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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미융합소 May 20. 2020

시련의 의미, 고통을 다루는 법.

진정한 힐링이란 - 죽음의 수용소를 읽고.

 201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힐링'은 사회 주요 키워드다. '힐링'은 여러 문제에 직면한 사람의 기분을 풀어주고 정신적 안정을 되찾게 하는 각종 활동의 총칭이다. 이러한 '힐링'의 유행은 현대인들이 일상 속에서 받는 스트레스와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 반증한다. 현대에 만연한 전례에 없던 높은 자살률과 우울증 비율은 이러한 현대인들의 상황을 보여주는 좋은 지표다.


 그러나 이러한 '힐링'도 현대인들의 고통을 완전히 해소시켜주지 못한다. 각종 힐링 활동들은 현대인이 겪고 있는 고통의 근원적인 원인을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고통으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나게 해 준다. 그래서 그들이 힐링 활동에서 벗어나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여전히 고통에 시달리며 삶을 힘들어한다. 이러한 고통의 지속은 사회를 병들게  하고 사회의 발전을 더디게 만든다.


 우리가 사회를 건강하게 위해서는 이러한 현대 사회에 만연한 고통을 근원적으로 해결할 필요가 있다.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이러한 고통의 근원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작가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죽음의 수용소라고 불리는 유대인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겪었던 일화를 바탕으로 작성된 책이다. 아우슈비츠는 수감자에게 꿈도 희망도 없는, 자살조차 감히 허용되지 않는 인간으로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바닥인 공간이었다. 이 공간에 대한 묘사들은 나를 '과연 이러한 지옥 같은 공간 속에서도 인간이 삶의 의지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은 그 속에서 살아갔고, 생존해냈다.


 물론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죽었고 삶을 포기했지만,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삶의 의지를 지켜냈고 끝까지 살아남았다. 생존자 중 한 명인 작가는 자신의 경험담과 주변 인물의 관찰을 통해,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극도로 잔혹하고 무자비할 때조차, 인간이 삶의 의지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그가 수용소에서 터득하고 관찰한 삶의 방식은 삶의 고통 속에서 허덕이는 우리에게 고통을 어떠한 태도로 마주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해 준다.


고통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는 것. 그것이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줄
'진정한 힐링'이다.   



 '고통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작가가 말하는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삶의 의지를 찾는 법이다. 아우슈비츠 안에서 수용수들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한 가지를 제외한 모든 것을 빼앗겼다. 수용수들은 옷, 신발뿐만 아니라, 인격, 인권 등과 같은 모든 권리를 박탈당했다. 그러나 그런 상황조차도 인간으로부터 '자신의 태도'와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게 해주는 '자유의지'만은 빼앗을 수 없었다.


 '자유의지'는 인간에게 극도로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연명하는 삶을 살 것인가, 살아가는 삶을 살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게 해주는 인간 내면의 자기 결정권이다. 살아가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겪는 극심한 고통을 '죽음'과 '운명'과 같은 삶의 필수요소로 이해하고, 그것으로부터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반면에 연명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경험하는 고통을 부정하고, 과거 회상에 몰두하며, 현실에 눈을 감고 과거 속에 살아가려 했다. 살아가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자기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지고 나아갔고, 연명하는 사람들은 자기 십자가를 내던지고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자기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진 사람들은 상황이 그들에게 던지는 각종 고통과 시련을 회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이 닥친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며 삶의 의지를 만들어 나갔다. 하지만 십자가를 내던진 사람들은 자기가 받는 고통에 고통스러워하며, 현실을 부정하고 모든 것에 무신경해지려 했다. 그들은 자기가 싼 배설물 위에 드러누워 무엇으로부터도 간섭받지 않으려 했다.



고통을 받아들이고 짊어지고 가는 삶은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한다. 그러나 고통을 거부하고 도피하는 삶은 우리를 고통에 짓눌리고 더욱 괴로워하게 한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이 서로 다른 수감자들의 삶은 우리에게 고통을 대하는 태도가 우리에게 어떠한 결과를 가져다주는지를 잘 보여준다. 고통을 받아들이고 짊어지고 가는 삶은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준다. 그러나 고통을 거부하고 도피하는 삶은 우리를 고통에 짓눌리고 더욱 괴롭게 만든다.


우리는 우리를 압박하고 고통받게 하는 많은 시련으로부터 부정하고 회피하려 한다. 2010년대부터 유행하는 '힐링'열풍도 우리를 이러한 시련으로부터 도피시켜주는 도구였다. 그러나 시련은 도피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시련은 삶에 있어서 때려야 땔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우리가 죽음을 어찌할 수 없는 것처럼, 시련도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인생에 있어서 어찌할 수 있는 것은 그 삶을 살아가는 나 자신뿐이란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바꿀 수 없는 것에 매달려 절망하고 분투하기보다는, 바꿀 수 있는 나 자신을 이용해 그 상황을 개선시키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삶의 의미는 삶에게 물음으로써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삶의 의미는 삶이 우리에게 주는 물음을 답함으로써 찾아지는 것이다. 삶은 시련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질문한다. 나에게 주어지는 시련은 그것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나를 고통받게 하는 벌이 되기도 하고, 나를 발전시키는 과제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책의 작가처럼,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시련을 이해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시련은 더 이상 우리에게 벌을 주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시련은 우리에게 우리를 성장하게 해 줄 새로운 과제를 선사할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혹시나 나의 글을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자발적으로라도 고통을 가해야 한다거나, 시련이 주는 고통이 허구라는 식의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한다. 이 글은 어디까지나 자신에게 주어지는 시련이 피할 수 없는 것임이 판명 되었을 때의 얘기다.


 우리는 자신에게 닥친 시련이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것임을 알았을 때, 그것에 굴복하고 파묻혀 삶의 의지를 잃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그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야 한다. 자신에게 닥치는 고통을 부정하고 과거에 젖어 과거 속에 사는 것은 자신의 고통을 더욱 아프게 만든다. 오히려 시련을 인정하고 그것을 몸속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를 고통스럽지 않게 해 주며, 새로운 삶의 의지를 다질 수 있게 해 준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라고 하였다. 죄와 벌의 저자 도스토예프스키는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위인들의 말은, 고통에 좌절하지 않고 그 속에서 무언가를 찾으려고 했던 그들의 삶을 잘 보여준다. 물에 빠졌을 때 그것을 거스르기 위해 온몸에 힘을 주는 것보다, 그것을 인정하고 몸을 맡기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다. 인생이 우리에게 주는 시련도 그러하다. 우리가 인생이라는 물살은 거스를 수 없기에, 그것을 부정하고 박박 거리고 싸워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 오히려 그것에 몸을 맡기고 그 속에서 새로운 방법을 찾을때 그 물살은 우리를 새로운 곳으로 인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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