불가능한 가치들을 인정하고 그것을 평가 과정에 포함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제도의 한계를 넘어서


협력적 평가의 필요성

제도적 평가의 한계를 인정한다는 것은 제도를 포기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효율성과 정량화와 속도라는 장점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감정과 기억과 주관성이라는 측정 불가능한 가치들을 포함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공동체와의 협력적 선별 과정이 필요합니다. 아키비스트가 모든 기록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다는 신화에서 벗어나 기록 생산 공동체와 이해관계자들과의 지속적인 대화와 협상 과정을 통해 선별을 진행해야 합니다. 이런 협력 과정에서 AI는 가장 강력한 도구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AI가 패턴을 찾아내고 인간이 그 패턴의 의미를 해석하고 공동체가 그 해석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구조 속에서 AI가 객관성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주관적 판단을 지원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죠.


제도와 AI의 협력

제도와 객관성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은 제도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더 정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AI가 등장한 지금 우리는 제도와 AI 그리고 인간의 판단이 어떻게 협력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AI는 제도가 놓치기 쉬운 패턴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패턴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여전히 인간이 판단해야 합니다. 제도는 효율적인 평가 절차를 제공할 수 있지만, 그 절차가 공정한지는 공동체, 집단과의 대화를 통해 확인해야 합니다.


제도적 평가 체계는 단일한 기준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려는 시도에서 벗어나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고 그것들을 함께 고려할 수 있는 평가 체계로 진화해야 합니다. 행정적 가치와 법적 증거성과 역사적 중요성뿐만 아니라 감정적 가치와 정체성 형성 가치와 저항과 치유의 가치 등 다층적 가치 기준을 포용할 때 제도는 더 풍부해집니다. 제도와 객관성의 한계를 인정할 때 우리는 더 신뢰할 수 있는 아카이브를 만들 수 있습니다. 측정할 수 없는 가치들을 배제하지 않고 그것들을 평가 과정에 포함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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