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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미융합소 May 19. 2020

방탕해지는 사람들

현대에 만연한 심리적 현상 '실존적 공허'와 그 영향

 

우리는 사회적으로 막대한 돈이나 명예를 얻은 사람들이 마약이나 성매매와 같은 불법적 행위에 연루되어 추락하는 기사를 종종 접한다. 간혹 그런 기사들을 보면 일반인으로서 얻을 수 없는 지위와 부를 얻었음에도 왜 저런 어리석은 행동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성공이 주는 오만에 빠졌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그 사람의 본성이 원래 그렇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들 중에는 이러한 질 나쁜 범죄에 연루되지 않고도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도 많고, 평소에 매우 성실하고 선한 사람이 이러한 방탕한 삶에 빠지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이렇게 성공한 사람들이 이러한 방탕한 삶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실존적 공허


실존적 공허가 만연한 현대사회


실존적 공허’는 20세기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심리적 현상이다. 실존주의 상담 치료의 핵심인물 중 하나인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은 ‘실존적 공허’는 인간이 진정한 인간이 된 후에 겪어야 했던 두 가지 손실에 의해 비롯됐다고 봤다. 첫 번째 손실은 본능이다. 본능은 인간이 문명화되면서 버려야 했던 동물적 본능을 말한다. 문명화로 인해 인간은 더 이상 어떠한 행동을 할 때 자기 자신의 본능에 따라 행동을 할 수 없게 됐으며, 모든 순간 그에 맞는 합리적 선택을 강요받게 됐다. 두 번째 손실은 전통이다. 20세기에 접어든 인간은 더 이상 신이나 왕 같은 시대가 정해주는 절대적 교리나, 원칙 등을 따를 필요가 없게 됐다. 반드시 따라야 하는 행동 양식인 전통이 없어지면서, 인간은 자신을 가르쳐주던 오래된 지침서를 잃었다. 이렇게 그동안 우리의 행동을 결정지어주던 본능과 전통이 소실되면서 20세기의 인간들은 모든 선택을 오로지 개인의 판단으로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개인적 판단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주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봉착하게 되었고 이러한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의 연속은 사람들을 '실존적 공허'에 빠지게 만들었다.


실존적 공허란?   


 ‘실존적 공허’는 자신의 삶 전체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가져다주는 내적인 공허다. 이러한 내적 공허는 자신이 정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태에 놓인 개인이 이유도 모를 선택을 계속하며 살아가는 자신을 봤을 때 느끼는 공허함이다. 이러한 공허감은 권태 속에서 더욱 커지게 되는데, 고민과 자극이 없는 항상성이 유지된 상태(권태)에서 지속적인 반복적 삶은 이들에게 더욱 큰 ‘실존적 공허감’을 선사한다. '실존적 공허'를 겪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무언가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으며, 삶에서 별다른 의욕이나 흥분을 느끼지 못한다. 이러한 실존적 공허감은 그 사람들에게 그 자리를 채워줄 무언가를 찾기를 계속해서 요구하는데, 이 자리를 채워줄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은 이 자리에 권력, 돈, 쾌락 등의 원시적 욕구를 집어넣어 임시로 이 자리를 메꾸게 된다.


빈 곳을 채우는 방탕함


 우리는 이러한 사례들을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나의 경우에도 그렇다. 나에게는 연 억대를 버는, 소위 꽤 잘 나간다는 친구가 둘 있다. 이 둘의 생활방식은 매우 대조적인데, 한 친구 A는 매달 막대한 돈을 들여 클럽을 가고 각종 유흥을 즐긴다. 다른 한 친구 B는 클럽은 고사하고 술, 담배조차 하지 않으며 딱히 돈을 쓰지도 않는다. 처음에 나는 A가 더 삶을 재미있고 화려하게 산다고 생각했다. B는 돈만 많지 놀 줄 모르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둘을 만나 얘기를 나눴을 때 내 생각은 바뀌었다.


 친구 A는 매일 밤 즐기는 유흥과 놀이에도 불구하고 매일매일을 따분하게 여겼다. 왜 그렇게 자주 클럽을 가느냐 물으니, 이미 삶에 지장이 없을 정도의 충분한 재화를 벌어들였고, 차를 사고 집을 사니, 이제 더 이상 할 것이 없더라라고 했다. 그래서 그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매일 밤 클럽을 가고 유흥을 즐긴다고 했다. 반면에 친구 B는 매일매일이 재미있고 알차다고 했다. B는 업무가 없는 날에도 회사에 가며,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에서 보낸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번 돈이나 지위 등은 자신이 꿈을 향해 가는 길에 얻은 부차적 결과물일 뿐이지 자신의 목적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도전하며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삶에 있어서 자기 자신을 성장시키고 발전시키는 것이 가장 재미있고 행복한 일이라고 했다.


 친구 A와 B는 둘 다 각자 맡은 분야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내고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둔 유능하고 성실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 둘이 느끼는 행복감은 서로 달랐다. 친구 A는 자신이 이루어야 할 목표를 근시적이고 정량적인 것으로 잡았다. 그에게 있어 당장의 성공과 재화는 그 삶의 전체적인 목표였다. 그렇다 보니 그가 그것들을 모두 이루어 냈을 때, 그에게 있어 더 이상의 삶의 의미가 없어졌다. 그렇게 생긴 내적 빈자리는 그에게 그곳을 채울 무언가를 요구했고 그는 그곳을 원시적 욕구와 쾌락으로 그 자리를 채웠다. 반면 친구 B는 자신의 목표를 거시적이고 추상적인 것으로 잡았다. 그는 자신의 당장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더 넓은 꿈을 위해 꾸준히 사고하고 탐구했다. 그의 자신의 성장과 발전을 삶의 행복으로 삼았고, 그의 내부는 언제나 의미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내적 공허함을 느낄 새도 없이 항상 행복하게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친구 A와 B의 차이는 현대인들에게 만연한 '실존적 공허'를 어떻게 슬기롭게 이겨낼 수 있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본능과 전통이 소실된 사회에서 현대인들은 당장에 앞에 놓인 과제가 자신이 해결해야 할 절대적 목표라고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삶의 전체적인 방향을 알려주는 지침서의 상실은 사람들을 근시안적으로 만들고, 문제 너머에 있는 가치와 상황보다 앞의 문제에 모든 것을 쏟아붓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눈 앞의 문제 해결은 결코 우리에게 절대적 평화나 보상을 주지 않는다. 눈 앞의 과제에 모든 것을 맡긴 사람은 친구 A처럼, 그 문제를 해결하여 더욱 높은 위치에 올라섰다 하더라도, 그 보상으로 평화나 행복감이 아니라 무료함과 지루함을 얻는다. 반면 친구 B처럼 당장 앞에 놓여있는 문제가 아니라 삶의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거시적이고 추상적인 목표를 삶의 목표로 삼는다면, 문제를 해결했을 때 오는 무료함을 느낄 새도 없이 또 다른 도전과 과제를 계속해서 마주하게 되며 기쁨과 희열로 가득찬 삶을 살게 된다.



 실존적 공허는 인간을 지배해오던 절대적 삶의 목표가 소실된 현대인들에게 매우 만연한 심리적 현상이다. 우리는 좋은 직장에만 붙으면 행복할 줄 알았던 삶이 막상 취업해보니 행복하지 않다거나, 대학교만 입학하면 모든 것이 달라질 줄 알았던 세상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때 이러한 '실존적 공허'를 느낀다. 이러한 공허는 사람을 방탕하고 무기력하게 만든다. 이러한 방탕한 삶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당장의 성공이 영원한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삶 속에서 지속적인 가치를 찾기 위해 삶의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큰 목표를 정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삶의 전체적인 목표를 정하고 그곳을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갈 수 있을 때 우리는 방탕한 삶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지속적인 행복을 느끼며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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