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아트센터 / 크리스텐 쉐멜, 마리나 스탄코빅, 창조건축
국내 예술계뿐만 아니라 해외 예술계에서도 가장 많이 알려진 한국인 예술가는 아마도 백남준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백남준만을 위한 전시공간으로 백남준 미술관은 껍데기는 화려하게 만들 수 있지만 콘텐츠(Contents)를 못 채워 고민하는 대한민국 내 수많은 문화기반시설에 비해 처음부터 상당한 성공을 깔고 시작하는 프로젝트였다. 이러한 이유로 2001년 백남준 미술관(당시에는 이 명칭을 사용할 수 있었다) 건립 부지 선정을 위한 각 지자체의 경쟁은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1932년 7월 20일 서울에서 태어난 백남준은 18세 때 한국을 떠났다. 그러니 각 지자체와 백남준은 특별한 상관성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유치를 위한 타당한 근거는 만들기 나름이었다.
2001년 경기도가 백남준 생존 시에 미술관을 짓겠다는 MOU를 맺고 경기도 내 지자체들은 다시 유치 경쟁에 들어갔다. 이제 미술관 건립을 위한 사업비를 누가 더 많이 낼 수 있는가로 경쟁의 초점이 모아졌고 결국 지자체 재정자립도가 높은 곳이 유리한 입장이 됐다. 최종 유치 도시로 결정된 용인시는 기존 경기도박물관 북쪽, 당시 경전철 예상 노선 근처 부지를 무상으로 내주고 사업비의 일부를 부담하겠다고 약속했다.
부지가 결정되고 2003년 백남준 미술관 건립을 위한 국제 아이디어 공모전이 실시됐다. 총 42개국 439개 팀이 참여한 공모전에서 당선자는 독일의 신예 여성 건축가 크리스텐 쉐멜(Kirsten Schemel)이 선정됐다. 그녀가 제안한 개념은 '더 매트릭스(The Matrix)'였다. 당선자 쉐멜은 동아일보(2003.10.13)와의 인터뷰에서 '10여 년 전 독일 카셀 도큐멘타(Kassel Documenta)에 나온 백남준 선생의 작품을 처음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고 관객들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준다는 점에서 내가 추구하는 건축철학과 일치했다'라며 공통점을 강조했다.
쉐멜이 보기에 '서울은 아직도 많은 변화가 진행 중이어서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실험할 수 있는 전위적 장소'였기 때문에 '동선이 정해져 있는 기존 미술관이나 박물관과 달리 관객이 주체가 되어 자유롭게 공간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전시공간도 그냥 바닥이 아니라 곡선 형태로 만들어 마치 산을 오르는 것처럼 관람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라고 한다. 그런데 어쩌나? 아무리 땅이 좁다 하더라도 용인은 서울이 아니다.
"건축은 대지가 요구하는 조건과 프로그램의 자기 완결적 욕망 사이에서 발견하는 의미의 구축이다. 대지의 조건에 적응하지 못하는 건축의 공허함이나 프로그램이 결핍된 건축의 무모함은 모더니즘이 건축에 가져다준 가장 커다란 교훈이었다. 백남준 아트 센터 당선 안은 건축의 이러한 존재론적 이원성을 절묘하게 수용하고 건축과 자연,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21세기적으로 정리한 일종의 선언이었다. 탈위계, 지형, 비물질화, 비선형 같은 난해한 현대 철학의 용어들이 형태로, 공간으로 변용될 수 있음을 증명해냈다."
-백남준 아트센터, 그 많던 아이디어는 어디로 갔을까? 비평: 이경훈, 공간지 2008.05(486)-
크리스텐 쉐멜의 개념 '매트릭스'는 어떤 틀을 짜서 전시의 요구에 대응하는 가변적인 공간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미술관이 앉혀질 대지의 형상을 그대로 살리는 전시공간(고체화된 지형; Petrified Topography)을 기존 미술관이 취하는 구획된 공간을 넘어 외부공간으로 확장시킨다는 것이었고 전시장 내부에 다양한 박스 형태로 부스(Booth)를 천장에 매단다는 독특한 전시개념을 전개시켰다. 이 개념은 추후에 구조적 해결을 위해 공사비를 상승시키는 요인이 됐다. 쉐멜의 안을 실현시키기에는 경기도문화재단이 가지고 있는 예산은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결국 디자인 조율 과정에서 긴 시간을 소모하게 됐고 그 사이 건축가 개인적인 사정과 겹쳐 결국 최종안은 크리스텐 쉐멜 보다는 협력 건축가 마리나 스탄코빅(Marina Stankovic)이 주도적으로 진행하였다.
새로운 개념의 공간에 국제적으로 인지도 있는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는 백남준 미술관은 톱클래스(Top class)를 넘어 월드 클래스(World class)의 미술관이 될 수 있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이 두 조건을 마치 퍼즐 맞추듯이 엮어내는 과정에서 어긋나 버리면 완벽한 조건들은 조건으로만 그칠 뿐이다. 어쩌면 이 과정이 조건을 갖추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결과적으로 백남준 아트센터는 말해 주고 있다. 많이 아쉽게 됐지만 백남준 아트센터는 2008년 완공된다. 하지만 그 사이 수많은 참신한 아이디어들은 종이 위에만 남겨졌고 백남준도 세상을 떠난다(2006년 1월 29일 타계). 설상가상 '백남준 미술관'이라는 명칭도 특허등록이 되어 사용하지 못하고 최종적으로는 '백남준 아트센터'가 됐다.
물론 건축물이 기본구상단계에서 제시된 아이디어에 따라 지어질 수만은 없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포기하고 택한 '현실적인 안'이라는 표현에서의 '현실적인'이라는 단어가 그 공간이 담고자 하는 '백남준'을 표현하는 단어로는 참 적절치 못하단 생각이 든다. 백남준이 '원래 예술이란 반이 사기'이고 '속이고 속는 것 중 고등 사기'이며,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것'이라 말했지만 그 말이 자신을 위한 미술관을 짓는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백남준 아트센터의 최종안은 현상설계 당선자인 크리스텐 쉐멜이 아닌 마리나 스탄코빅이 주도를 하고 창조건축이 국내 건축사무소로 참여하여 만들어졌다. 나름 현재 설계안의 의미를 찾자면 기본구상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현대건설이 제대로 시공했고 내외부의 풍경이 동시에 펼쳐지고 투영되는 투명한 스킨(Skin)이 백남준의 정신을 담고 있다고 한다. 또한, 비디오 아트의 출발점인 하얀 백지 상자를 의미하기도 하단다(출처: 매일경제, 2008.12.17자 기사). 하지만 그럼에도 완공된 백남준 아트센터를 보고 있으면 월드 클래스 미술관을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너무 허망하게 날린 것 같아 위로가 안 된다. 더 슬픈 건 백남준 자신이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으로 명명한 공간치고는 너무 우리가 안고 있는 한계가 그대로 노출됐다.
완공된 백남준 아트센터의 평면은 대지의 가용부지에 최대한 맞춰 동서방향으로 눕혀진 'P자'형태다. 그래서 백남준 아트센터는 즉각적으로 그랜드 피아노를 떠오르게 하지만 그렇다고 백남준이 예술행위로 부쉈다는 피아노의 'P'자와 상통한다는 등의 얼토당토않은 설명은 참 억지스럽다. 이런 논리라면 백남준이 바이올린을 부쉈다면 'V'자 평면으로 설계해야 하나? 오히려 이런 설명보다 넓은 동쪽 계곡으로 대규모 공간이 필요한 전시장을 배치하고, 경사가 급한 서쪽으로 사무영역 등을 배치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형상이라고 설명하는 게 더 설득력 있고 솔직하다.
건물 입면을 이루는 수직으로 분절된 유리 커튼월에 수평적으로, 마치 전류의 흐름을 연상시키는 띠 사이로 비치는 외부공간은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이자 대가인 백남준 작품을 떠오르게 한다. 스탄코빅은 각기 다른 반사율을 갖는 부분 인쇄유리를 여러 층으로 겹쳐 스크린 파사드(Screen Facade)를 구성했다고 한다. 그녀는 '파사드는 볼륨(Volume) 및 투과되는 빛을 제어하는 도구인데 빛을 내는 작품들을 전시하는 이런 전시 건물에 특히 필요한 것'으로 '이는 또한 내부와 외부 경관 사이의 관계를 정립해 주며 내부에서 외부로, 또는 외부에서 내부로 지형의 연속성을 드러내 준다'라고 생각했다(출처: 건축세계 2008.12).
"백남준 아트센터의 실패 혹은 부분적인 성공은 국제설계공모에 나타나는 몇 가지 문제를 표상하고 있다. 첫째는 전문가로서의 건축주 역할이 건축가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글로벌 스탠더드(Global Standard)'라는 공허한 원칙만 있을 뿐 구체적인 실천방안이나 경험이 없는 비전문가 건축주는 대부분의 의사결정을 '위원회'에 위임하고 있다. 그리고 위원회는 강력한 리더십(Leadership)보다는 다소 원만하고 무미건조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일반적이며, 여러 상황에 대한 대응이 지연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더욱이 대개 자기중심적이고 독선적이며 게다가 지적이기까지 한 건축가들의 상대로서 위원회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요구를 정확히 알고, 동시에 건축가의 지적능력과 예술적 상상력을 존중하고 지원하는 프로페셔널(Professional)한 건축주가 완성도 높은 건축의 선결 조건이다."
-백남준 아트센터, 그 많던 아이디어는 어디로 갔을까? 비평: 이경훈, 공간지2008.05(486)-
크리스텐 쉐멜 안이 현실적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이디어 현상은 아이디어 현상에서 그쳐야 한다는 말도 설득력은 있다. 하지만 적어도 백남준 아트센터는 우리나라에 드물게 들어설 수 있는 월드 클래스 미술관이 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최소한 백남준이라는 콘텐츠의 수준은 충족이 돼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드문 그 기회를 날려버린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의 백남준 아트센터를 볼 때마다 참 아쉽다. 더불어 그래도 다행인 건 21세기를 20년이나 지난 지금도 반복해서 드러나는 유사한 한계를 지닌 사회를 1950년에 벗어나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된 백남준의 일생이다. 만약 그가 한국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면 그냥 돈 많은 집 한량 아들이나 쇠락한 과거나 곱씹는 괴팍한 성격의 노인네가 됐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