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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ur Oct 11. 2021

동서양의 접점에서 변방으로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와 이스탄불(Istanbul)

60일간의 전투가 끝난 뒤 ‘난공불락(難攻不落)’의 도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 함락됐다.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오스만 제국의 황제 메흐메트 2세(Mehmet II)는 도시 내 중요 건물에 호위병을 보내 약탈과 파괴를 막았다. 전통적으로 병사들에게 주어졌던 3일간의 약탈 기간도 하루로 끝냈다.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오스만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쓰고자 했다. 황제가 보호하고자 했던 건물 중에는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 대성당도 있었다. 그런데 병사들이 가장 먼저 약탈하고 싶었던 건물도 하기아 소피아 였다. 도시가 함락되고 병사들은 대성당 앞에 있는 황제의 광장으로 달려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콘스탄티노플 시민들도 하기아 소피아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도시의 수호성인이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 믿으며 건물 안으로 피신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후 약탈의 욕망과 구원의 희망은 하기아 소피아에서 교차했다.

하기아 소피아를 처음 건립한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2세다. ‘위대한 성당’이라는 뜻의 ‘마그나 엑끌레시아(Magna Ecclesia)’라고 불렸던 대성당은 위상과 규모 면에서 도시 내 다른 성당들을 압도했다. 하지만 처음 지어졌던 대성당은 404년 일어난 폭동으로 완전히 전소됐다. 현재의 하기아 소피아를 건립한 황제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 I)다. 그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을 종식시키고 교황권 확립에 앞장섰다. 또한, 영토 확장, 법전 편찬 등 위대한 업적도 남겼다. 그래서 ‘성인’과 ‘대제(the Great)’ 칭호를 함께 받았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하기아 소피아는 세속의 권력과 종교의 우위를 모두 누릴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었다.


황제는 당시 유명했던 건축가이자 수학자 안테미오스(Anthemios)와 이시도로스(Isidorus)에게 대성당 건축을 맡겼다. 신속한 공사를 위해 제국 전역의 그리스 신전에서 돌기둥과 대리석이 공출됐다. 델피의 아폴론 신전과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이 이때 무너졌다.


건축물이 권력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일단 규모가 커야 한다. 하지만 이를 구현하는 건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건축기술과 재료가 한정돼 있었다. 두 건축가는 가장 먼저 선례를 찾았다. 그리고 돔(dome)으로 덮인 로마의 판테온(Pantheon)을 응용하기로 했다. 두 건축가는 판테온보다 더 넓은 내부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가운데 돔을 두고 그 주변에 보조 돔과 아치(arch)를 배치했다. 가운데 돔 아래에는 40개의 창을 만들어 내부 공간을 밝힘과 동시에 공간의 스펙터클(spectacle)을 부여했다. 537년 준공 이후 하기아 소피아는 동로마 제국의 정치적 중심이자 동방교회의 종교적 구심이었다.

성당이 모스크로 바뀌는 순간은 짧았다. 메흐메트 2세와 동행한 이슬람 율법 학자가 설교단에 올라 “하나님(God) 외 다른 신(god)은 없습니다. 무함마드(Muhammed)는 그분의 사도입니다”라는 고백, 샤하다(Shahada)로 그 전환은 끝났다. 메흐메트 2세는 메카 방향을 표시하는 미흐라브(Mihrab) 설치를 명했다. 가톨릭의 흔적과 이슬람의 표식이 그렇게 동거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 불편한 동거는 오래가지 않았다. 1520년에 황제가 된 쉴레이만 1세(Suleiman I)는 동로마 제국의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를 회반죽으로 덮어버리도록 했다. 회반죽 아래 있던 동로마 제국의 흔적들은 400년 뒤 초대 터키대통령 아타튀르크(Mustafa K.Ataturk)가 하기아 소피아를 박물관으로 바꾸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가톨릭 성당도 이슬람 모스크도 아닌 박물관이었던 하기아 소피아에서 두 문명은 병존했다.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묘사한 황금색 모자이크와 알라의 이름이 새겨진 원판이 한 장소에 있고 동로마 황제들이 즉위식 때 앉았던 자리인 옴팔리온(Omphalion)과 미흐라브가 한 장면에 보인다. 하기아 소피아가 보여주는 이런 장면은 ‘동서양의 교차로’라고 불리는 이스탄불(Istanbul)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스탄불은 보스포루스(Bosphorus) 해협을 가운데 두고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은 흑해와 마르마라(Marmara)해를 연결하고 있는데, 마르마라해가 지중해로 이어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곳은 흑해 연안 국가들의 숨통인 셈이다. 육로를 중심으로 보면 이스탄불은 유럽과 중동의 접점이었다. 그래서 동로마 시대에 콘스탄티노플은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유럽 문명을 지키는 방패였고 오스만 제국 시대에 이스탄불은 이슬람 문명이 유럽 지역으로 뻗어나가는 포석이었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과 문명적 조건이 330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처음 이곳에 도시를 만들고 로마제국의 수도로 선포한 이유였다.


메흐메트 2세도 이스탄불이 지닌 지리적 이점과 문명적 조건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조치를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메흐메트 2세는 도시 재건과 더불어 노예나 피난민이 되어 도시를 떠난 그리스인들의 귀환을 명령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교도로 공인하고 도시에 머물도록 했다. 이슬람교도들의 탄압이 있었지만 성당과 유대인 신전이 도시에서 모스크와 공존했다. 메흐메트 2세는 육로와 해로를 통해 여러 국가에서 온 상인들과 사절들이 어울려 살아갈 때 이스탄불은 번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던 해 45,000명이었던 인구는 1800년대 말 90만 명으로 늘어났다. 1850년 이스탄불을 방문했던 프랑스 작가 플로베르(Gustave Flaubert)는 도시가 지닌 복잡함과 다양함에 매료됐다. 그리고 세계의 수도가 될 환상적인 ‘인간 개미둑(human anthill)’을 발견했다고 썼다.

하지만 아타튀르크가 터키를 ‘터키화’하면서 이스탄불의 개방성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세속국가’, ‘공화주의’와 함께 아타튀르크의 정치철학을 이루는 ‘터키민족주의’는 그를 독립영웅이자 국부로 추앙하는 밑바탕이 됐지만 이로 인해 이스탄불은 유럽과 아시아의 변방으로 전락했다. 터키의 수도가 앙카라(Ankara)로 바뀌면서 ‘동서양 교차로’라는 이스탄불을 설명하는 문구는 관광 안내서에만 남게 됐다. 그리고 올해 그 영향이 하기아 소피아에 미쳤다.


이슬람주의를 앞세운 정의개발당 소속의 레젭 에르도안(Recep Erdogan)이 대통령이 되면서 하기아 소피아를 모스크로 바꾸자는 주장이 힘을 받았고 2020년 7월 터키 최고행정법원이 하기아 소피아의 박물관 사용은 법률에 어긋난다고 판단했다. 법원 결정 직후 에르도안 대통령은 하기아 소피아를 모스크로 개조하라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당장은 아니겠지만 쉴레이만 1세가 하기아 소피아 내 동로마 제국의 흔적을 회반죽으로 가렸듯 이번에도 누군가는 그 흔적을 그 자리에서 떼어내려 할 것이다. 이스탄불과 하기아 소피아의 시간은 계속 거꾸로 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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