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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미융합소 Jun 03. 2020

백수의 기상

  창문을 통과한 햇볕의 따스함이 점차 선명해진다. 왁자지껄한 밖의 소음이 점차 선명해진다. 흐릿한 안개를 거닐던 의식은 점차 선명해짐을 느끼며 나는 눈을 뜬다.


"음... 몇 시지?"


핸드폰을 켜 시간을 확인하다. 9시 반. 백수라고 해서 반드시 늦잠을 자는 건 아니다. 백수인만큼 잠이 부족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뭐 물론 '일반인'들에게는 늦은 시간일 수 있으나, 백수에게는 그렇게 큰 사건은 아니다.


알람 따위는 맞춰놓지 않는다. 굳이 시간을 정해놓고 일어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창밖을 보며 바쁘게 움직이다 한적해지는 거리를 바라본다. 그들과 다른 시간에 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그들을 바라보며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알람을 맞추며 제시간에 일어나려고 노력하던 과거 내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는 아침 알람 소리가 마치 달리기 시작을 알리는 총소리 같이 느껴졌다. 기상 시간이 다가오면 몸은 알게 모르게 긴장을 하고 잔뜩 움츠린다. 가끔 반드시 그걸 들어야겠다는 자기 암시가 걸린 날이면 꿈에서도 몇 번씩 알람 소리를 들었다. 꿈과 현실 경계를 아른아른하며, 알람 소리만 기다리던 그때는 잠을 자는 것이 마치, 출발선에서 달리기를 하기 위해 준비자세를 취하는 과정 같았다. 비록 내 핸드폰에서의 하루는 0시가 지나 서부 터지만, 그때의 나에게 하루는 기상을 하는 순간부터였다. 남들보다 늦지 않기 위해, 적어도 남들과 같이 출발하기 위해, 나는 언제나 기상 시간을 준비했다.


 하나 지금, 기상에 대한 전과 같은 압박이 없어지고 난 후, 나에게 기상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사실상 언제나 잘 수 있고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나는 기상에 그렇게 큰 의미를 가지지 않게 됐다. 기상은 여타 다른 행위들(밥 먹기, 씻기, 운동하기)과 같은 삶 속의 작은 하나의 현상처럼 느껴졌다. 기상이 현상화가 되고 나니, 기상의 준비과정에 불과하던 '잠'도 그 의미가 바뀌기 시작했다. '잠'은 더 이상 현실을 잘 살기 위한 부차적인 것이 아니다. 이제는 잠자는 순간도 현실을 사는 나의 한 부분이 되었다. 길을 가다 오줌이 마려우면 잠깐 화장실에 가는 것처럼, 삶을 살다 꿈속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면 잠깐 눈을 붙였다. 그동안 경계 지어 온 꿈속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가 하나가 되는 것 같았다. 이제 하루는 기상시간의 전과 후로 나뉘지 않는다. 이제는 잠자는 시간도, 깨어있는 시간도 모두 나의 세계 속의 시간이다.


 내가 '일반인'이던 시절 나는 잠자는 시간을 너무나 아까워했다. 잠자는 시간 동안은 현실에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현실을 위해 매번 '반드시 몇 시에 자야 해', '반드시 몇 시간을 자야 해'와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기상은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었고, 언제나 개운하지 못했다. 이제는 계절이 바뀌고 나무에서 나뭇잎이 물들어가듯 잠을 청하고 기상한다. 더 이상 기상은 힘들거나 괴롭지 않은 일이 됐다. 나에게 이제 기상은 더 이상 하루의 시작점이 아니다. 기상은 연속적인 삶을 사는 내가 겪는 하나의 현상이다.




 매일 아침 일어나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지 않은가? 알람 소리가 지긋지긋하지 않은가? 자다가 자연스레 눈 뜬 시간이 알람이 울리기 30분 전이라면? 알람의 소리에 맞춰 반드시 기상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잠을 청한다. 우리는 다른 현상들과는 다르게 기상만은 항상 칼같이 지키려고 한다. 우리는 그동안 기상을 당해왔다. 하지만 기상도, 오줌을 누는 것과 같이 하나의 현상이다. 내가 주체가 되어 할 수 있는 행위다. 여러 여건이 맞물려 기상을 할 수 없이 당해야 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이는 어찌 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기상을 컨트롤하기보다는 당하려 해왔기 때문일 수 있다. 기상이라는 현상을 나의 일상 속에 넣고 하나의 현상으로 간주해 본다면, 좀 더 알찬 기상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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