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2.7, 방글이 1세)
나와 아내의 종교는 다르다. 아내는 모태 천주교인이지만 난 모든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무신론자다. 2008년 아이가 태어나기 직전 우리 부부는 아이의 종교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당연히 아내는 천주교인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난 아이에게 선택권을 주고 싶었다. 논의 끝에 내린 절충안은 성당에 데리고는 가되 세례는 나중에 하자였다. 주말마다 성당에 가는 일이 나에게도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갓 태어난 딸을 혼자 보는 일이 더 두려웠다. 더군다나 천주교는 개신교와 달리 아무 성당이나 가도 괜찮았다. 난 주말마다 괜찮게 설계된 성당을 찾아 답사의 일종으로 미사에 참석했다. 우리 가족만의 주말 미사와 답사의 합작은 그렇게 시작됐다.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방문 장소가 중곡동 성당이었다. 중곡동 성당은 다세대·다가구가 밀집돼 있는 중곡제일골목시장 바로 옆에 있다. 우리네 도시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을 지닌 동네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가다 마지막에 우회전을 하는 순간 복잡한 도시 풍경 속에 우뚝 선 노출 콘크리트 정면이 보였다. 성당은 5층으로 그렇게 높지 않음에도 무표정한 입면이 거대하게 느껴졌다. 승효상은 "노출 콘크리트는 가장 종교적인 재료"이고 "시공의 완결성과 진지함이라는 부분에서, 노출 콘크리트 공법은 종교적 제의에 비견될 만큼 숙연하다"라고 했다. 또한, "콘크리트의 무채색은 무표정"하기 때문에 "상징과 장식을 걷어낸 중성적 노출 콘크리트가 오히려 성당의 주체인 사람을 가장 잘 부각해준다"라고 생각했다(승효상,VM space(2001.8)와의 인터뷰 중에서).
이렇다 할 개구부가 없어서 그런지 더 답답해 보이는 성당의 첫인상은 북쪽 건물과 남쪽 건물을 연결하는 몇 개의 브릿지Bridge 아래를 통과하는 순간 금방 잊혀진다. 그곳에는 하늘로 열린 중정과 필요 이상으로 넓다고 느껴지는,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넓기 때문에 더 가치 있는 계단이 있다. 승효상은 중곡동 성당이 도시 내에서 지역 공동체, 신앙 공동체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지역의 종교 공동체로서의 건축 공간은 전례를 위한 내부 공간인 대성당 외에 분과활동을 위한 대소 교리실을 위시하여 관혼상제나 여러 이벤트, 혹은 교우 상호 간의 교류를 위한 공간 등 다양한 종교활동을 위한 장치가 필요한데" 중곡동 성당이 품고 있는 중정과 계단이 바로 그런 장치다.
승효상은 우리나라 근대건축의 대가 김수근의 첫 번째 종교 건축물(마산 양덕성당)을 설계할 때 책임 디자이너였다. 승효상은 당시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던 김수근에게 -김수근은 세상을 뜨기 전 천주교 신자가 됐다- 신학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성당 건축의 통시적인 측면에서 이론적인 토대를 제공했다. 그래서 였을까? 중곡동 성당에서 본당과 사제관을 브릿지로 연결하는 방식은 마산 양덕성당과 유사하다. 하지만 중곡동 성당을 둘러보면서 머릿속에는 마산 양덕성당보다는 안도 다다오Ando Tadao와 르 꼬르뷔제Le Corbusier가 설계한 종교 건축물들이 겹쳐졌다.
아내와 난 방글이가 찬바람을 맞지 않게 하기 위해 유아실로 바로 들어왔다. 그래서 넓은 계단을 통한 정상적인(?) 접근 과정은 미사가 끝난 후 계단으로 내려와 다시 본당으로 올라가면서 확인했다. 본당 폭의 반 정도 넓이의 계단 끝에 세워진 벽에서는 침묵만 흐른다. 본당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이 벽 앞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배형민은 "승효상의 기독교 신앙과 관련해 볼 때 '빈자의 미학'의 핵심이 되는 말은 침묵"이라 했다《감각의 단면, 배형민》. '빈자의 미학'은 승효상의 건축 철학을 대표한다.
답답해 보일 수도 있지만 계단을 따라 올라간 신도들의 시선은 벽에 막히지 않고 하늘로 향한다. 생각해보면 '침묵'은 그 자체로는 느낄 수도, 알 수도 없기 때문에, 침묵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소리나 언어환경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다《The Aesthetics of Silence, Susan Sontag》. 배형민은 "기독교 교리로 보자면 절대 침묵은 곧 신이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본당을 들어서기 직전 마주하는 벽에서 침묵은 무엇을 통해 느껴질까? 갑자기 고장 난 컴퓨터, 가전제품을 산다는 확성기 소리가 들린다. 그래. 벽 넘어 들리는 우리 일상의 소음을 통해 침묵이 느껴진다. 그렇지. 신은 우리의 삶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는 존재지.
계단을 오른 후 왼쪽으로 방향을 틀자 낮은 높이의 본당 입구 홀이 나온다. 일반적으로 입구 홀은 개방감을 위해 넓고 높게 만든다. 그러나 중곡동 성당의 입구 홀은 답답하다. 방금 전까지 있었던 하늘로 개방된 중정의 느낌까지 더하면 그 답답함은 의도된 듯하다. 하지만 본당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구석구석을 비집고 들어오는 빛으로 충만된 트인 본당을 마주하게 된다. 중정 이후 만나는 또 다른 열린 공간이자 성당 입구부터 시작된 여정의 끝이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빛의 교회'에서 본당까지 이르는 여정이 겹쳐진다.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승효상은 본당으로 이르는 여정을 통해 신의 공간과 인간의 공간을 조금은 멀게 하려 했다.
본당에서 빛은 남쪽 벽과 동쪽의 제단 상부 천정 그리고 남쪽 벽에 낮은 수평으로 긴 창, 제단 남쪽과 북쪽 2층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불규칙적으로 들어온다. 하지만 모든 빛은 직접 들어오기보다는 스테인드 글라스Stained glass나 젖빛 유리Frosted glass를 통해 은은하게 스며든다. 신을 단박에 설명하는 말은 '변신 가능한'이다. 모양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신은 그래서 신자들이 세상 어느 곳에 있든지 만날 수 있고 동시에 감시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신자들에게 너무 어렵다. 신자들이 한 번에 느낄 수 있는 무엇이 필요하다. 이 지점에서 신학자들이 선택한 건 '빛'이었다. 빛은 어디에나 있고 느낄 수 있지만 그 모양을 설명할 수 없다. 심지어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빛은 장엄하고 때로는 빛의 사소한 연출에 무엇인가를 느끼고 눈물을 흘린다. 인간의 탄생이 신에 의한 것임을 믿는 천주교와 기독교에서 만물 생성의 과정에 대한 설명은 빛에 대한 경험으로 빗대어진다.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이 쓴 《살과 돌Flesh and stone》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하느님을 알 수 있습니까?... 그리고 당신은 어떻게 그를 저에게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라는 이교도 켈수스의 물음에 기독교인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답한다. "모든 것의 창조자는... 빛이오." 이러한 오리게네스의 주장은 빛은 살Flesh이 되기 전 그리고 살(육체)을 떠난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이러한 빛의 이미지는 창세기 1장 3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라는 문구와 통하기도 한다. 빛은 어디에나 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실체 없는 하느님이 어디에나 있음을 의미한다. 신은 어디에나 있고, 보이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육체를 벗어나 빛으로 다가서는 것을 의미했다. 빛은 어디에나 있지만 혹은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건조물, 건물, 특별한 장소가 필요하다. 신을 모시는 건물에서 빛은 신의 또 다른 발현이다.
유아방에서 지니의 모유를 먹고 기분 좋아진 방글이를 데리고 본당으로 갔다. 썰물처럼 신자들이 빠져나간 본당은 다시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침묵을 뚫고 들어오는 빛을 방글이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방글이에게 본당 곳곳으로 스며드는 빛을 잘 기억해 두라고 말했다. 내 일방적인 바람이겠지만 방글이가 이 장면을 눈으로 기억했다가 언제가 필요할 때 발현시켰으면 좋겠다. 방글이는 이따금 옹알이를 했다. 나의 부족하고 지극히 감상적인 설명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는 대꾸로 나는 받아들였다. 딸을 키우면서 내가 잘 모르는 것으로 교육시키지 말고 내가 잘 아는 것으로 무엇이든 느끼게 해 주자는 다짐을 이때 했다. 내가 데리고 간 곳에서 딸이 무언가를 꼭 얻을 필요는 없다. 내가 공감하고 싶은 그곳의 분위기만이라도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나만의 교육방식이다.
설계자: 승효상&이로재건축(2002)
주소: 서울광역시 광진구 능동로 3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