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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큐어모피즘과 아카이브

2장. 아카이브의 현행화

by 아키비스트J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실물을 닮은 디지털의 함정

2000년대 후반, 스티브 잡스가 이끌던 애플의 iOS는 독특한 디자인 철학으로 주목받았습니다. 책장처럼 보이는 iBooks, 가죽 질감이 느껴지는 캘린더, 실제 녹음기를 닮은 보이스메모 앱. 화면 속 앱들은 마치 현실의 사물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습니다. 잡스는 이런 디자인이 사용자에게 친숙함을 준다고 믿었죠.


tcueylfd5xmz.jpg 스큐어모피즘 디자인이 적용된 iOS 6(왼), 스큐어모피즘이 사라지고 미니멀리즘이 적용된 iOS 7 출처: 레딧(Reddit)

이것이 바로 스큐어모피즘(skeuomorphism)입니다. 실물 대상의 질감, 형태, 작동 방식을 디지털 환경에서 시각적으로 모방하는 디자인 기법이죠. 사용자에게 익숙함을 주고 학습 비용을 줄인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비판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디지털의 본질적 가능성을 외면한 채 과거의 형태만 답습한다는 것, 현실에서는 불필요한 장치와 제약을 디지털 공간에 억지로 구현함으로써 오히려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가로막는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종이를 닮은 전자문서의 딜레마

근현대 공공 행정과 문서관리 문화는 종이를 전제로 발전해 왔습니다. 문서번호, 결재란, 상신과 결재의 흐름, 모든 체계가 종이라는 물질 기반 위에서 작동했습니다.

2000년대 전자정부법 시행 이후, 기록관리 환경은 종이에서 비트(bit) 환경으로 전환되었습니다. 하지만 양식과 형식, 프로세스는 여전히 종이시대의 관습을 전자적으로 변환했을 뿐, 근본적 변화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현지개량사업추진상황보고, 1972.12.05., 서울기록원
2025년 의대 교육 정상화 방안 안내문 협조 요청, 2025.03.17., 출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70년대 공문서든 2020년대 전자문서든, 손글씨냐, 전자형태의 문서냐 차이일 뿐 형식만 놓고 봤을 때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문서번호 체계, 결재란의 위치, 본문의 구성. 모든 것이 종이 서류철의 양식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자기록관리의 스큐어모피즘입니다.




전자와 디지털, 무엇이 다른가


우리는 종종 전자기록관리와 디지털기록관리를 혼용합니다. 하지만 용어가 다르다면, 개념에도 당연히 차이가 있어야겠죠. 지난 2025년 4월 명지대학교 제45회 실버랩 세미나에서 한능우 교수가 제시한 기록관리의 패러다임 전환 과정은 이 차이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종이기록관리(old paradigm) →(1차 전환)→ 전자기록관리(intermediate paradigm) →(2차 전환)→디지털기록관리(new paradigm)


1차 전환: 종이 → 전자 (Bit 중심 사고)

물리적으로 흩어져 있던 기록을 데이터베이스에 집약하고, 공간적 한계를 넘어 열람 가능하도록 전자화(digitizing)하는 단계입니다. 이 비트 중심의 사고는 보존을 목표로, 보존 효율 극대화를 가치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종이 서고가 컴퓨터 서버로 바뀌었을 뿐, 기록을 안전하게 쌓아두는 관점은 여전합니다.


2차 전환: 전자 → 디지털 (Data 중심 사고)

진정한 도약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데이터 중심 사고로의 전환이죠. 우리는 불과 2~3년 만에 방대한 데이터를 소화해 스스로 학습하는 소프트웨어를 삶의 필수적인 도구로 받아들였습니다. 데이터는 기록인들이 습관처럼 부르짖던 활용과 일맥상통합니다.


기록물은 한 건만 존재할 때보다, 그 정보의 탄생배경, 인과관계, 생산과 이용 주체라는 거대한 맥락 속에서 가치가 높아집니다. 이런 맥락은 곧 정보들이죠. 개별 아이템으로 낱낱이 분리된 수십만 건의 기록물에는 적게는 수 개, 많게는 수십 개의 메타데이터가 딸려 있습니다. 한 건의 기록물 당 10개의 메타데이터가 정리되었다고 할 때, 원문을 포함해 수백만 건의 데이터가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방대한 데이터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디지털 아카이브로의 진화


목록으로만 존재하는 기록들

현재 많은 기록물은 시스템에서 목록으로 관리되고, 파일 형태의 원문을 단순 제공하며, 메타데이터는 오직 상세검색과 분류트리만을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공공데이터포털에는 이미 다양한 문화기관이 데이터를 주기적으로 공급하고 있습니다. 국가기록원, 서울기록원 등 주요 영구기록물관리기관들도 메타데이터와 기록물 정보를 Open API, JSON, XML 등 다양한 포맷으로 제공하며, 실시간 데이터 연계와 외부 활용을 점차 확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웹기록물이나 행정정보 데이터셋 등 일부 범위에 한정된 데이터만 개방되며(공공데이터법 시행령 제1조의 2), 실질적 창의적 활용 경로가 부족한 상황입니다. 법·제도적 개선과 데이터 품질 제고, 개인정보 등 제약 해소를 위한 노력이 지속되고 있지만, 핵심은 이것입니다. 지금은 서고가 비트로 변환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말입니다.


디지털 전환이 기술이 아닌 이유

많은 기업이 문서 전자화를 디지털 전환의 시작으로 봅니다. 실제로 기업 문서 DX 사례를 구글에 검색해 보면, 기존 문서를 전자화하는 것에 초점을 둔 사례도 많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문서의 활용성입니다. 비전자문서를 전자화하는 과정에서 텍스트와 비정형 데이터를 추출하여, 조직의 크고 작은 의사결정을 내리는 데 활용 가능한 데이터로 만드는 것이죠.


기록관리의 디지털 전환은 단순한 종이기록의 비트 변환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최근 공공데이터포털은 방대한 데이터 개방과 API 지원을 통해 행정, 예술,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적 서비스와 창의적 활용을 촉진하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에 맞춰 주요 기록관리기관들도 데이터 제공 방식을 다각화하고 개방과 공유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환경과 인프라가 많이 부족합니다.


기록관리의 디지털 전환은 기술적 변화가 아닙니다. 기록 종사자, 개발자, 연구자, 크리에이터, 창업가, 교육자 등 모든 구성원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생태계의 기반입니다.

데이터 제공 방식을 다각화하고, 개방과 공유를 확대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다양한 기술을 적용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기록관리의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고방식의 전환

기록 전문가들은 공공성의 가치에 입각해 기록물이 담은 정보를 새로운 지식과 창의적 발상을 위한 기초 재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잘 관리하는 사람들입니다. 종이 서류철의 형태를 화면에 옮겨놓는 것을 넘어서, 데이터의 본질적 가능성을 탐구해야 합니다. 보존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활용과 연결 중심의 사고로 전환해야 하죠.


스큐어모피즘이 결국 플랫 디자인으로 진화했듯이, 전자기록관리도 진정한 디지털기록관리로 진화해야 합니다. 그 전환의 시작은 과거 패러다임의 시각적 모방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형태가 아닌 사고방식의 전환.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맞이해야 할 아카이브의 현행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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